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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하룻밤 만리장성'은 패가망신 설화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 쌓는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하룻밤 짧은 인연이라는 소리니 사뭇 낭만적인 설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화의 원래 내용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여자한테 잘못 걸렸다가는 죽을 고생을 하기 십상이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또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하룻밤 만리장성' 이야기가 한반도에서만 전해진 설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영남지방에서 주로 들을 수 있는 설화랍니다. 신기합니다. 왜 중국 진나라 때 쌓은 만리장성 축성의 이야기가 이역만리 영남지역에서 퍼졌을까요. 거기에는 그럴수밖에 없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역사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95회는 바로 '하룻밤 만리장성-왜 한반도에만 있는 전설일까'입니다.     

“몽염은 30만 병력을 이끌고 북쪽의 융적(오랑캐)을 쫓은 뒤 장성을 쌓았다. 장성을 쌓으면서 지형과 산세의 기복에 따라 요새를 만들었다. 임조(간쑤성 민현)~요동(랴오둥)까지 1만 여 리가 되었다.”(<사기> ‘몽염열전’)

만리장성이라는 말은 바로 이 <사기> ‘몽염열전’에 기록된 ‘몽염이 쌓은 1만 여 리’에서 탄생했다. 기원전 213년 시황제의 명에 따라 만리장성을 축조한 몽염은 시황제가 급서한 뒤(기원전 210년) 진2세 황제 호해와 환관 조고의 계략에 말려 자결을 명받았다. 역사가 사마천의 평가는 가차없다. 사마천은 “내가 몽염이 건설한 만리장성을 둘러보고 왔다”면서 이렇게 장탄식한다.

“산악을 깎고 계곡을 메워 지름길을 통하게 했다. 백성의 힘을 가벼이 여긴 것이 분명하다. 백성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해야 할 몽염 같은 이름있는 장수가 도리어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하여 공사를 일으켰구나. 그러니 몽염이 죽는 것은 마땅하다.”(<사기> ‘몽염열전’)

사마천은 “백성을 고달프게 만든 만리장성 공사에 앞장 선 몽염은 죽어도 싸다”고까지 극언한 것이다.

1970년 홍콩과 대만은 물론 국내에서도 개봉된 영화 ‘맹강녀의 통곡,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다’ 포스터. 만리장성 관련 설화를 다룬 ‘맹강녀의 진실’은 중국 4대전설 중 하나로 꼽힌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몽염? 죽어도 싸다”
전국시대의 혼란기에서 겨우 안정을 찾은 진나라 백성들이 느껴야 했던 고초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림잡아 100만명에 이르는 진나라 사람들이 만리장성 수축에 동원됐다. 일꾼들의 고초는 차치하고 물자와 식량을 실어나르느라 노약자와 여성들까지 총동원됐다. 게다가 세금까지 무겁게 거뒀다.

지금처럼 크레인 같은 건설장비도 없었다. 높은 산과 험준한 계곡과 골짜기 등에서 힘없는 백성들은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진나라의 가혹한 형법은 조금이라도 꾀를 부리는 백성들을 가차없이 처벌했다. “망하지 않으려 장성을 쌓았지만 거꾸로 성을 쌓음으로써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을 몰랐다”(<회남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기> ‘회남왕전’을 봐도 참상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몽염을 파견해서 장성을 쌓아 동서 수천리에 이르렀다. 비바람과 눈보라에 몸을 맡긴 병사와 장수는 언제나 수십만이었다. 죽은 자도 헤아릴 수 없으며 시체가 천리이고, 피가 흘러 전답을 이루었다. 반란에 가담하려는 백성이 10가구에 5가구나 되었다.”
즉 장성 수축에 따른 가혹한 노역에 이기지 못한 백성들이 ‘진승·오광의 난’(기원전 209년)에 속속 가담했음을 고발하고 있다.

■‘그대는 아는가. 장성 아래 쌓인 시체를…’
이밖에도 장성수축을 둘러싼 참상이 이런저런 문헌에 기록돼 있다.
“지금도 장성의 노래가 끊이지 않는다. 죽은 자의 뼈가 장성 아래서 비바람을 맞고 있고 해골들이 길가에 널려있다.”(<한서> ‘가연지전’·‘무오자전’)   
“몽염이 장성을 쌓으면 천하의 반이 궁핍하게 되니…. 진나라 백성의 반이 죽을 것입니다.”(<논형> ‘난시편’)

뭐니뭐니해도 북위의 지리학자 역도원(466 혹은 472~527)이 쓴 <수경주> ‘하수’의 기록은 심금을 울린다. 역도원은 “밤낮으로 일하고 경계까지 서야 하는 백성들은 나라를 원망하고 고통스러워한다”면서 서진 시대 철학자인 양천의 <물리론>을 인용해서 이렇게 고발한다.

“만리장성 수축 때문에 죽은 자가 줄지어 늘어섰다. 민간에서 이런 노래가 퍼졌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절대 키우지 마라. 딸을 낳으면 산해진미를 먹여 키워라.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장성 아래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을…’”

남아 선호 사상이 뿌리깊은 중국 역사에서 이런 노래가 퍼졌다? 남자로 태어나면 만리장성 수축에 끌려가 속절없이 죽어간 당대의 슬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노래다.

조선 후기의 학자 조재삼(趙在三)이 편찬한 <송남잡지>. 백과사전인데, ‘하룻밤 만리장성’의 사례가 자세히 적혀있다.

■맹강녀의 전설
만리장성과 관련해서 중국인들이라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바로 ‘맹강녀의 전설’이다. 이 ‘맹강녀의 전설’은 ‘견우와 직녀’, ‘백사전(白蛇傳)’, ‘양축(梁祝·양산백과 축영대의 사랑이야기) 등과 함께 중국의 4대 전설로 꼽힌다.

이 전설은 진나라의 폭정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그리고 이 가혹한 제국을 엎어야 한다는 민중의 열망이 얼마나 강한 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민간에서 다양한 형태로 윤색된 맹강녀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진시황 때의 일이다. 맹강녀는 남편 범기량이 만리장성 축성 현장에 끌려가자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3년이 지난 후에도 소식이 없고, 또 마침 엄동설한에 닥쳐오자 맹강녀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남편을 만나러 간 것이다. 맹강녀는 두툼한 솜옷을 지어 보따리를 안고 몇달에 거쳐 만리장성에 도착한다. 하지만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만 듣는다. 맹강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져 800리나 되는 성벽이 무너졌다. 그 틈에 수많은 백골이 쏟아진다. 남편의 시신을 찾았지만 백골만 남은 시신을 구별할 수 없었다. 넋을 잃고 통곡하던 맹강녀의 뇌리에 스친 것이 있었다. 그리워하는 사람의 백골은 연인의 피를 빨아들인다는 속설이 떠올랐다. 맹강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핏방울을 일일이 백골 위에 떨어뜨렸다. 마침 어떤 백골이 피를 빨아들였다."

"이때 진시황이 맹강녀의 미모를 보고 반해 첩으로 삼고자 했다. 맹강녀는 남편을 위해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줄 요구했다. 진시황이 갸륵하다고 여겨 제사를 지내주었다. 맹강녀는 제사가 끝나자 마자 남편의 시신을 받쳐들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

지금도 중국 허베이성(하북성) 산해관 동쪽 7㎞ 지점에 맹강녀의 묘가 있고, 그 곁에는 원망 가득한 눈초리로 만리장성을 바라보는 맹강녀의 동상이 서있다.

물론 맹강녀 전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윤색되고 첨삭되어 다양한 갈래의 전설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지는 설화는 민간 백성들의 여론을 그대로 반영한다. 정식으로 기록하지 않아도, 수백, 수천년 동안 생명력을 발하며 전승된다. 

만리장성 설화는 결국 희대의 폭군인 진시황과, 폭정의 상징인 만리장성 수축, 그리고 폭군의 폭정에 시달렸던 백성들의 저항심리가 투영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룻밤 만리장성’의 원 뜻
이처럼 중국에 맹강녀의 전설같은 만리장성 이야기가 전승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만리장성 설화가 이역만리 한반도에 널리 퍼져있다는 것은 신기하지 않은가.

민속학자 이수자의 논문(‘만리장성 설화의 형성기원과 문화사적 의의’)를 보면 흥미로운 ‘만리장성 설화들’이 소개돼있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기록된 진시황과 만리장성 관련 전설을 보자. 여씨 성을 가진 용사가 진시황이 수레를 부수는 설화(경기 안성)와 공자의 묘를 파거나 사당을 부수려 했던 진시황 이야기(전남 고흥, 경북 군위), 진시황과 불로초 설화(정북 정주·정읍), 진시황과 만리장성 이야기(인천, 울산시·울주군) 등….

그 가운데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설화일 것이다. 중국에는 없는 설화다.  그런데 ‘하룻밤 만리장성(一夜萬里城)’의 본뜻은 지금 알려진 ‘남녀간의 하룻밤 사랑’과 전혀 관계없는 말이었다.

다산 정약용이 모은 속담집 <이담속찬>을 보면 ‘일야지숙장성혹축(一夜之宿長城或築)’이라는 글이 있다. 그러나 다산의 뜻풀이는 요즘 통용되는 ‘하룻밤 만리장성’ 설화와 천양지차다. ‘비록 잠시라도 마땅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雖暫時之須不宜無備)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비무환의 뜻이다.

조선 후기 학자 조재삼이 엮은 <송남잡지>에도 ‘하룻밤 만리장성’을 정확하게 뜻하는 ‘일야만리성(一夜萬里城)’ 구절이 나온다.

“지금은 하룻밤 인연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 일본놈들은 조선에 오면 하룻밤을 자고 가더라도 반드시 성을 쌓았다. 적을 막기 위해 성을 쌓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남녀 관계를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으나 원래의 뜻과는 다르다. 그러나 본래 이런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무슨 남녀간 하룻밤에 쌓은 연정이 아니라 다산의 해석처럼 유비무환의 뜻이라 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지은 속담집 <이담속찬>. ‘하룻밤 만리장성’의 설화는 유비무환의 뜻을 담고 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하룻밤에 쌓은 만리장성의 대가
하지만 요즘엔 ‘유비무환’의 해석은 전혀 없고, ‘남녀간의 짧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 연정’이란 뜻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설화는 <한국구비문학대계>에 10편이나 소개돼있다.

“어떤 남자가 만리장성 축성에 동원됐다. 그런데 홀로 남겨진 부인이 다른 남자를 유혹해서 하룻밤을 보냈다.(지역마다 이 남자의 신원은 약간씩 달라진다. 소금장수나 머슴, 총각으로 표현된다. 부인은 빨래하는 여자나 주인마님으로도 등장한다)"

"부인은 하룻밤 동침을 한 남자에게 ‘옷가지와 편지 심부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만리장성 현장에 간 남편에게 전해달라’면서…. 그러면서 ‘편지와 옷만 제대로 전달하고 오면 내가 당신과 평생 함께살겠다’고 약속했다. 꿈에 부푼 남자가 여인의 편지를 만리장성 축성 현장에 있던 여인의 남편에게 전달했다. 편지를 전달한 남자는 불행히도 까막눈이어서 편지내용을 알 수 없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여보, 지금 이 편지와 옷가지를 전달한 남자를 대신 두고 당신은 빨리 도망나오세요.’ 편지를 받은 남편은 어리석은 남자를 만리장성 현장에 두고 도망쳐 부인에게 돌아왔다.(지역 설화 중에는 옷을 갈아입는 척하고 도망치는 수법도 등장한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 남의 여자와 하룻밤을 잔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하룻밤 여인과 보낸 대가로 평생 만리장성을 쌓게 됐으니’ 참 기막한 사연이다.

■하룻밤 만리장성 좋아하지 마라, 신세 망친다
전북 군산에서 채록된 설화는 더 기막힌다. 부부에게 속아서 만리장성 노역을 대신 뒤집어썼던 어리석은 남자가 그 지긋지긋한 노역을 다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며 했다는 말이 웃긴다.

 ‘아! 내가 하룻밤 자고서 만리장성 쌓았구나!’

논문을 쓴 이(이수자 민속학자)는 이 ‘하룻밤 만리장성’ 설화를 소개하면서 은근슬쩍 남성들에게 묻는다.
‘만약 어떤 여성이 남성과 하룻밤을 치르고 그 대가로 만리장성을 쌓으라고 하면 어떨 것 같은가.’ 아마 절대 다수의 남자들이 ‘미쳤어?’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마어마하게 좋아하는 여자의 말이라면 어떨까. 진정 사랑하는 여자라면 하룻밤 인연을 대가로 만리장성을 쌓으라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룻밤 만리장성’이라는 말은 남자들에게는 매우 낭만적인 속담으로 전해져왔다. 짧은 만남에 쌓은 소중한 인연이니 얼마나 환상적인가.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남자에게 결코 유리한 속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하룻밤 쾌락을 위해 신세망치니 낯모르는 여성을 조심하라는 경계의 뜻이 담겨 있다. 시쳇말로 ‘깨는 속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작금의 성추문을 꼽아보면 요즘도 통하는 속담이 아닌가.

■영남지방에 많은 만리장성 설화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듯 왜 남의 나라, 그것도 2000년도 훨씬 넘는 중국 진나라 이야기가 이역만리 한반도에서 속담으로 전해졌을까.

한가지 ‘만리장성 설화’가 주로 영남지방에 많다는 것이 흥미로운 대목이다.
예컨대 경남 밀양군 삼랑진 단양면에서 전승된 ‘만어산 바위와 만리장성’ 설화는 “진시황이 만리성을 쌓을 때 만어재 고개를 회초리로 훌쳐 때려서 돌끝이 전부 북쪽을 보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남 울주군 청량면에서 전하는 ‘진시황과 만리장성’ 이야기도 자못 생생하다.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이 내일이면 곧 만리장성 쌓으러 가야 했다. 그 부부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 밥을 달라고 했다. 부부가 먹고 있던 밥을 주니 ‘고맙다’하면서 ‘급할 때 쓰라’면서 말채를 선물로 주었다. 다음날 만리장성 현장으로 간 남편에게 시련이 닥쳤다. 진시황은 산더미 같은 바위를 굴려 성을 쌓도록 했는데, 돌로 말을 만든 뒤 사람들을 쭉 세워 그 돌로 된 말을 몰게 했다. 만약 말을 몰지 못하면 진시황이 죽였다. 이윽고 남편의 차례가 되었다. 남편은 선물로 받은 말채를 꺼내 말을 쳤다. 신기하게도 말이 움직였다. 이 남편의 말채 덕분에 돌이 쉽게 움직여졌고, 그 덕분에 만리장성도 쉽게 축성되었다.”

■‘가시나’는 욕이 아니다.
경북 고령군 개진면 반운리의 ‘마구할망과 만리장성’ 이야기도 있다.
“만리장성의 축조는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많은 신선들이 진시황의 축성에 도움을 주었다. 먼 남쪽 나라에 마구할망도 도움 행렬에 합류했다. 할망은 거대한 돌을 힘들게 찾아 치마폭에 싸서 중국을 향해 날아갔다. 도중에 큰 함성이 들렸고, 자세히 들어보니 만리장성을 다 쌓았다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마구할망은 ‘이제 이걸 가져가도 소용이 없겠구나’하고 돌들을 마을 근처에 던져 놓고 가버렸다. 이 돌들은 논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깨어지고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경북 경주 월성에서 채록된 ‘가시나’에 얽힌 사연도 흥미롭다. 즉 만리장성을 쌓는데 남자란 남자는 다 끌고가니 데려갈 사람이 없었다는 것. 그런데도 자꾸 남자를 보내라 하니 나중에는 할 수 없이 여자에게도 갓을 씌어 보냈다는 것. 그런 여자를 ‘가시나’라 했다는 것이다. ‘갓을 쓰고 간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시나’는 욕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시나’의 어원이 만리장성 축성과 관련있다는 이야기니 얼마나 재미있는가.

기원전 209년 진시황이 몽염을 시켜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만리장성. 아마도 전국시대 말부터 각 제후국이 만들었던 성들을 개축하고  연결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경상도로 이주한 진나라 사람들
여기서 수상한 해석이 나온다. 왜 경상도 지역에 유독 만리장성 설화가 많을까.
이수자씨는 <삼국지> ‘위서·동이전 진한조’를 언급한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진한의 노인들이 전하는 말이 있다. 옛날 진나라에서 있었던 노역을 피해 한국(진한) 땅으로 왔다.(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진서> ‘동이전’은 한술 더 떠 “진한 사람들은 스스로 진나라 유민들이며, 진나라 언어와 비슷하다.(自言秦之亡人避役入韓…言語有類秦人)”고 했다. <북사> ‘신라전’은 아예 “신라의 선조는 진한의 종자”라 규정했다. 비단 중국사료에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

“기원전 20년(박혁거세 38년), 예전에 중국인들이 진(秦)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 마한 동쪽에 자리잡고 진한(辰韓)과 뒤섞여 산 경우가 많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조’)

무슨 말인가. 진시황의 일으킨 만리장성 축성은 진나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만리장성 축성에 동원된 백성들 가운데 죽거나 도망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때 ‘바다 가운데로 가서 신선들을 찾아오라’는 진시황의 지시에 따라 ‘수천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신선을 찾아 동쪽으로 간’ 서불(徐市·혹은 서복) 같은 이도 있었다.

지금 한반도 곳곳에 서불이 거쳐갔다는 ‘서불과차(徐市過此)’의 전설이 새겨져 있다. 또 진시황의 죽음(기원전 210년)-진승의 반란(기원전 209년)-항우·유방의 다툼(기원전 209~202년)이라는 미증유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동북아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시쳇말로 ‘민족대이동’의 격동기가 시작된 것이다.

<삼국지>와 <삼국사기>는 바로 진나라 말기의 혼란, 그리고 그 혼란을 피해 한반도, 그것도 한반도 영남지방으로 이주한 진나라 후예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만리장성 전설이 유독 영남지방에 많은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