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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과거 4수생 이규보의 궁색한 변명

‘주필(走筆) 이당백(李唐白)’은 당나라 천재시인 이태백에 빗댄 고려 문인 이규보(1168~1241)의 별명입니다. 고려를 대표하는 천재문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규보를 상징하는 이미지도 많습니다. 천재, 결벽, 대쪽, 주당, 풍류, 방랑, 광기, 운둔, 거사…. 대서사시인 동명왕편을 짓는 등 평생 8000수의 시를 지은 인물이니 뭐 어떤 수식어라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규보는 당대 최고명문사학인 최충의 문헌공도를 다녔던 영재였습니다. 학창시절엔 문헌공도가 실시한 일종의 과거모의고사에서 거푸 1등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이규보도 생원·진사를 뽑는 과거시험(국자감시)에서 3번이나 거푸 떨어진 끝에 4번째 기회에 겨우 합격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뭅니다. 3전4기 끝에 국자감시에 장원급제로 합격했지만 대과(예부시)에서는 밑바닥 성적으로 겨우 턱걸이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과거의 관문을 통과한 이규보는 출세를 위해 무인독재정권에 끊임없이 아부했던 속물로도 평가되기도 합니다. ‘최충헌-최우’ 등에 대를 이어 충성했으니 그런 평가를 받습니다. 대시인 이규보와, 아부꾼 이규보…. 이규보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런 극단의 이미지가 중첩되는 걸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76회는 ‘과거 4수생 이규보의 궁색한 변명’을 들어봅니다

 

-주필(走筆) 이당백(李唐白)’
당나라 천재시인 이태백에 빗댄 고려 문인 이규보(1168~1241)의 별명이다.
이규보는 걸음이 빠르고, 말이 빠르며 시를 빨리 지어서 ‘3첩(捷)’이란 별칭을 갖고 있었다.(<동국이상국집> ‘백낙천의 병중 15수에 화답하여…’)
호가 백운거사이고, 어릴 적부터 기동(奇童)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심지어는 스스로 “색마(色魔)는 털어버렸지만 술, 즉 주마(酒魔)와 시, 즉 시마(詩魔)는 버리지 못했다”고 한탄하지 않았던….
훗날 최고 실력자 최충헌도 “술에 만취한 상태로 일필휘지로 40여 운이나 시를 짓는 이규보를 보고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규보를 떠올리면 왠지 천재, 결벽, 대쪽, 주당, 풍류, 방랑, 광기, 운둔, 거사…. 뭐 이런 이미지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송대에 본격적으로 실시된 과거시험 모습. 황제 앞에서 치르는 전시는 황권을 강화하고 신분제를 허무어 근대화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시인인가 아부꾼인가
그러나 ‘마냥’ 그렇지 않았다.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의 인물평을 보자.
“과거에 급제한 후 최충헌에게 ‘아부하여’ 한림에 제수되고…. 그의 시는 기발하고 간절한 지취가 전혀 없고, 추솔하고 산만하여 명실이 꼭 맞지 않았다.”(<청정관전서>)
이덕무의 인물평이 다소 각박하다. 하지만 그(이규보)가 남긴 숱한 글을 들춰보면 이덕무 등의 인물평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규보는 전형적인 ‘생활인’이자, 자신의 입신양명에 전력투구한 ‘보통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과거합격에 목숨을 걸어 당대 명문사학에 입학했고, 그것도 모자라 개인과외교습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과거에 3번이나 떨어진 끝에 겨우 합격한 4수생이었고…. 이후엔 이덕무의 말마따나 모든 학맥과 인맥, 혈맥까지 동원, ‘구직’에 목을 맨 인물이었고….  아니 이덕무의 인물평처럼 ‘출세를 위해 군부독재에 끊임없이 아부했던’ 속물이었다. 하기야 ‘최충헌-최우’ 등에 대를 이어 충성했으니….
장편 대서사시인 <동명왕편>을 지었고. 시만 8000편이나 남겼다는 대시인 이규보와, 아부꾼 이규보…. 과연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런 극단의 이미지가 중첩되는 것일까. 

 

■명문사학 입학에 과외수업까지
“2살 때(1169년)부터 책을 즐겨 가지고 놀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으며 읽는 시늉을 했다. 11살 때 삼촌(이부)의 친구들이 이규보의 대구(對句)를 보고 탄복했다. ‘과연 기동(奇童)이 아닌가!’”(<동국이상국집> ‘연보’)
이규보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규보의 집안은 전통의 문벌귀족이 아니었다. 지방 향리가문 출신이었다. 그랬으니 ‘출세의 유일한 길’인 과거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이윤수)는 14살이 된 ‘영재아들’을 당대 최고명문 사학인 ‘문헌공도’에 입학시켰다. 해동공자 최충이 설립한 ‘문헌공도’는 당대 12대 명문사학인 ‘12공도’ 가운데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명문 중 명문이었다. “양반자제 가운데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문헌공도에 입학했다”(<고려사> ‘선거지·사학’)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까….
이규보는 두각을 나타났다. ‘문헌공도’는 해마다 여름철에 ‘하과(夏課·여름철 합숙 과외)’를 개설한다. 이규보는 이 하과에서 치르는 ‘급작(急作)에서 거푸 1등을 차지했다.
“문헌공도는 해마다 여름철,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하과(夏課), 즉 ‘여름철 특별과외’를 열었다. 틈틈이 ‘각촉부시(刻燭賦詩)’, 즉 ‘촛불에 눈금을 그어놓고 그곳까지 타들어갈 때까지 시를 짓는 시험’을 펼쳤다. 이것이 ‘급작’인데 이규보가 잇달아 1등을 차지했다. 이듬해(1182년) 급작에서도 ‘궁궐의 옥당에서 숙직하다(內直玉堂)’는 주제의 시로 1등을 거머줬다.”
급작은 일종의 ‘과거 대비 족집게 모의고사’였다. 그러니까 이규보는 지금으로 치면 수능 모의고사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이규보 집안의 기대는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1183년(명종 13년) 봄, 수주(수원) 수령으로 발령받은 아버지(이윤수)는 아들을 개경에 남겨두고 임지로 떠났다. 5월에 열릴 과거(국자감시)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합격을 위해 개인과외 선생까지 붙였다. 과거에 임박, 과외를 구했으므로 아마도 ‘족집게 고액과외’였을 것이다. 이규보가 ‘이 이부라는 이에게 드린다’는 고율시를 보자.
“공(이 이부)이 집에서 매양 관동(冠童·어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는데, 나도 어릴 때 참여했다. 그 때 선생의 지위로 모셨고….”(<동국이상국집>)
이규보가 ‘1183년 과거’에 대비, 이 아무개라는 사람에게 개인과외를 받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평생도> 속에 그려진 과거시험장 모습. 이규보는 무려 3번의 낙방을 거듭하며 4수끝에 겨우 장원급제했다.

■사교육에 젖은 이규보 가문
흥미로운 것은 이규보 가문의 ‘사교육’이 이규보의 셋째아들(이징)에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규보의 고시(‘신 대장에게 내 아들 징을 가르치는 데 사례함’)을 보자.
“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 만들기를 기약하는데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을까.”
이규보는 이 시를 쓰면서 “신 대장은 나이 80여 살인데 항상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는 각주를 달았다. “셋째 아들 징이 썩은 나무 같아 새길 수 없다”면서 신 아무개라는 과외선생에게 아들을 맡긴 것이다.
“동몽(어린 학생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모여 글방(서숙·書塾)을 이뤘네.”
이규보의 시를 보면 신 대장이라는 사람은 여든살이 넘도록 글방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문학원 강사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사학 졸업생으로서의 자부심
또 있다. 이규보는 훗날 ‘문헌공도’의 자랑스런 졸업생 신분으로 ‘하과’의 특별강사로 나서기도 했다. 자신이 ‘문헌공도’ 졸업생이라는 사실도 자랑스러워 했다.
“요즘 국가가 다난해서 (하과의) 풍습이 거의 없어졌다. 그런데 지금 나의 재(齋)에서 하과를 이루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다른 재에선 비록 이와 같이 못한다 해도….”(<동국이상국집> ‘김학사 창에게’)
몽골과의 전쟁 등으로 중단된 모교의 하과가 후배이자 제자인 김창의 노력으로 부활된 것을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문헌공도에서 하과가 부활됐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나타냈다.
“학문 연마한 하과장(夏課場)은 나와 그대 함께 거쳐온 곳이로다.~우리 문도만 회복하였을 뿐 그 밖은 회복되지 못하였으니.”(<동국이상국집> ‘하중랑 천단이 화답해온 것에 차운하다’)
명문 사학 졸업생으로서의 자부심을 한것 과시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에게도 사교육을 시켰다는 얘기다. 못말리는 이규보의 일류병이 아닌가. 하기야 끔찍한 교육열을 상기한다면 이규보는 일류학교를 향해 달렸던 보통의 학생이자, 보통의 학부모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3번이나 낙방하다
각설하고, 최고 명문 사학의 모의고사에서 거푸 1등을 차지한 이규보였던만큼 16살 때에 치른 ‘1183년의 과거’에서 장원의 영예를 차지했을까. 
아니었다. 집안과 친지들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며 개인교습까지 받았지만 장원급제는 커녕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이규보가 치른 과거는 국자감시였다. 일단 이 시험에 합격해야 진사 혹은 생원의 칭호를 얻게 되어 본고사인 예부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이규보는 예비고사 격인 국자감시에서 보기좋게 낙방한 것이다. 그런데 한번이 아니었다. 이규보는 2년 간의 재수 끝에 다시 국자감시에 도전했지만 또 다시 낙방하고 만다.(18세)
이듬해, 즉 이 글이 모두에 인용한 죽림고회에 참석했던 19살 때는 아예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이규보가 ‘죽림고회에 들어오라’는 청을 거절하면서 비야낭 댔던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당시 이규보의 뒤틀린 심사를 짐작할 수 있겠다. 20살에 도전한 3번째 시험에서도 실패. 이규보는 예상밖의 실패에 크게 좌절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규보의 ‘연보’에 실패의 이유를 달아놓았다.
“4~5년 동안 술로 기세를 부리며 방탕하게 살다가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았다. 오직 시 짓는 것만 일삼고 ‘과거’의 글은 조금도 연습하지 않았으므로 합격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냐면 과거시험에 나올만한 모범답안을 쓰지않고 무절제한 생활을 일삼으며 멋대로 글만 짓다가 거푸 실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겁한 변명’이 아니었을까. ‘과거’에 집착했던 이규보가 과거에 맞는 문제, 즉 ‘모범답안’을 굳이 피하고 자기 만의 글을 써서 일부러 실패했다는 말인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4수생 이규보의 도전과 실망
이규보는 과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189년(명종 19년)의 과거를 앞두고 이름까지 바꾸었으니 말이다. ‘연보’에 구체적인 사연이 나온다.
“공의 원래 이름은 인저(仁저)였다. 과거를 앞두고 꿈을 꿨는데, 규성(奎星)이라는 노인이 찾아와 ‘그대는 반드시 장원을 차지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래 ‘규성’이라는 사람이 장원급제 소식을 미리 알려주었다(報)고 해서 이름을 ‘규보(奎報)’로 바꾸었다. 과연 1등으로 합격했다.”
이규보는 4번째 시험을 앞두고 개명까지 하는 배수의 진을 친 결과 수석입학의 영예를 차지한 것이다. 그의 나이 22살 때였다. 당시 고려의 국자감시 급제평균연령이 18.6세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늦깎이 합격’이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1190년(명종 20년) 본고사인 예부시 제술과에 도전한다. 제술과는 문학적 능력을 가리는 분야였다. 그는 60여 일 간 홍원사라는 절에 머물며 과거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 결과 예비고사(국자감시)와는 달리 첫 도전에서 당당히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그의 성적은 합격자(제술과 30명, 명경과 5명, 은사 7명) 가운데 ‘동진사(同進士)’였다. 당시 합격자의 성적은 ‘갑과’, ‘을과’, ‘병과’, ‘동진사’ 등 네 단계로 나뉘었는데, 동진사는 최하위권이었다. 이규보로서는 대실망이었다.
“과거의 성적이 낮은 것에 실망한 이규보는 합격을 사양하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엄히 꾸짖었고, 또 그런 전례가 없었으므로 사양하지 못했다. 이규보가 크게 취해서 하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록 과거성적은 아래지만 어찌 3~4번 문생을 길러내지 않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좌객들이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연보’)
바닥권의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마지막까지 ‘예비고사 1등’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려 했던 이규보의 고군분투가 드러나있다. 그 모습을 보고 주변사람들은 ‘몰래’ 비웃었고….
이규보는 과거의 모든 관문을 통과한 뒤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여줬다. 스스로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일컬으며, 개성 인근 천마산의 초당에 머물었다.
“초당(이규보가 머물렀던 천마산 초당을 뜻함)은 내가 우거(寓居·잠깐 머물렀던 곳)했던 곳이요, 상주한 곳이 아니다. 우거한 곳으로 호를 삼는다면 평생 따라붙는 호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까 초야에 묻혀 평생 살아가지 않겠다는 은유적인 표현들이다. 이규보는 본디 ‘은자(隱者)’가 아닌 ‘생활인’이었다. 애초부터 은둔자의 삶에 만족했다면 굳이 특별과외에, 족집게 과외 등 사교육에 매달리면서까지 과거합격에 매달렸겠는가. 좋은 말로 ‘거사생활’, 나쁜 말로 ‘백수생활’이 3년 넘게 이어지자 이규보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규보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 시와 서(書)·장(狀)·표(表) 등 개인적인 편지 및 관원으로서 나라에 바친 글들, 교서·비답·조서 등이 수록돼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끈질긴 인사청탁
“동문들은 모두 드날리는데 오직 나만 홀로 뒤처졌구나. 젊었던 옛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세월만 자꾸 흐른다.”(<동국이상국전집> ‘시랑 장자목에게 드린다’)
홀로 뒤처지는 듯한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을 떠올리며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당시 국자감시 좌주(시험총감독)였던 유공권에게 “추천해달라”는 노골적인 ‘구직시’를 보내기에 이른다.
“골짜기서 나온 꾀꼬리 아직 그대로 나직이 돌면서 차츰 큰 나무에 내립니다. 금림(禁林)의 버들에 의탁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긴 가지 하나를 빌려주소서.”
‘긴 가지 하나 빌려달라(借一長條)’는 것은 자신을 명종 임금에게 추천해달라는 소리다. 실제 유공권은 명종에게 이규보를 추천했다. 하지만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이규보를 보고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무리가 있었고, 명종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이규보를 임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1197년, 판이부사 조영인 등 4명에게는 “지방관이라도 좋으니 ‘시험삼아’ 벼슬 한자리 내달라”는 시까지 보낸다.
한 명이 아니라 4명에게 ‘구직’ 부탁을 했다? 그것도 지방관이라도 좋으니 제발 추천 좀 해달라? 자존심 따위는 내팽개친, 그야말로 비굴하기 이를 데 없는 인사청탁이었다.
이규보가 인사청탁한 4명(조영인·임유·최당·최선)은 누구인가. 1197년, 최충헌은 동생 최충수를 제거하고 명종까지 폐위시킨 뒤 신종을 옹립하고는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조영인 등 4명은 그 해 12월의 인사에서 최충헌에 의해 요직에 기용된 인물들이었다. 4명에게 보낸 이규보의 ‘구직시’를 보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저는 상국의 막내 아들과 가장 친하고 같은 해 과거에 급제했습니다.”(‘조영인에게’) “제가 문하에 있는 지 오래됐습니다.”(‘임유’에게) “저를 크게 칭상(稱償)했다고 하기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최당에게’) “대할수록 학문 더욱 높고 견고했으며, 위로와 격려 또한 어이 그리 돈독했던가.”(‘최선’에게)
조영인의 막내아들은 이규보의 친구이자 동년 급제생인 조충이고, 임유는 이규보가 급제한 과거의 동지공거(부책임자)였다. 그랬으니 임유의 문하생이라고 한 것이다. 최당과 최선은 형제간인데, 조영인과 최선은 급제 동기생이며, 최선의 아들인 최종번은 이규보의 절친 중 한 사람이었다. 무슨 소리인가. 그러니까 이규보는 동원할 수 있는 한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해서, 온갖 아첨을 떨며 ‘직책’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독재자와의 대면 면접
세치 혀의 아부가 통한 것일까. 조영인 등 4명의 재상은 연대보증의 형식으로 이규보를 ‘지방관’으로 추천하기에 이른다. 임금도 허락했다. 그러나 어이없는 변수가 생긴다.
상소문을 다루는 장주승선(掌奏承宣) 아무개가 임금의 도장이 찍힌 발령문서를 가로채 이부(吏部·이조)에 내리지 않고는 “잃어 버렸다”고 핑계를 댄 것이었다. 이 장주승선은 최고 실력자 최충헌의 측근이었고 이규보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추천상소를 올린 조영인 등 재상들도 장주승선의 장난을 눈감고 넘어갔다. 
이규보의 구직활동은 끈질겼다. 32살이 되던 1199년(신종 2년), 드디어 최고실력자 최충헌의 ‘부르심’을 받고 ‘일생일대의 대면면접’을 치렀다. 이 때 최충헌을 향한 충성맹세를 했을까. 어쨌든 이규보는 면접을 치르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아내와 자식들도 나를 다시 보고 친구들도 서로 축하해주네. 출셋길이 가까워졌도다.”(<동국이상국집> ‘상공 지주사가 불러 천엽유화의 시를 지으라 한 것에 감사하다’)
어쨌거나 과연 이규보는 다음 달인 6월, 상반기 정기인사 때 전주목사 겸 장서기로 임용됐다. 그의 나이 32살 때였다.
그야말로 과거 합격 후 ‘눈물겨운 9년의 구직일기’가 아닐 수 없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보직이었던만큼 의욕적으로 일했다.

 

■1년6개월만의 파면
하지만 의욕이 과했던 것일까. 아니면 지방 토호들의 농간에 당한 것일까. 관직수행 중 토호 및 지방민 등과의 갈등이 엿보이는 글들이 적잖다.
“공(이규보)이 전주를 다스릴 때 ‘통판 낭장’ 아무개가 탐욕스러웠고 방자했는데, 공이 굽히지 않자 공무를 둘러싸고 여러차례 노여움을 샀다. 통판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교묘한 중상의 말을 꾸몄다.”(<동국이상국집> ‘연보’)
‘통판’은 고려 때의 지방관직이었다. 이규보는 바로 이 ‘통판’의 낭장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던 것 같다.
결국 그는 부임 불과 1년 6개월만인 1200년(신종 3년) 12월 파직되고 만다. 결국 그 ‘아무개 통판낭장의 모함’ 때문이었단다. 그런데 그가 ‘아무개 서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깜짝 놀랄만한 구절이 나온다.
“제가 전주를 다스릴 때 자못 가혹하다는 소문이 들릴 때가 많았는데…. 전주는 옛날 백제의 땅으로, 그 성질이 사나워 관대한 정사로는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형벌을 쓴 것이요, 본심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큰일 날 소리다.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이 ‘백제인의 후예들’이라 해서 가혹한 형벌로 다스렸다니…. 그랬으니 토호세력과 지방민들이 가만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보면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방토호들도 문제가 있지만, 지역편견을 갖고 백성들을 다스렸던 이규보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끈질기게 괴롭힌 ‘탄핵-파면’의 전과
파면 당한 이규보는 그 뒤에도 끈질긴 구직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탄핵과 파면’의 전과가 그를 괴롭혔다. 좌절을 거듭하자 자포자기의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지(止止)란 무엇인가. 능히 그 그칠 곳을 알아서 그치는 것이다. 그칠 곳이 아닌데서 그치면 그 그침은 그칠 곳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夫所謂止止者 能知其所止而止之者也 非其所止而止 其止也非止止也)”(<동국이상국집> ‘지지헌기’)
체념한 듯 했다. 그러나 결코 구직을 포기하지 않았다. 1215년(고종 2년), 48살의 나이로 간관의 하나인 정언(6품)이 된 것이다. 간관은 임금과 고관대작들의 잘못을 가리는 사정기관의 공무원이었다. 청요직 중 청요직이었다. 간관이 되면 푸른 소매의 관복을 입고 사졸들의 인도를 받아 길을 나섰으며, 하급관리들은 말에서 내려 인사를 드려야 했다. 사람들은 이규보를 ‘늙은 정언’이라 손가락질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규보는 서대(犀帶·허리띠)를 매고 출근하던, 그 벅찬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너(서대)를 바라보기만 했던 날들이 얼마나 되었던가. 마침내 때가 와서 내 몸에도 지녔구나. 앞에서 보면 차이가 없지만 뒤에서는 눈부시니 다른 사람이 되었도다.”(<동국이상국집> ‘처음 서대를 두르고…’) 어린아이처럼 뻐기면서 좋아하는 이규보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순진무구하다고나 할까.

 

■최우의 비호아래 승승장구하다
이규보는 이후에도 면직-복직-탄핵-면직-유배성 좌천 등의 곡절을 겪었다. 그러다 최충헌이 죽고 든든한 후원자 최우가 등장하자(1220년·고종 7년) 비로소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최우는 이규보의 재능을 높이 샀던 것 같다. 최우와 이규보의 일화가 있다. 최충헌 생전인 1213년, 최우는 아버지 최충헌에게 이규보의 시를 한번 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최우가 최충헌에게 ‘이규보의 재주를 한번 시험해보라’고 권했다. 최충헌은 처음에는 마땅찮게 여겼지만 최우가 2~3번 권하자 마지못해 이규보를 불렀다. 최우는 최충헌에게 ‘이 사람은 술에 취해야 시를 짓는다’면서 이규보에게 술을 취하도록 마시게 했다. 마침 뜰에 공작새가 있었는데, 최충헌이 ‘공작’을 시제로 삼았는데 40여 운이 이르도록 붓을 멈추지 않았다. 최충헌은 감탄하여 눈물까지 흘렸다.”(‘연보’)
이규보는 최우의 비호 속에 승승장구한다. 보문각대제(정5품)-태복소경(종4품)-장작감(정4품)-국자제주(정4품)-관위위사(정3품)를 거쳤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그 놈의 술버릇’ 때문이었다. 1227년(고종 14년) 팔관회 자리에서 임금이 내리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던 이규보가 그만 쓰러진 것이다. 임금 앞에서 부축을 받고 퇴장하는 꼴이라니…. 당연히 어사대(사정기관)와 대간들의 극심한 탄핵이 이어졌다. 만약 최충헌 정권 때였다면 뼈도 못추렸을 것이다. 하지만 때는 바야흐로 최우 정권의 시대. 이규보에 무한신뢰를 보낸 최우는 이규보의 모든 죄를 덮어주었다.
“(어젯밤 팔관회의 일은) 비록 만 번의 죽음을 내리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각하(최우)께서 잘못을 덮어주어 용서하셨으니 천지의 무한한 은덕으로서 일생을 두고도 갚지 못하겠습니다.”
1236년(고종 23년) 69세가 된 이규보가 퇴직을 청하는 걸사표(乞辭表)를 올렸다. 고종 임금이 반려하자 이규보는 위독하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나 다시 최우가 나서 반려했다. 최우의 말이 흥미롭다.
“(이규보가) 호적 나이를 줄이지 않았는가. 아직 그만 둘 나이가 아니니 출근하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했으면 호적 나이 운운하면서까지 사표를 반려했을까. 그러나 이규보는 이 때만큼은 관직에 집착하지 않았다. 세차례나 더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끝에 70살의 나이로 은퇴했다.

 

■이규보를 위한 변명
사실 이규보의 삶을 보면 안타까운 대목이 너무도 많다.
출세를 구하지 않고 그저 유유자적하며 자신의 재능만을 발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과거에 합격하고도 9년 간이나 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백운거사’ 시절, 그는 <동명왕편>을 비롯, <개원천오영사시>, ‘삼백운시’ 등 역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지었다. 그 불우했던 시절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 대목에서 불후의 역사서 <사기>를 쓴 사마천이 떠오른다. 사마천은 궁형의 치욕 속에서도 <사기>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 문왕의 <주역>, 공자의 <춘추>, 굴원의 <이소>, 좌구명의 <국어>, 손자의 <손자병법>, 한비의 <세난>과 <고분>, 여불위의 <여씨춘추> 등은 모두 저자들이 불우했던 시절에 완성시켰다. 모두 스스로의 비분을 촉발하여 지은 ‘발분(發憤)의 저작들’인 것이다.”(<사기> ‘태자공자서’)
만약 이규보가 평생 초야에 묻혀 비분강개하면서 ‘발분의 저작’만을 썼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더 무시무시한 역작들을 수두룩하게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든다. 이규보가 과거합격과 입신양명을 위해 혈안이 되어 아부를 떨며 관직을 탐했다지만, 한번 묻노니…. 누구든지 죄없는 자가 그에게 돌을 던져봐라.
과거가, 관직이 최고의 가치라 여겼던 풍토에서 일가의 안녕은 내팽개친채 글이나 지으며 사는 것은 또 지고지순한 선(善)이라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규보가 너무도 많은 자신의 글을 남겼다는 것이다. <동국이상국집>에서 전해지는 2000여 편의 글을 보면 그의 속내가 꾸밈없이, 숨김없이 너무 속속들이 나타나 있다. 
이규보는 ‘12~13세기를 살았던 고려사람의 전형’,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통용되는 ‘보통사람’의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다.
너무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보여준 것, 그것이 이규보의 실수가 아니었을까. 그래서일까. 이규보는 나이 일흔에 접어들 때 다음과 같이 읊었다.
“60여 년 세월의 부침이 이 한몸에 담겼으니~ 무릇 내 자손들은 못난 내 모습을 비웃지 말고, 단지 그 마음만 전해주면 조상들에게도 욕됨이 없으리.”(<동국이상국집> ‘정이안이 내 초상화를 그렸기에 스스로…’)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