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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조선이 '고요한 아침, 은자의 나라'라고?…분통 터진 미국인 독립투사

<p data-ke-size="size16">서양에서는 ‘조선’을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고요한 아침의 나라’니, ‘은자(은둔)의 나라’니 하는 표현이 유명하죠.
그러나 지금부터 120~130년 전에 이런 표현들이 조선(대한제국)을 왜곡하고 비하하는 것이라고 맹비난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입니다. 헐버트가 힘을 주어 비판한 인물이 바로 <은둔의 나라(Hermit Nation)>(1882년)의 저자 윌리엄 그리피스(1843~1928)였습니다. 그리피스라면 조선을 서양에 알린 아주 유명한 동양학자이고, 국내에서도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단골로 인용되는 인물이죠. 

■조선이 왜 은둔의 나라인가   
그러나 1886년(고종 23) 육영공원(왕립영어학교) 교수로 입국한 이래 조선을 제2의 조국으로 삼았던 헐버트가 보기에 그리피스는 문외한에 불과 했습니다. 헐버트는 특히 “1882년 출간된 이 책(<은둔의 나라>)는 너무 많은 오류를 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리피스가 한번도 조선(대한제국)에 와보지도 않고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 관련 책을 썼다”고 비판했습니다. 일본에 앉아 일본·중국·서양 자료를 토대로 쓴 조선 이야기니 왜곡·편향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1882년 출간된 그리피스의 <은둔의 나라>. 헐버트 박사는 “그리피스의 <은둔의 나라>에는 오류가 많고 왜곡, 편향이 너무 심하다”면서 일본에 앉아 일본과 중국, 서양자료만 보고 한국관련 책을 쓰고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특히 1902년 그리피스가 미국 동부에서 발행되는 잡지(<뉴잉글랜드>)에 ‘한국, 난쟁이 제국(Korea, the Pigmy Empire)’이라는 글을 기고했는데요. 이 기사를 본 헐버트가 분노했습니다. 헐버트는 “한국인을 마치 미개하고 지능이 낮은 열등민족으로 표현했다”는 반박글을 기고(<The Korea Review(한국평론)>·1902년 7월호)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왜소한 부족을 가리키는 ‘피그미’는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작고, 지능이 낮은 부족’으로 해석되고 있었기 때문이죠. 
헐버트는 또한 “백두산 천지의 수원지를 압록강과 두만강이라 왜곡했고, 조선을 chosen으로, 백제를 Hiaksi로 표기하는 등 많은 인·지명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했다”고 분개했습니다. 문외한인 주제에 조선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게 꼴사나웠던 거죠.
헐버트는 “조선은 지금 개화를 앞당기고 있고, 정치형태도 변하고 있어 더는 운둔의 나라가 아니”라면서 “그리피스는 제발 조선에 와 보고 조선 관련 글을 쓰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조선이 왜 고요한 아침의 나라인가
헐버트가 또하나 수정을 요구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朝鮮)’을 ‘Morning calm’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은 조선을 잠깐 방문한 퍼시벌 로웰(1855~1916)이 1885년에 쓴 책 제목(‘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서 비롯된 겁니다. 국호에 ‘아침 조(朝)’가 들어가 있으니 로웰이 ‘Morning’으로 표현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헐버트는 “‘밝다. 아름답다. 깨끗하다’는 뜻의 선(鮮)자를 왜 ‘고요하다’는 뜻의 ‘Calm’으로 해석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헐버트는 만약 조선을 영어로 번역한다면 ‘고요한 아침’이 아니라 ‘서광이 비치는 아름다운 아침’이라는 뜻인 ‘Radiant Morning’이나 ‘Morning Radiance’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새삼 낯이 뜨거워집니다. 아무 생각없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어쩌구, ‘은둔의 나라’가 저쩌구 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그리피스를 조선과 한국을 세계에 알린 저명한 동양학자로 여기고, 로웰의 ‘‘Morning calm’ 표현을 “절묘하다”며 즐겨 인용하고…. 미국인 헐버트는 자그만치 120~130년 전에 분통을 터뜨렸는데 말이죠.

천문학자·외교관인 퍼시빌 로웰(1855~1916)은 1883년 외교관 신분으로 조선을 방문했다. 로웰은 3개월간 서울을 방문한 경험을 정리해서 기행문(<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을 출간했다. 로웰이 ‘조선’ 국호를 영어로 표기할 때 ‘조(朝)’자를 ‘아침(morning)’으로 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왜 ‘선(鮮)’자를 ‘고요하다. 조용하다’는 뜻의 ‘calm’으로 표기했는지 알 수 없다.

■조선의 5대 발명품
또 한편의 일화가 있습니다. 헐버트는 미국 월간지(<하퍼스>·1899년 6월)에 한국의 5대 발명품을 소개했는데요.
‘태종이 만든 이동식 금속활자’, ‘거북선’, ‘현수교’, ‘폭탄’(비격진천뢰). ‘소리글자(훈민정음)’ 등이었습니다. 이중 훈민정음이나 거북선은 더 부연할 필요가 없구요. ‘태종의 이동식 금속활자’는 1403년(태종 3) 주조한 ‘계미자’를 가리키는데요. 당시엔 <직지심체요절>(1377년)이 공개되기 전이었죠. 헐버트는 계미자 역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468)의 금속활자 발명보다 50년 가까이 빠르다는 사실을 강조한 겁니다.  
비격진천뢰는 1591년(선조 24) 발명한, 당대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독창적인 최첨단 무기입니다. 시간을 조절해서 폭발한다는 면에서 일종의 시한폭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현수교’는 왜 조선의 발명품이라 했을까요. 
임진왜란 당시 조선·명나라 연합군이 임진강에 도달했을 때 칡넝쿨로 나무를 묶고, 나룻배로 활용해서 120야드(110m) 가량의 다리를 건설하여 12만명이 무사히 건넜다는 겁니다. 최초의 현수교라는 거죠. 제가 문헌기록을 찾아봤더니 실제로 “조·명 연합군이 임진강 상류를 따라 칡으로 만든 밧줄을 연결해서 다리를 만들어 도강했다”(<선조수정실록>(1593년 1월 1일)·류성룡(1542~1607)의 <서애집>)는 기록이 보이더군요.

호머 헐버트는 ‘조선(朝鮮)’을 영어로 표기할 때 ‘Morning calm’, 즉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서광이 비치는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Radiant Morning’ 혹은 ‘Morning Radiance’)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글에 푹 빠진 미국인
헐버트 박사가 과연 어떤 분인데, 이렇게 조선과 한국을 잘 알고, 또 사랑하게 된 걸까요.
헐버트는 1886년(고종 23) 9월 고종이 설립한 왕립 영어교육기관(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된 교수 3명 중 한사람입니다. 당연히 헐버트 등 교수들은 조선말을, 육영공원 학생들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죠.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먼저 조선 학생들이 가히 언어천재라 할만큼 영어 습득의 귀재였다는 겁니다.
조선학생들이 단 8개월만에 영어 어구를 3000자 가까이 습득했다는 <고종실록> 1887년 5월2일자 기사가 보입니다. 헐버트는 “조선 학생들의 영어 구사능력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합니다.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1865~1924)의 감탄사가 흥미로운데요.

“19살 조선 청년이 f랑 p의 발음도 구분 못하더니, 두달이 지난 지금은 하루에 단어를 200개씩 외우고, 영어 해석과 회화도 완벽하다. 굉장히 너무 놀랍다.”(<코레아 또는 조선:고요한 아침의 나라>·1895년)
그런데 헐버트에게 이상한 일이 더 있었습니다. 조선학생들이 영어를 배웠듯이 헐버트 역시 불굴의 노력으로 조선어를 습득했는데요. 그 결과 헐버트는 2년 뒤에 동사 일람표를 만들 정도로 문법에도 정통해졌고, 조선말을 거리낌없이 구사할 정도가 됐습니다. 헐버트 역시 언어천재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공을 ‘한글’로 돌립니다. 
한글 창제 때 예조판서 정인지(1396~1478)가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나절이면,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 깨우칠 수 있다”고 했잖습니까.

헐버트는 불과 4일만에 한글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헐버트는 단박에 한글과 사랑에 빠졌답니다. 
그런데 헐버트가 일주일만에 놀란 것이 또 있었답니다. ‘아니 조선사람들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면서 이렇게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왜 그들 스스로 경시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답니다.

헐버트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명나라 연합군이 임진강에서 칡넝쿨로 나무를 묶고, 나룻배로 활용한 교량을 만들어서 12만명이 무사히 건넜다고 했다. 헐버트는 이렇게 만든 다리의 그림까지 그려 세계 최초의 현수교라 했다. 실제로 <선조수정실록> 1593년 1월1일자와 <서애집>에는 관련 기록이 보인다.

■전세계 한글전도사
헐버트는 한글로 지식보급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내로라는 지식인이라도 청·일·러 세 나라가 세상의 전부인 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성서번역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헐버트는 조선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서양에서 가르치는 보편적인 지식’이며, ‘그 지식을 담은 근대서적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1891년 무렵 마침내 조선인들이 조선어로 읽을 수 있는 세계지리서를 펴냈는데요.
그것이 <사민필지>입니다. 헐버트는 이 지리서에서 “독자들이 세계 각 국가가 이룩한 부, 문화, 힘의 정도 등을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보통의 지리책이 제공하지 않은 정부와 재정수입, 산업, 교육, 종교, 군사, 식민지 등을 넣었다”고 밝혔습니다.

7~8세 어린아이도 소화할 수 있게 만든 순한글판 <사민필지>는 1895년 총리대신 김홍집(1842~1896)의 지시로 한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외국의 정보에 목이 말랐던 상류층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반증이 되겠죠. 
헐버트는 본격적으로 한글 전도사임을 자처했습니다. 
내한한지 불과 3년 만인 1889년(고종 26년) 뉴욕에서 발행되는 <뉴욕트리뷴>에 한글의 매력을 소개합니다.
“조선에는 각 소리를 고유의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진정한 소리글자(true alphabet)가 존재한다. 모음은 하나 빼고 모두 짧은 수평, 수직의 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한글 조합의 과학성은 환상적이다.”
이 신문에는 헐버트가 그려준 모음 ‘ㅏ ㅗ ㅣ ㅜ’가 그대로 실렸는데요.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한글을 자모까지 그려가며 언어학적으로 분석·소개한 이가 바로 헐버트였던 거죠. 

헐버트는 최초의 영문 월간지인 < Korean Repository>(한국소식·1892년 1월호)에서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극찬했다. 헐버트는 “어려운 한자를 쓰는 백성을 위한 한글을 독창적으로 창제했다는 것은 인류사에 빛나는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헐버트는 또 1904년 미국 스미소니언 협회 연례보고서에 실린 논문에서 “한글인 대중 의사소통의 매체로서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설파했다

■아리랑을 노래하면 누구나 워즈워드
이후 각종 잡지에 한글의 우수성과, 한글을 창제한 세종을 극찬하는 글과 논문을 잇달아 기고합니다.
“근검 및 애민·법치 정신으로 똘똘 뭉친 세종이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쉬운 한글을 창제했다”(<한국소식·Korean Repository’·1892년>)고 하는가 하면 “문자의 단순성과 발성의 힘에서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세종은 고대 페니키아 문자를 그리스에 전한 카드모스 왕자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한국사>·1905년)고 극찬했습니다. 
‘이두’를 분석한 논문(‘The ITU’)을 발표했고(<한국소식>·1898년), “한국어는 영어보다 대중연설언어로 더 우수하다”(<한국평론·The Korea Review)>고 설파했습니다. 1903년에는 ‘훈민정음 서문’을 영어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헐버트가 <Korean Repository>(한국소식) 1898년 2월호에 기고한 <이두(The Itu)>. 헐버트는 “이두는 지식인 간의 의견교류에 조합하고 비효율적인 한문이 부적격하다고 사실상 선고했다”고 설파했다.

그러나 촌철살인의 지적도 서슴치 않았는데요. “조선이 한글 창제 직후부터 한자를 던지고 한글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에게는 무한한 축복이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헐버트는 “아직 늦지 않았다”면서 “영국인이 라틴어를 버린 것처럼 조선인들도 결국 한자를 버릴 것”이라고 기원했습니다.
헐버트의 한글사랑은 자연스레 한국 문화 탐구로 이어졌는데요. 1893년 시카고 국제설화 학술대회에서 단군신화 등을 소개했구요. 또 ‘한국의 속담’과 ‘한국의 시’ 등을 발표(<한국소식> 1896·97년)하면서 “세상 어느 민족도 봄의 풋풋함을 한국인보다 더 만끽하지 못한다”고 찬탄했답니다. 1896년에는 <한국의 성악>을 발표하여 구전으로 전해지던 아리랑을 사상 처음으로 서양음계로 채보했습니다. 헐버트는 “한국인이 아리랑을 노래하면 윌리엄 위즈워스(1770~1850) 처럼 즉흥곡의 시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헐버트가 사상처음으로 서양음계로 채보한 ‘문경새재 아리랑’. 헐버트는 ‘아리랑’에 대한 연구 내용을 담은 ‘한국의 성악’(1896년)을 발표했다. 아리랑의 후렴을 한글로 썼다.

■얼굴 뜨거워지는 순간
헐버트는 정치·외교사의 측면에서도 한국 근현대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평가되죠. 세 번이나 고종(재위 1863~1907)의 비밀특사였죠.

1905년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재임 1901~1909) 대통령에게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는 특명과,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국가원수들을 찾아 일제의 참략주의를 고발하며 도움을 청하는 밀명을 맡았죠. 또 1909년 상하이(上海) 덕화은행에 예치한 고종의 내탕금을 찾아오라는 특명도 받았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1906년 영국 런던에서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출간했다. 한국의 역사, 문화, 전통, 풍속, 산업, 사회제도 등을 집대성했다. 헐버트 박사는 이 책의 서문에서 “한민족이 지금은 어둠에서 헤매고 있지만 장차 민족정기를 살려 반드시 다시 일어난 것”이라고 확신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헐버트는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고 기뻐했습니다. 헐버트는 1949년 광복절에 국빈으로 초청되지만 86세의 고령이었던데다 한달여의 여행이 남긴 여독으로 인천땅에 밟은 지 일주일만에 별세합니다. 하지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서 묻히기를 바란다’는 고인의 뜻은 이뤄진 셈이 되었을까요. 
헐버트 박사가 1906년 <대한제국멸망사>를 출판하면서 남긴 헌사의 제목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와 한민족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의가 사라지는 이때…지금은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잠이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한민족에게….” 어떻습니까. 헐버트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한국인이 아닙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