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리우올림픽이 우리 시간으로 6일 아침 개막됩니다. 아무리 금 은 동메달보다 참가에 의의가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치열한 승부끝에 얻을 수 있는 승리의 쾌감은 그 무엇과 견줄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선수단의 확실한 금맥인 양궁의 경우는 어떨까요. 오히려 국내 선발전이 더 치열할 정도로 올림픽 대표로 뽑힌 선수들의 기량은 출중합니다. 궁술의 피가 흐르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나 봅니다. 전설속 동이족 군장인 예라는 인물부터 고구려 창업주 주몽, 그리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까지. 저마다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를 자랑했지요. 20년 전인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김경욱 선수가 10점 만점의 한가운데 과녁을 두번이나 정통으로 맞췄고, 1994년 한승훈 선수가 30미터 거리에서 36발 전부 10점 만점을 쏘아 360점을 기록했습니다. 가히 태양 9개를 쏘아 떨어뜨렸던 예, 120미터 거리에서 옥반지를 박살낸 주몽, 그리고 180미터 거리에서 백발백중을 기록한 태조 이성계와 견줄만한 신궁이지요. 이번주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93회는 그래서 '동이족 역사상 최강의 궁사는 누구'를 주제로 다뤄보겠습니다.
“TV화면이 뻥 뚫렸다. 가운데 과녁에 박힌 화살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10발 가운데 2발이 과녁의 정가운데 숨겨놓은 POV(Point of view) 카메라를 정통으로 맞힌 것이다.”
1996년 8월1일에 벌어진 일이다.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한 김경욱 선수가 양궁 여자개인 결승에서 ‘퍼펙트골드’를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70m 거리에서 직경 12.2㎝의 10점 과녁, 그것도 정가운데 점인 정곡(正鵠·퍼펙트골드)을 맞힐 확률은 1만2500분의 1일이라 한다. 그런데 그 퍼펙트골드를 두 번이나 맞혔다니….
■퍼펙트 골드의 신기
그보다 2년 전인 1994년 6월12일의 일이다. 한승훈이라는 남자양궁선수는 청주에서 열린 제1회 국제양궁대회 30m 예선에서 360점 만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36발 모두를 10점 과녁에 명중시킨 것이다. 10점 과녁의 직경은 장거리(70·90m) 12.2㎝, 단거리(30·50m) 8㎝이다. 한승훈이 쏜 36발 가운데 단 2발만이 10점 라인에 걸쳐 있었을 뿐이었다.
나머지 34발은 안정적으로 직경 8㎝인 10점 과녁 안을 뚫었다. 특히 ‘골드 중의 골드’를 뜻하는 ‘X(직경 4㎝)’ 안에 무려 22발이 꽂혔다. 표적지를 보면 한 점처럼 보이는 곳이 5군데나 있었다. 이는 화살 위에 화살이 꽂혔다는 얘기다. 또 일렬로 7발이 일직선을 그은듯 이어진 곳도 있었다. 상단부엔 4발이 가로·세로 1㎝의 사각형을 그린 듯한 모습으로 찍혀 있었다. 양궁 역사상 100년 만에 처음 보는 진귀한 광경에 세계양궁 관계자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둘 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신궁(神弓)의 현현(顯現)’이었다. 과연 ‘동이(東夷)’의 후예 답다.
■10개의 태양 떨어뜨린 '예'
역사의 기록을 보면 동이족은 신궁의 피를 타고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흔히 신묘한 활솜씨의 원조격으로 꼽는 이는 고구려 창업주 주몽(朱蒙)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앞선, 동이족 출신 명궁의 신화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가 바로 동이계의 신 혹은 군장인 ‘예’이다.
<산해경>과 <회남자> 등을 보면 태평성대인 요임금 시절, 열 개의 태양이 멋대로 떠올랐다. 이 태양들은 동방의 천제 제준과 태양의 여신 희화 사이에 난 자식들이었다. 태양은 본디 세발 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였다. 어쨌든 태양 10개가 한꺼번에 떠오르자 산천초목이 타기 시작했다. 요임금이 제준에게 도움을 청하자 제준은 동방의 명궁 예를 지상세계에 파견한다.
예는 특유의 활솜씨로 태양을 하나하나 명중시킨다. 떨어지는 태양은 세발 달린 까마귀로 변한다. 예는 9개의 태양을 떨어뜨린 후에야 활쏘기를 멈춘다. 하나 남은 태양은 비로소 정상운행으로 지상세계를 비춘다. 예의 활솜씨는 멈추지 않는다. 어린아이 울음으로 상대를 현혹시킨 뒤 잡아먹는 괴물 알유를 화살로 처치한다. 끌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2m나 되는 착치를 역시 사살하고, 9개의 머리로 불을 뿜어내는 구영을 9발의 화살로 죽인다. 이어 사나운 괴조(怪鳥) 대풍과 코끼리까지 삼킨다는 구렁이 파사, 거대한 멧돼지 봉희 등을 모조리 활로 쓰러뜨린다. 예에게 화살은 인간 세상을 구원하는 ‘최종병기’였던 셈이다. 예의 신화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대표 영웅인 헤라클레스를 빼닮았다.
■100보 거리에서 반지 부순 주몽
그로부터 2500년 후에 태어난 주몽 역시 예를 닮은 명궁이었다. <삼국사기> ‘동명왕조’ 등을 보면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이를 가르켜 주몽(朱蒙)이라 했다’고 한다. 7살 때부터 활과 화살을 스스로 만들었으며, 백발백중의 명궁이었으니 주몽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것이다.
주몽이 22살이 되어 졸본천에서 나라를 세운 뒤 비류국의 국경을 넘는다. 삼국사기는 사냥을 하다가 국경을 넘었다고는 하지만, 영토확장을 위해 도발한 것이 틀림없다. 주몽은 비류국 왕인 송양과 팽팽하게 맞선다. 송양은 주몽이 자꾸 “천손의 아들 운운”하자 재주를 시험하고픈 마음에 결투를 신청했다. 활쏘기로 자웅을 겨루자는 것이었다.
“사슴을 그려 100보 안에 놓고 쏘았다. 송양은 화살이 사슴의 배꼽에 들어가지 못했는데도 힘에 겨워했다. 하지만 왕(주몽)은 옥으로 만든 반지(옥지환·玉指環)을 100보 밖에 두고 쏘았다. 화살을 맞은 옥지환이 기와 깨지듯 부서졌다.”
100보라? 만약 여기서 말하는 보(步)가 사람의 보폭이라면 100보는 70m(보폭이 70㎝일 경우) 정도 된다. 그 경우 요즘 양궁 경기의 거리(70m)와 비슷하다. 그 거리에서 옥반지를 맞췄다면? 김경욱이 70m 거리에서 맞춘 퍼펙트골드와 견주면 어떨까. 김경욱이나 주몽이나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만약 보(步)가 ‘거리의 단위’라면? 조선조 <경국대전>이나 <문헌비고> 등에 나오는 1보는 요즘 거리로 대략 120㎝ 된다, 100보라면 무려 120m. 그 거리에서 지름 3㎝도 안될 옥반지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거리에서 옥반지를 산산조각 냈다면? 주몽의 활솜씨는 가히 신묘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창업주가 이런 경지이니 고구려의 활쏘기 풍습은 어땠을까.
“고구려에서는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樂浪)의 언덕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 날은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삼국사기> ‘온달전’)
때는 바야흐로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 시절. 평강공주를 부인으로 얻은 온달은 “말을 타고 사냥대회에 나서 남보다 앞서서 포획하는 짐승이 많아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아 짐승을 잡는 기술? 이것이 바로 고구려 고분에 흔히 등장하는 사냥장면일 것이다. 예컨대 무용총 벽화에서 사냥모습을 보자.
■활쏘기 만으로 관리 뽑았던 신라
맨 위에는 기마무사가 몸을 돌려 사슴을 쏜다. 내닫는 말 위에서, 그것도 몸을 반대방향으로 돌려 활을 쏘는 고난도의 기술이다. 흰 말에 화려한 복장을 갖춘 것을 보면 왕·귀족이 분명하다. 말을 타고 달려 달아나는 호랑이를 쫓으며 활을 쏘는 장면도 있다. 호랑이는 오랫동안 쫓겼는지 입을 크게 벌린, 지친 모습이다.
약수리 무덤의 집단사냥 벽화도 대단한 그림이다. 몰이꾼들이 짐승을 몰고, 여러 명의 사수들이 짐승을 잡는 모습이다. 한 사람은 한 대의 화살로 노루 세마리의 목을 꿰뚫었다. 다른 한사람은 등에 화살을 맞고 산으로 기어오르는 범을 향해 명적(鳴鏑·소리화살)을 겨눈채 쫓아간다. 장천 1호분과 덕흥리 무덤에도 범·멧돼지·곰 등을 활로 쏘는 장면이 나온다. 무사들의 화살이 도망가는 동물을 쓰러뜨리고, 궁수들은 쓰러지는 사냥감을 쳐다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해마다 봄철 3월3일 낙랑언덕에서 사냥대회의 장면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국왕배 사냥대회’ 같은….
같은 부여계인 백제라고 다를까. <후주서> ‘백제전’에는 “백제는 기사(騎射), 즉 말 타고 활 쏘는 일을 좋아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아닌 게 아니라 다루왕(재위 28~77)은 31년 한 쌍의 사슴을 잇달아 맞혀 주위의 찬사를 받았으며, 고이왕(234~286)은 236년 강화도에서 손수 사슴 40마리를 쏘아 맞혔다. 동성왕(479~501)은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고 한다. 동성왕은 삼국의 임금 가운데 가장 많은 7차례나 사냥에 나섰다. 하지만 마지막 사냥터였던 사비성 서쪽에서 폭설을 만나 마포촌에서 묵었다가 백가라는 신하가 보낸 자객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신라인들도 활쏘기를 즐겼다. <수서>와 <구당서>, <신당서> 등을 보면 “해마다 한가위 잔치 때 임금의 주재로 관인(官人)들이 활쏘기를 겨뤄 말과 베를 상으로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추석 때마다 <국왕배 공무원 궁도 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삼국사기> ‘원성왕조’는 “원성왕 4년(788) 독서삼품과를 제정하기 전까지는 오로지 활쏘는 것으로 인물을 선발했다.”고 기록했다. 아니 활쏘기 성적만으로 관리를 뽑았다니…. 그러고 보면 해마다 추석에 열리는 공무원 궁도대회는 그야말로 최정예 스타급 선수들이 나서는 왕중왕 대회였을 것이다.
■180m거리에서 백발백중
우리 역사상 활이라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은 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일 것이다. <태조실록>을 보면 이성계의 활솜씨는 그야말로 신출귀몰, 그 자체이다.
“태조가 젊었을 때 정안공주 김씨의 집 담모퉁이에 까치 다섯마리가 있었다. 태조가 한 발을 쏘니 5마리가 모두 떨어졌다. 김씨가 이를 괴이하게 여기니 태조는 ‘절대 발설하지 마라’고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담비 20마리를 차례차례 쏘아 모두 죽였다. 이성계의 활과 화살은 남들과 달랐다. 신묘한 사법(射法)으로 유명했으며, 싸리나무로 화살대를 만들고 학의 깃으로 깃을 달았다. 또 순록의 뿔로 촉을 만드니 촉의 크기가 배(梨)만 했다. 그러니 화살의 힘이 엄청났다. 일찍이 태조가 화살 한 발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노루 두 마리를 꿰뚫고는 풀명자나무에 꽃혔다. 신하 이원경은 “화살이 너무 깊이 박혀서 쉽사리 뽑을 수 없었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공민왕은 은 거울 10개를 80보 밖에 두고는 신하들에게 맞히면 이 은거울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조선시대의 척도로 계산해볼 때 1보가 120㎝ 정도 되므로 80보라면 96m에 이른다.그런데 태조는 이 은거울 10개를 모두 맞혔다.
한번은 이성계가 ‘절친’들을 초대, 술자리를 주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100보(120m) 밖에 배나무 위에 배 수십개가 서로 포개어 축 늘어져 있었다. 친구들이 “한번 쏘아보라”고 청했다. 즉각 활을 뽑은 태조는 시위를 당겼다. 과연 한 발에 배 다발이 다 떨어졌다. 여러 손님들이 감탄사를 연출하면서 건배했다.
또 하나의 일화. 원나라에서 벼슬길에 오른 황상(黃裳)이라는 자는 원나라 순제가 감탄할 정도로 명궁이었다. 공민왕과 신료들은 과녁을 150보 밖에 두고 “두 사람이 한번 겨뤄보라”고 권했다. 150보 밖이면 무려 180m에 이른다. 그야말로 까마득했다. 황상은 물론 명궁이었다. 하지만 연달아 50발을 맞힌 이후에는 힘이 빠져 화살이 번번이 과녁을 빗나갔다. 하지만 이성계의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공민왕은 그런 이성계를 두고 “정말 비상한 사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고려판 퍼펙트골드’ 이룬 이성계
고려 우왕(1374~1388) 때의 일이다. 임금이 사냥터에서 무신들을 대상으로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 50보(60)m 거리를 두고 주발크기로 큰 과녁을 만들고, 그 가운데 은(銀)으로 작은 과녁을 만들어 복판에 붙였다. 지금으로 치면 10점 골드 안에 ‘퍼펙트 골드(X점)’ 과녁을 더 만든 것이다. 그 X과녁의 직경은 2치(6㎝)였다. 이성계는 정확히 그 X과녁에 화살을 명중시켰다. 이성계의 활쏘기는 촛불을 밝힐 때까지 계속됐으며, 우왕은 이성계에게 말 3필을 하사했다.
또 있다. 1384년 우왕과 함께 사냥을 나선 이성계는 “오늘 짐승을 쏠 때 등골을 맞힐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평소 짐승을 쏠 때는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혔는데, 이날만큼은 등골을 쏘겠노라고 예약한 것이었다. 과연 그랬다. 이성계가 사슴 40마리를 쏘았는데, 모두 등골을 명중시켰다. 주변 사람들은 신묘한 사법에 탄복했다.
실전에서도 이성계의 활솜씨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1380년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적군의 기병과 예병이 급습하자 화살 50대를 잇달아 쏘아 적군의 얼굴에 명중시켰다. 왜적의 장수 가운데 아기발도라는 소년장수가 있었는데, 매우 용맹했다. 15~16살에 불과한 소년장수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에 감쌌기 때문에 틈이 없었다. 이성계가 “투구의 정자(頂子·꼭지)를 쏘겠다”고 예약한 뒤 한 치의 실수없이 두 발을 맞히자 투구가 떨어졌다. 그러자 이성계의 충성스런 부하 이지란이 아기발도를 쏘았다. 이로써 적군의 기세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 조상에 그 후손들
1385년 왜구의 침략으로 패색이 짙어가자 군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성계는 출정을 자처했다. 떨어진 사기를 회복시키는 것이 시급했다. 이성계는 진중에 70보 거리에 떨어져 서있는 소나무를 보고 군사들을 총출동시켰다.
“자. 내가 소나무의 몇번째 가지에 몇번째 솔방울을 쏠 것이다. 너희들은 잘 보아라.”
그리고는 화살을 쏘아 7번 모두 명중시켰다. 군사들은 모두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며 환호했다. 이로써 패색이 짙던 전투는 승리로 마무리됐다.
태조의 충신인 이지란도 천하의 명궁이었다. 본래 여진족인 이지란의 이름은 퉁두란이었다. 공민왕 때 고려에 투항해서 북청주에 거주하면서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갔다. 사슴을 사냥하던 이지란의 화살솜씨에 놀란 태조가 최측근으로 삼은 것이다. 과연 이지란의 활솜씨는 대단했다. 어느 날 이성계가 지나가던 여인이 이고 있던 물항아리를 쏘아 맞추자 이지란이 진흙탄환을 쏘아 그 구멍을 막았다. 도가 지나친 장난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만큼 둘의 활 솜씨가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버지를 빼닮은 태종 이방원도 대단한 활솜씨를 자랑했다. 1385년 왜구 침입 때 이방원은 화살로 적군 20여 명을 사살했다. 세종의 둘째아들인 세조도 16살 때 사슴과 노루 수십마리를 사냥했다. <실록>에는 “바람에 짐승의 털과 피가 날려 옷을 붉게 물들였다”고 기록돼있다. 한 개의 화살로 6마리를 죽인 것이 세번이고 5마리를 죽인 것도 4~5번이었다니 대단한 실력이다.
그러고 보면 나라를 창업했거나, 아니면 혁명 또는 정난 등을 주도한 격변의 지도자일수록 갖가지 무용담의 주인공이 된다. 지존의 자리에 오를 수밖에 없는 비범한 지도자로 인정받으려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이적(異蹟)을 보여 주어야 했기 때문이리라. 예전엔 사냥이 곧 군사훈련이기도 했고, 사냥터에서 잡은 짐승은 제사에 쓸 제물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활쏘기 실력은 지도자의 덕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어떤 기록을 보면 과장의 냄새가 물씬 풍기기도 한다. 하지만 김경욱와 한승훈의 실례(實例)가 있지 않은가. 생명을 건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주몽이나 이성계의 활솜씨도 그리 ‘지나친’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구려 벽화에 나온 고난도의 활솜씨를 기억해보라.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김광언, <한·일·동시베리아의 사냥(수렵문화 비교지)>, 민속원, 2006
정연학, <역사문헌을 통해 본 수렵문화>, ‘생활문물연구’ 제18호, 국립민속박물관, 2006
이중화, <조선의 궁술>, 이성곤 옮김, ‘한국무예사료 총서’, 국립민속박물관, 2008
김대현, <고구려 초기 사회에서 사냥의 유형과 기능>, 한국교원대 석사논문, 2003
사회과학출판사, <고구려문화사>, 논장, 1988
연합뉴스, <인류의 문화유산 고구려고분벽화>, 2006
요미우리 TV방송, <호태왕비와 집안의 벽화고분>, 목이사, 1988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 황금부엉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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