2400년 전 어느날. 전남 화순 대곡리에 큰 일이 터졌다. 이 일대를 다스리던 소국의 왕이 서거한 것이다.
제정일치의 시대, 즉 세상을 다스리면서 천지를 농단하여 사람과 하늘을 이어준 일인독존의 왕이 거한 것이다. 제사장이자 왕이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장례를 의논한다. 왕은 본향, 즉 천신이 되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슬픔보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돌로 파서 무덤을 만드는 한편 그 안에는 굴피나무로 통나무관을 만들기로 한다.
■제사장 겸 임금이 서거하시다
우선 통나무 관 밑에는 청동으로 만든 칼 두 자루를 깐다. 액막이용이다. 그런 다음 통나무관에 시신을 누이고 청동신기(神器)들 즉, 청동검과 거울, 방울, 도끼, 새기개 등을 넣고 뚜껑을 덮는다. 이 모두 생전에 제사장이 하늘신,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하늘과 인간을 소통시킬 때 쓰던 예기들이다. 통나무관을 구덩이에 내리고 돌과 흙을 채웠다.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돌을 가득 쌓은 무덤형식은 훗날 적석목곽분이라 일컬어진다. 소국은 또 새로운 왕(제사장)을 세우고 또 다른 시대를 열어간다.
그로부터 사십 갑자(甲子)의 긴 세월이 흐른 1971년 12월20일. 갓 서른 살이 된 고고학도 조유전이 전남도청 문화공보실을 찾는다. 문화재연구소 신출내기 학예사였던 고고학도는 전국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위해 전남도청을 먼저 들른 것이었다.
“전남지역 지표조사를 위해 사전에 정보를 얻으려 도청을 찾은 거죠. 그런데….”
어느 직원이 “마침 잘되었다”면서 부리나케 뭔가를 들고 달려왔다.
“선생님, 누가 이것들을 신고했는데요. 한번 봐주세요.”(직원)
조유전은 눈을 의심했다.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직원이 신고품이라며 들고 온 것들은 고색창연한 청동예기 11점이었어요.”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흘 뒤인 12월24일 조유전은 윤무병 국립중앙박물관 수석학예관과 함께 현장을 찾는다.
“얼마나 급했는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광주를 거쳐 현장(대곡리)에 도착했어요. 한 20인승 되었던가? 당시만 해도 일개 말단 공무원이 출장가면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
사실 1971년이라면 한국 고고학 발굴 사상 엄청난 일이 벌어진 해였다. 그해 7월5일 그 유명한 무령왕릉이 발견되었지만, 단 하루 만의 졸속 발굴로 악명을 떨친 해가 아니던가.
“당시엔 차분하고 철저한 발굴이나 조사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어요. 무령왕릉처럼 빨리빨리 발굴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지. 지금 생각하면 모두들 후회하고 아쉬워하지만 그 당시의 풍토는 그랬지.”
■곡괭이 끝에 걸린 청동기 세트
각설하고 2400년 만에 현현(顯現)한 이 청동예기들을 둘러싼 기막힌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무령왕릉 발굴소식이 전국을 강타했던 그 해 여름, 1971년 8월 어느 날.
화순 대곡리에 살던 구재천씨(당시 67세)가 삽과 곡괭이를 들었다. 자기 집 북쪽의 담장 밖에 떨어지는 낙수 때문에 물이 고이자 배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땅 속이 비어있는 듯 텅텅 소리가 났다.
‘땅 속에 뭐가 있어서 이렇게 소리가 나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구씨는 땅을 팠다. 그런데 그 안에 희한한 물건들이 줄줄이 엮어 나오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느라 녹 슬고, 흙 묻은 물건들. 하지만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얼마 후 마을에 철컥컬컥 소리가 났다. 엿장수의 가윗소리였다. 구씨는 “때마침 잘 됐다”면서 땅속에서 줄줄이 사탕처럼 파낸 물건들을 엿장수에게 건넸다. 이제 엿장수의 몫이 된 것이다.
■엿장수의 몫이 된 청동기 세트
그런데 구씨로부터 무심코 이 철물을 받은 엿장수는 생각할수록 찜찜했다. 온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철물들을 수거하면 그 가운데는 꽤나 값나가고 중요한 물건들이 우연히 흘러 들어오기도 하지 않는가. 엿장수가 보기에 구씨가 건네준 이 물건들은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구씨로부터 들은 바로는 땅을 파니 나온 물건들이라 하지 않는가.
선택의 기로에 선 엿장수는 결국 ‘신고의 길’을 선택하고 전남도청을 찾았다.
“당시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매장문화재는 발견한 즉시 신고해야 하지만 최초 발굴자인 구씨는 매장문화재인 사실을 몰랐는데, 나중에야 엿장수가 신고하게 된 거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최초 발견으로부터 4개월이 지난 뒤인 12월24일 조유전 학예사가 청동기 전문가인 윤무병씨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대곡리 현장을 들른 것이다.
“마을에 들어서니 분위기와 느낌이 좋았어요. 약 50호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었는데, 마을 안에는 고인돌(지석묘)이 7기나 되어 칠성바위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비단 이 마을뿐 아니라 화순 일대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수많은 고인돌이 집중돼 있다. 마을 곁을 흐르는 개천의 이름도 지석천(砥石川·영산강의 지류)일 정도이다.
“개천 양안으로 폭넓은 충적대지가 자리잡고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의 터전이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어. 특히 무덤이 확인된 구재천씨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 가장 양지 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었지.”
하지만 이미 유구는 파괴된 상태였다.
“발견 당시의 상황을 구씨로부터 듣고, 무덤의 구조를 살펴보고 도면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어요.”
하지만 더 이상의 조사는 없었다. 무령왕릉의 졸속발굴 이후 불과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조유전 학예사 등에 할당된 조사시간은 24일 단 하루, 즉 한나절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빨리빨리 조사’였던 것이다.
■11점이 한꺼번에 국보
여하튼 그때 확인된 청동 잔무늬 거울(정문경·精文鏡) 2점, 팔주령(八珠鈴) 2점, 쌍두령(雙頭鈴) 2점, 한국형 세형동검 3자루, 청동도끼와 새기개 등 총 11점이 이듬해 3월2일 한꺼번에 국보(제143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하나같이 획기적인 유물들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국보유물을 11점이나 발견하고 신고한 구씨와 엿장수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신고자인 엿장수는 사라졌고, 발견자인 구씨는 처음에 신고 없이 엿장수에게 팔았다는 것이 좀 걸리고 해서…. 결국 누구도 보상받지 못했어요.”
37년이 흘러간 2008년 2월13일. 71년 당시 국보가 11점이나 나온 대곡리 옛 구재천씨 집 담장너머에 대한 국립광주박물관의 재조사가 시작했다.
흉측한 폐가로 변해 있는 현장에 대한 정비계획의 하나였다. 발굴단은 무덤 바닥에 남아있던 목관의 흔적을 두부처럼 잘라 들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관의 흔적을 3분의 2나 걷어냈지만 더 이상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혹시 요갱(腰坑·묘광 바닥 가운데에 중요한 부장품을 매장하는 시설)이 있을까 기대했지만 막판까지 징후가 없어 포기상태였다. 발굴 시작 일주일 후인 20일 전문가들을 모셔놓고 지도위원회를 열었다. 조사를 마무리하기 위한 일종의 수순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인 21일 오전 11시30분. 무덤 바닥 남쪽에 있는 옅은 검은색 띠가 수상했다. 발굴용 꽃삽으로 살살 흙을 걷어냈더니 청동검의 끝이 2㎝ 정도 노출되었다.
37년 전 구재천씨의 손을 피해 숨어있던 청동검 2점이 햇빛을 본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2400년 전 청동기인들이 붕어한 왕의 영원불멸을 기원하며 부장했던 청동기 세트를 모두 찾아낸 것이다.
이 대곡리 유적은 적석목관묘로 확인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적석목관묘가 기원전 4~기원전 3세기쯤 출현, 기원 전 후까지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 적석목관묘에서 출토되는 대표유물은 한국형 세형동검이다.
■볼수록 신비로운 국보 11점
한국형 세형동검의 선조는 기원전 9세기쯤부터 발해연안, 즉 난산건(南山根) 유적을 필두로 차오양(朝陽)·젠핑(建平)·진시(錦西)·푸순(撫順)·칭위안(淸原)·뤼다(旅大) 등에서 쏟아진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청동단검)이다. 이 청동단검의 전통이 한반도로 이어져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한국형 세형동검이라는 독특한 청동기 문화가 창조되는 것이다.
대곡리 청동기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청동거울과 청동방울이다. 2400년 전 제정일치 시대의 왕은 제사장을 겸했다. 그는 양손에 든 청동방울을 흔들며 신(神)을 부르고, 가슴팍에 단 청동거울로 태양의 신비로운 빛을 백성들에게 비추었을 것이다. 빛은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인 동시에 사람과 왕 사이를 구분하는 절지천통(絶地天通)의 도구였을 것이다.
청동방울, 특히 팔주령과 쌍두령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는 출토되지 않은 한반도 특유의 청동유물로 알려져 있다. 팔주령은 방사상의 여덟개 가지 끝에 방울을 만든 형태이다. 오목한 불가사리 모양의 판에 방사상의 돌기가 달리고 그 끝에 각각 둥근 방울이 하나씩 붙어있다. 방울 안에는 청동구슬이 삽입돼 있어 흔들면 딸랑딸랑거린다. 쌍두령은 양끝에 방울이 있고, 그 안에 구슬을 넣었다.
청동기 전문가인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은 “8개라는 게 의미심장하다”고 운을 뗀다.
“정문경(청동거울)에도 동심원이 8개 그려져 있고, 8개의 방울이 있는 팔주령에도 태양을 상징하는 일광문이 보입니다. 8이라는 숫자는 일본에서 ‘풍요’ ‘많음’을 뜻합니다. 결국 청동거울과 팔주령 등은 제사장이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도구가 아니었을까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제사장은 제정일치 시대의 왕, 즉 수장이었을 것이다. 이건무 전 청장은 “지금도 청동거울이나 팔주령 표면에 새겨진 정교한 기하학 문양을 재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다”고 밝혔다.
이 대목에서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떠오른다. 만약 엿장수가 고물로 취급해서 팔아 넘겼다면 그대로 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의 기로에 선 엿장수는 그야말로 ‘신고의 길’을 택했고, 덕분에 11점이나 되는 국보를 되찾았다. 그야말로 엿장수 맘대로 국보세트가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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