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립민속박물관이 ‘호랑이 사전’을 발간했습니다. 이름하여 <한국민속상징사전-호랑이 편>인데요. 단군신화에서부터 2018년 평창올림픽 마스코트까지 호랑이 관련 내용을 전부 수록하고 있습니다.
흐르는 세월에 둔감한 편인 저는 왜 뜬금없는 ‘호랑이 사전’이냐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돌아오는 새해가 임인년 호랑이해더군요. 그래서 ‘호랑이 사전’이 출간된 김에 호랑이 이야기를 해보려구요.
■“우리나라는 호담국”
호랑이는 예부터 힘과 용맹을 겸비한 영험한 동물로 사랑받았죠.
때로는 친근하고, 때로는 해학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죠.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우리나라는 호담국(虎談國)”이라면서 “호랑이 이야기로만 <천일야화>나 <데카메론> 같은 책을 꾸밀 수 있고, 안데르센이나 그림(야콥·빌헬름) 형제가 될 수 있다”고 평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도 호랑이였구요.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선수단의 구호도 ‘범 내려온다’였습니다.
그렇게 친근했지만 무서운 짐승이기도 했습니다.
‘호환(호랑이 공격) 마마(천연두) 보다 무서운~’라는 말을 아시잖습니까.
그럴만도 합니다. 호랑이가 사람과 너무 가깝게 살았거든요. 호랑이가 도성 안은 물론 궁궐 안까지 들어온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1463년(세조 12)에는 경복궁의 후원(취로정) 연못가까지 출현한 호랑이를 추격하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1467년(세조 16)에는 북악산에 출몰한 호랑이를 찾아 세조(재위 1455~1468)가 추격대를 이끌고 직접 나서서 골짜기에 숨어있던 호랑이를 쏘아 죽였습니다.
■루즈벨트 아들의 트로피 사냥
뭐 어쩌겠습니까. 너무도 가깝고 친근한 존재지만 맹수의 본능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호랑이와의 살얼음판 공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거죠. 그러나 개항 이후 조선을 찾는 이방인들에게는 호랑이는 ‘트로피 사냥감’이었습니다.
‘트로피 사냥’이 무엇일까요. ‘트로피(Trophy)’는 본래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전리품을 뜻했는데요. 그 전리품 중 하나는 적군의 수급(首級·목)이었습니다.
요즘에는 사냥한 야생동물의 신체 일부를 전리품(트로피)으로 삼아 전공을 뽐내는 행위를 ‘트로피 사냥’이라고 하죠. 몇 년 전 짐바브웨의 국민사자인 ‘세실’이 바로 그 ‘트로피 사냥의 희생양’이 된 바 있습니다.
20세기초 서구의 ‘트로피 사냥꾼’들이 속속 한반도로 몰려들었답니다. 시오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1858~1919·재임 1901~1909)의 아들인 커밋 루즈벨트(1889~1943)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커밋은 1922년쯤 북한지역에서 호랑이를 사냥한 적이 있답니다. 또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모델로 알려진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1884~1960)는 1911년 함경도 무산에서 호랑이 사냥을 시도한 적이 있답니다. 이밖에 윌리엄 로드 스미스와 포드 바클리라는 인물이 1902~1903년 사이 목포와 진도에서 호랑이 세마리(스미스)와 두마리(바클리)를 잡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야마모토의 호랑이 정복군
그러나 일제에 견주면 이들의 트로피 사냥은 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일제와 일본인들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가슴 아픈 일화가 있죠.
일본인 사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1873~1927)가 1917년 ‘조선호랑이 사냥행사’를 개최합니다. 사냥단의 이름도 ‘호랑이를 정복한다’는 뜻인 ‘정호군(征虎軍)’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출정식 기사를 보십시요.
“근래 점점 퇴패(退敗)해 가는 우리 제국 청년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행사를 펼친다”(<매일신보 1917년 11월 18일>)는 것이었습니다. 행사에 참여한 기자가 지었다는 ‘정호군가’를 볼까요.
“가토 기요마사의 일이여/지금은 야마모토 정호군…/일본 남아의 담력을 보여 주자/루스벨트 그 무엇이랴/호랑이여 오라…/올해는 조선 호랑이를 모두 사냥하고/내년에는 러시아의 곰을 사냥하세.
더욱이 원정대장인 야마모토는 “늑대는 관심없고, 조선 호랑이를 잡아야 남자 중 남자!”라고 외쳤답니다. 이 무슨 말일까요. 이들에게 ‘호랑이 사냥’은 다목적이었습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을 발판으로 미국과 당당히 맞서며, 이제는 러시아까지 침략하겠다는 제국주의의 야욕을 과시한 겁니다.
‘야마모토 정호군’이 11월 17일부터 한달간 벌인 ‘호랑이 사냥’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호랑이와 표범 각 두마리씩, 곰 한마리, 멧돼지 세마리, 늑대 한마리와 산양 다섯마리, 노루 아홉마리, 그리고 기러기와 청둥오리 꿩 등이었는데요. 정호군은 서울 조선호텔과 도쿄(東京)의 데이코쿠(帝國)호텔에서 각 한차례씩 사냥물 시식회를 열었습니다. 특히 데이코쿠 호텔에서 열린 시식회에는 현직 대신(장관) 등 200여 명의 고관대작이 총출동했답니다.
이때 시식회에 등장한 메뉴를 보면 기가 막힙니다. ‘함경도 호랑이의 차가운 고기와 영흥 기러기 스프, 부산 도미 양주찜, 북청 산양볶음, 고원 멧돼지 구이….’
■가토 기요마사의 조선 호랑이 사냥
이때 정호단장이라는 야마모토가 감상에 젖어 했다는 연설이 마음에 걸립니다.
“전국시대의 무장은 진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조선의 호랑이를 잡았습니다. 다이쇼 시대(1912~26년)의 저희들은 일본 영토 내(조선을 일컬음)에서 호랑이를 잡아왔는데,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기자가 지었다는 정호군가에도 ‘가토 기요마사’ 운운하는 내용이 있죠. 대체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살펴봅시다.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는 일본 열도에는 없는 동물이었습니다. 평소 호랑이를 구경할 수 없었던 일본인들에게 임진왜란 때의 호랑이 사냥은 ‘무사들의 로망’이었나 봅니다. 단적인 예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의 호랑이 사냥 설화가 전해지는데요.
“…가토가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호랑이가 갈대숲을 헤치고 입을 벌리고 덮쳐오자 가토가 조총으로 쏘았다. 급소를 맞은 호랑이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상산기담>·1739년 출간)
1853년 류테이 다네히데(柳亭種秀·1804~1868)가 펴낸 그림에는 일본과 중국 영웅 100명 가운데 맨 첫번째로 가토 기요마사를 다뤘는데요. 그림 옆에 쓴 글이 의미심장하죠.
“가토 기요마사, 일본의 영웅. 자국을 떠나 멀리 삼한의 땅에 이르고 한토(漢土·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쳐 나쁜 호랑이를 물리쳐서 모든 군사들에게 모범을 보여….”(‘화한영웅백인일수·和漢英雄百人一首’)
가토가 호랑이 등에 올라타 머리 위쪽에서 창을 내리찍고, 호랑이가 앞발을 허공에 휘두르며 고통스러워하는 그림을 보면 섬뜩합니다. 이처럼 19세기에 들어서면 가토의 호랑이 사냥은 한반도와 중국대륙 침략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즈음 정한론이 등장하고 한반도 침략을 노골화 하는 일본의 행보와 궤를 같이 하고 있는겁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세 상납한 호랑이 고기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은 어떨까요.
왜장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1557~1612)가 부산 기장성을 점령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랑이 한마리를 보냈구요. 이 때 도요토미는 기뻐서 미친듯이 춤을 췄고, 그러자 조선에 출병한 일본 무장들은 경쟁적으로 호랑이를 상납했답니다.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1561~1625)는 동래에서 한마리,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1535~1619)는 창원에서 두마리를 잡아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에게 보냈다고 하는데요.
이 가운데는 “호랑이를 잡아 보내라”는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호랑이를 사냥한 경우도 있었다네요. 조선에 출병했던 나베시마(鍋島) 가문의 문서를 보면 “방금 전 호랑이를 보내라는 명을 받았으므로 빨리 사냥해서 보내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도요토미 측이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1538~1618)에게 “호랑이의 가죽, 머리, 뼈와 고기, 간과 담 등을 목록 그대로 잘 받았습니다. 도요토미 님이 기뻐하며 드셨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답니다.
호랑이는 당시 최고의 보양식으로 꼽혔습니다. 호랑이 가죽, 즉 호피는 고관대작들의 융단으로 사용됐구요. 뼈와 피, 담, 고기도 최고급 정력 장강제였습니다. 호랑이의 뼛가루와 골즙은 호정(虎精)으로 일컬어졌는데요. 이것을 섞어 만든 독한 술은 호정주라 해서 고가로 팔렸습니다. 또 호골고(虎骨膏)라 해서 호랑이 뼈를 바짝 조린 고약의 효력은 신기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호랑이의 기력이 모두 앞다리에서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와중에 조선호랑이마저 왜장들의 무용담을 위해, 혹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보양강장제를 위해 무참히 살해됐음을 알 수 있죠.
■‘해수구제’ 정책으로 절멸된 호랑이
1917년 야마모토가 ‘일본 남아의 힘을 뽐내기 위해’ 호랑이 사냥에 나섰을 무렵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해수구제(害獸驅除)’ 정책시행에 박차를 가합니다. 일제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짐승을 퇴치한다는 명분으로 ‘해수구제’를 외쳤는데요.
조선총독부는 “1915~16년 2년간 호랑이·표범·늑대·곰·멧돼지 등 맹수의 공격으로 359명의 사상자를 냈다”(<조선휘보> 1917년)면서 이 정책을 밀어붙였습니다. 사상자 중 늑대에게 당한 이가 245명(68%)으로 가장 많았고, 멧돼지 64명, 호랑이 19명, 표범 10명, 곰 21명 순이었습니다. 늑대에 의한 희생자가 압도적이었는데, 다른 짐승들까지 표적이 된 셈이었습니다.
총독부의 대대적인 사냥이 시작됐습니다. 1915년 경찰관·헌병 3321명, 공무원 85명, 사낭꾼 2320명, 몰이꾼 9만1252명이 동원됐는데요. 15~16년 사이 호랑이는 24마리, 표범 136마리, 곰 429마리, 늑대 228마리가 죽어나갔습니다. 호랑이·표범·곰의 먹잇감인 애꿎은 노루(8947마리)와 토끼(612마리) 등도 떼죽음 당했습니다.
1919~24년 사이 6년간 포획된 호랑이는 65마리, 표범은 385마리였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포획된 호랑이 중에는 체중이 85관(318㎏)~90관(338.5㎏) 짜리 대형 호랑이가 포함돼있었습니다. 당시 사이토 마코토(齊等實·1858~1936) 총독이 구입한 호랑이 가죽 2장은 크기가 7척(2m10㎝)이나 되었답니다.
이러한 무자비하고 무분별한 사냥 탓이겠죠. 조선총독부 통계연감을 보면 1924년부터 9년 동안 호랑이 사냥건수는 단 2건이었습니다. 이후 1934년(1마리)-1937년(3마리)-1938년(1마리)-1940년(1마리)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기록에서 사라지고 마는데요.
당시 경성사범학교 생물교사였던 우에다 츠네카즈(上田常一)는 호랑이 멸종이 임박했음을 경고했습니다.
“조선에는 호랑이가 매우 많아…지금은 호랑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며… 피해방지의 목적 외에도 고가의 모피와 뼈를 얻으려 연이어 호랑이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조선의 호랑이는 가까운 장래에 멸종할 것이 틀림없다.”(<과학지식>·1937년)
해수구제는 허울뿐이고 모피와 뼈를 구하려고 호랑이를 남획한다는 고발입니다.
어떻습니까. 저는 1917년 정호군의 단장을 맡은 야마모토가 했다는 말이 영 귀에 거슬립니다.
‘일본 영토 내에서 호랑이를 잡게 됐다’는 표현인데요. 그동안에는 전설이나 신화로만 접했고, 간간이 침략전쟁의 와중에서만 경험했던 호랑이 사냥이었죠. 그렇지만 이제는 일본 영토가 된 ‘한국 땅’에서 제 마음껏 할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좋았을까요. 호랑이 해를 앞두고 반드시 잊지말아야 할 호랑이의 역사입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상징사전: 호랑이 편>, 2021
김호근·윤열수, <한국호랑이>, 열화당, 1986
야마모토 다다시부로, <정호기>, 이은옥 옮김, 에이도스, 2014
엔도 기미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이은옥 옮김, 이담, 2009
최경국,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무사그림과 호랑이 사냥’, <일본연구> 제40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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