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야.”
한나라 무제(재위 기원전 141~87) 때의 일이다. 분음(汾陰·산서성 완잉셴)의 무사(巫士)가 사당 옆에서 제사를 지내다 땅을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무언가 갈고리 같은 것이 삐져 나온 것이 아닌가. 서둘러 땅을 파보았다.
■최초의 고고학 발굴
그것은 명문은 없고 꽃무늬를 새긴 정(鼎), 즉 청동솥이었다. 문헌으로 확인된 최초의 고고학 발굴이었던 셈이다. 조정에 “국보급 유물이 출토됐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길조입니다. 이 보정(寶鼎)만큼은 반드시 조상의 묘당에 바쳐야 합니다.”
한 무제는 백관과 함께 한껏 예를 갖춰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렸다. 왜일까. 한나라 조정은 이렇게 정(鼎)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을까. 까마득한 옛날, 동방의 신이었던 복희(伏羲)가 ‘신정(神鼎)’을 만들었다.이 신정은 천지만물의 귀결이라 했다. 황제(黃帝)는 보정 세개를 만들어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했다.
하나라 시조 우임금은 아홉개 제후들이 바친 청동을 모아 ‘아홉개의 정(구정·九鼎)’을 만들었다. 우임금은 이 구정에 제물(祭物)을 삶아 하늘제사에 사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석기시대를 종식시킨 청동기의 마력은 신력(神力)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특히 청동기 가운데서도 으뜸의 제작기법을 자랑한 정, 즉 청동솥은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정은 영물(靈物)이었다. 성군이 나타나 나라를 세우면 그 군주를 따라 옮겨갔다. 그러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자취를 감췄다.
■정은 국가정권의 상징
정은 천하통일과 국가정권을 상징했다.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천하를 갖고자 하는 이는 정의 출현을 염원했다. 은(상)나라 무정제(기원전 1250~1192)의 일이다. 무정제가 시조인 탕(湯)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다음 날 꿩이 날아들어 정(鼎)의 손잡이에 앉아 구슬피 울기 시작했다. 저 꿩은 바로 조상인 탕이 현신한 것이 아닌가. 무정제는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신하 조기(祖己)가 나섰다.
“왕께서는 두려워 마세요. 먼저 정사를 잘 다스리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꿩이 정에 앉아 운 것은 도리어 정사를 똑바로 하라는 경고라는 것이다. 무정은 정사를 바로잡고 은덕을 베풀었다. 쇠락해가던 은(상)은 중흥했다. 이후 은(상)→주나라로 옮겨간 구정은 기원전 256년 주나라 멸망과 함께 신흥제국 진(秦)나라의 소유가 된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옮겨오던 도중 한 개를 사수(泗水·산둥성에 있는 강이름)에 빠뜨린 것이다. 문제는 나머지 8개의 행방마저 묘연해졌다는 것이다.
■초 장왕, 구정의 무게를 묻다
훗날 천하를 통일한 진 시황(재위 기원전 247~210)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정통성 확보를 위해 구정의 확보가 필요했다. 시황제는 사수에 빠졌다는 정(鼎) 하나를 찾으려 목욕재계하고 사당에서 제사까지 드렸다. 그리곤 1000여 명을 물밑으로 들여보내 강바닥까지 샅샅히 훑었다. 하지만 물에 빠진 정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런 탓일까.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지 불과 15년만에 멸망하고 만다.
기원전 607년, 춘추시대 초(楚) 장왕(기원전 614~591)은 융족을 멸했다. 그리고는 기세등등, 주나라 도성 외곽에서 화려한 열병식을 열었다. 천자국(주나라)의 앞마당에서 제후국의 왕(장왕)이 위세를 뽐낸 것이다.
“그런가. 그대는 구정을 막을 수는 없소. 초나라는 부러진 창칼을 녹인다 해도 구정 정도는 충분히 주조할 수 있소.”(초 장왕)
■“구정은 덕행에 달려있습니다”
“아! 혹시 잊으셨나요. 하나라 걸왕의 덕이 어지럽자 구정은 은(상)으로 옮겨가 600년 동안 제사가 지속됐습니다. 은(상)의 주왕이 포악하자 구정은 주나라로 옮겨졌습니다.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구정은 비록 작아도 무거워져서 옮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혼란해지면 구정은 비록 크다해도 가벼워서 쉽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德之休明 雖小必重 其姦回昏亂 雖大必輕)”(왕손만)
왕손만이 쐐기를 박았다.
“주나라 덕정이 쇠약해졌다지만 아직 하늘의 뜻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구정의 경중을 물으실 때가 아닙니다.”
초 장왕은 그제서야 머쓱해져서 발길을 뒤돌리고 말았다.(<사기> ‘주본기’ ‘초세가’ ‘진시황본기’ ‘효무본기’ 등)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구정의 무게’를 묻고 있다. 천하를 얻으려는 이들이다. 어떨까. 이들은 과연 구정을 들고 갈 자격이 있는가. 현대판 ‘왕손만’이 묻고 있다. 민심의 물음이다. “지금 덕행을 쌓고 있는가.”
한나라 무제(재위 기원전 141~87) 때의 일이다. 분음(汾陰·산서성 완잉셴)의 무사(巫士)가 사당 옆에서 제사를 지내다 땅을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무언가 갈고리 같은 것이 삐져 나온 것이 아닌가. 서둘러 땅을 파보았다.
■최초의 고고학 발굴
상나라 마지막 도읍인 은허에서 발견된 청동솥(정)
“길조입니다. 이 보정(寶鼎)만큼은 반드시 조상의 묘당에 바쳐야 합니다.”
한 무제는 백관과 함께 한껏 예를 갖춰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렸다. 왜일까. 한나라 조정은 이렇게 정(鼎)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을까. 까마득한 옛날, 동방의 신이었던 복희(伏羲)가 ‘신정(神鼎)’을 만들었다.이 신정은 천지만물의 귀결이라 했다. 황제(黃帝)는 보정 세개를 만들어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했다.
하나라 시조 우임금은 아홉개 제후들이 바친 청동을 모아 ‘아홉개의 정(구정·九鼎)’을 만들었다. 우임금은 이 구정에 제물(祭物)을 삶아 하늘제사에 사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석기시대를 종식시킨 청동기의 마력은 신력(神力)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특히 청동기 가운데서도 으뜸의 제작기법을 자랑한 정, 즉 청동솥은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정은 영물(靈物)이었다. 성군이 나타나 나라를 세우면 그 군주를 따라 옮겨갔다. 그러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자취를 감췄다.
■정은 국가정권의 상징
중국 동북방에서 확인된 정
정은 천하통일과 국가정권을 상징했다.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천하를 갖고자 하는 이는 정의 출현을 염원했다. 은(상)나라 무정제(기원전 1250~1192)의 일이다. 무정제가 시조인 탕(湯)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다음 날 꿩이 날아들어 정(鼎)의 손잡이에 앉아 구슬피 울기 시작했다. 저 꿩은 바로 조상인 탕이 현신한 것이 아닌가. 무정제는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신하 조기(祖己)가 나섰다.
“왕께서는 두려워 마세요. 먼저 정사를 잘 다스리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꿩이 정에 앉아 운 것은 도리어 정사를 똑바로 하라는 경고라는 것이다. 무정은 정사를 바로잡고 은덕을 베풀었다. 쇠락해가던 은(상)은 중흥했다. 이후 은(상)→주나라로 옮겨간 구정은 기원전 256년 주나라 멸망과 함께 신흥제국 진(秦)나라의 소유가 된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옮겨오던 도중 한 개를 사수(泗水·산둥성에 있는 강이름)에 빠뜨린 것이다. 문제는 나머지 8개의 행방마저 묘연해졌다는 것이다.
■초 장왕, 구정의 무게를 묻다
훗날 천하를 통일한 진 시황(재위 기원전 247~210)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정통성 확보를 위해 구정의 확보가 필요했다. 시황제는 사수에 빠졌다는 정(鼎) 하나를 찾으려 목욕재계하고 사당에서 제사까지 드렸다. 그리곤 1000여 명을 물밑으로 들여보내 강바닥까지 샅샅히 훑었다. 하지만 물에 빠진 정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런 탓일까.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지 불과 15년만에 멸망하고 만다.
기원전 607년, 춘추시대 초(楚) 장왕(기원전 614~591)은 융족을 멸했다. 그리고는 기세등등, 주나라 도성 외곽에서 화려한 열병식을 열었다. 천자국(주나라)의 앞마당에서 제후국의 왕(장왕)이 위세를 뽐낸 것이다.
은허에서 확인된 정
하지만 쇠퇴일로를 걸었던 주나라 정왕(재위 607~586)은 꼼짝도 못했다. 되려 왕손만(王孫滿)을 보내 초 장왕을 위로했다. 초 장왕이 이에 그치지 않고 한번 더 도발한다. 그 유명한 ‘초 장왕, 구정의 경중(輕重)을 묻다’는 고사가 나오는 순간이다. 초 장왕과 왕손만의 논쟁은 불꽃이 튀긴다.
“주나라에 있는 구정을 한 번 보고 싶소. 무거운지 가벼운지….”(초 장왕)
이는 “내가 구정을 들고 갈 수도 있다”, 즉 “천하는 이제 나의 것이 아니냐”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왕손만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가. 그대는 구정을 막을 수는 없소. 초나라는 부러진 창칼을 녹인다 해도 구정 정도는 충분히 주조할 수 있소.”(초 장왕)
■“구정은 덕행에 달려있습니다”
“아! 혹시 잊으셨나요. 하나라 걸왕의 덕이 어지럽자 구정은 은(상)으로 옮겨가 600년 동안 제사가 지속됐습니다. 은(상)의 주왕이 포악하자 구정은 주나라로 옮겨졌습니다.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구정은 비록 작아도 무거워져서 옮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혼란해지면 구정은 비록 크다해도 가벼워서 쉽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德之休明 雖小必重 其姦回昏亂 雖大必輕)”(왕손만)
왕손만이 쐐기를 박았다.
“주나라 덕정이 쇠약해졌다지만 아직 하늘의 뜻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구정의 경중을 물으실 때가 아닙니다.”
초 장왕은 그제서야 머쓱해져서 발길을 뒤돌리고 말았다.(<사기> ‘주본기’ ‘초세가’ ‘진시황본기’ ‘효무본기’ 등)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구정의 무게’를 묻고 있다. 천하를 얻으려는 이들이다. 어떨까. 이들은 과연 구정을 들고 갈 자격이 있는가. 현대판 ‘왕손만’이 묻고 있다. 민심의 물음이다. “지금 덕행을 쌓고 있는가.”
/문화·체육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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