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상 금속활자로 간행된 최초의 책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다.
깨달음(證道)의 뜻을 밝힌 이 책의 발문을 보면 고려 무인정권의 실세인 최이(?~1249)가 “이 책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으니 주자본(鑄字本·금속활자본)으로 판각한다. 기해년(1239년)”이라고 기록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 책의 목판본만 전해지고 있다.
또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1234~1241년 사이) 강화도에서 (나라의 제도와 법규를 정할 때 참고했던) <고금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그저 기록만 존재할 뿐이다.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은 1377년(공민왕 13)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다.
어떤 경우도 1447년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보다 210~77년 앞섰음을 알 수 있다.
2005년 서울디지털포럼에 참석한 앨 고어 전 미국부통령은 “스위스 인쇄박물관에서 들었다”면서 “구텐베르크는 고려를 방문해서 인쇄술 기록을 가져온 교황청 사절단 친구를 만난 뒤 금속활자를 만든 것”이라 전했다.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고려의 인쇄술이 당시 세계제국이던 원나라를 통해 유럽을 전파됐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사실 활판인쇄로 금속활자를 실용화한 것은 다름 아닌 구텐베르크였다. 수도사가 한자 한자 필사해서 10~15일에 겨우 한 권의 성경을 만들었던 때가 아닌가. 같은 책을 수십, 수백권씩 찍어냈으니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마법 같았다. 책의 대량 보급은 유럽을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문예부흥의 시대로 이끌었다.
반면 최초 발명국이었던 고려·조선에서 서적은 대중용이 아니었다. 왕실과 사대부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처럼 몇 부 찍어 4~5대 사고(史庫)에 보관하는데 그쳤으니 지식의 확대 재생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책을 찍을 때 사용한 금속활자 역시 몇 점 남아있지 않다. 몇 년 전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찍어냈다는 ‘증도가자’가 100여점 나왔으나 아직 진위확인 중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그동안 남북한이 각 1점씩 보관해왔다. 남측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복’자와 북측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전’자이다.
‘복’자는 1913년 10월7일 덕수궁 구 왕궁박물관이 일본인 골동품상 아카보시(赤星佐七)로부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2원을 주고 사들인 것이다. 아카보시는 개성의 어느 무덤에서 발굴한 것을 사들였다고 한다.
‘전’자는 1956년 개성 만월대 회경전 서쪽 300m 지점에서 수집됐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해 남북한의 개성 만월대 공동조사 때 또 한 점이 발굴됐다. 남북한 학계가 축제무드에 젖었지만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으로 빠지는 바람에 찬물을 뒤집어썼다. 올 4월 북한의 만월대 단독발굴에서 4점이 더 확인됐다.
그제 한국고고학회가 개최한 ‘통일고고학을 위한 연구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에서 안타까운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실물을 볼 수 없으니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다 제쳐두고 금속활자 하나만은 남북한 공동으로 조사하면 어떨까. 금속활자만큼은 세계최초라는 자부심으로 똘똘뭉친 남북이 아닌가. 다 제쳐두고 금속활자 하나만이라도 남북한 공동으로 조사하면 어떨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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