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광산업자인 아버지(조지 테일러)를 따라 조선에 온 미국인이 있었다.
21살 청년 앨버트 테일러였다. 테일러 일가는 ‘노다지(No touch)’의 어원이 된 평안도 운산금광을 관리하다가 충북 직산탄광을 직접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 대목이라면 테일러 일가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서술할 수 없다. 당시 금광채굴권이 모두 외국인에게 넘어갔고, 조선의 백성들이 외국인들의 ‘노 터치’ 으름장에 터전을 잃고 쫓겨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앨버트에게 조선은 ‘엘도라도’ 이상의 의미였다. 그는 아버지(조지)가 1908년 사망한 뒤에도 조선에 남았다. 단순히 돈만 번 것이 아니었다.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 등 식민지 조선에서 자행된 일제의 무자비한 만행을 전세계에 알렸다.으니 말이다
1919년 3월1일의 일화는 첩보전을 방불케 한다. 당시 앨버트 부부는 아들의 출산 때문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때마침 간호사가 독립선언서 뭉치를 막 아들을 낳은 부
인의 침대 밑에 숨겼다.
사업가로서 UPI 통신원직을 겸했던 앨버트는 급히 동생(빌)을 불렀다. 동생 빌은 독립선언서를 구두 뒤축에 숨겨놓고는 즉시 도쿄로 떠났다. 앨버트 일가가 전한 3·1운동 소식은 도쿄의 통신망을 통해 전세계에 타전됐다.(메리 테일러의 <호박 목걸이>, 송영달 옮김, 책과함께, 2014에서) AP통신 임시특파원이 된 앨버트는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현장취재해서 타전했다.
“일본 군인들이 소총사격을 퍼부은 다음 교회에 들어가 남은 목숨마저 총칼로 끝장내고…불을 질렀다”는 끔찍한 내용이었다. 또 3·1운동을 이끈 47인 독립투사들의 재판과정을 법정에서 취재한 유일한 서양언론인(동아일보 1920년 7월13일자)이기도 했다.
1923년 앨버트 부부는 은행나무의 400년 자태가 절경인 인왕산 자락의 성곽길에
집을 짓는다. 권율 도원수가 심은 은행나무 동네라는 뜻의 행촌동(杏村洞·사직터널 위) 언덕이었다. 집 이름은 인도 러크나우 지역의 궁전 이름을 따서 ‘딜쿠샤(Dilkusha·사진)’라 했다.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의 힌두어다.
하지만 앨버트가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고, 해방-한국전쟁-자유당 정권을 거치는 동안 ‘언덕 위의 작은 궁전’은 ‘귀신 집’으로 전락했다.
집은 이후 갈곳없는 서민들의 터전이 되었다. 필자가 현장을 둘러보니 앨버트 부부를 매료시켰던 은행나무의 수많은 가지 위에도 까치둥지가 5개나 있다.
어느덧 딜쿠샤 저택이나 은행나무나 둘다 넉넉한 품을 내어주는 둥지가 되었다. 서울시가 2019년까지 딜쿠샤를 원형복원해서 개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반가운 일이다. 12가구에 달하는 무단점유 서민들은 어찌 할른지 자못 관심이 간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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