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북한이 뿌린 삐라가 서울시내 한복판까지 떨어지고 있습니다. 50대 이상 사람들이라면 어릴적에 한 번 쯤은 비라를 주워보았을 것입니다. 삐라를 파출소가 갖다주면 연필 같은 학용품을 주었지요. 옛날 생각이 납니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삐라는 어지러웠던 신라 말기 진성여왕 때 서라벌 시내 한복판에 떨어진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진성여왕이여! 신라여! 망하리라!’하며 저주했던 삐라였습니다. 그후 47년만에 정말로 신라는 망했습니다. 한국전쟁 때도 삐라는 마치 눈처럼 뿌려졌습니다. 미군은 25억~40억장의 삐라를 뿌렸다고 합니다. 전쟁 후에도 삐라의 제작기법은 체제유지를 위한 대중홍보수단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물론 남북한 모두 상대방을 겨냥한 냉전의 수단으로 삐라를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삐라는 왜 그렇게 뿌려대는 것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69회 제목은 ‘삐라, 그것은 적의 마음을 공격하는 종이폭탄’ 입니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하(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888년(진성여왕 2년) 신라의 수도 서라벌 한복판에 ‘삐라(전단지)’가 떨어졌다. <삼국유사>는 “여왕과 측근들의 문란한 정치를 걱정한 나라 사람들이 글을 써서 길 위에 던졌다(書投路上)”고 표현했다. 암호와 같은 주문(呪文)으로 가득찬 이 삐라는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신라여! 진성여왕이여(찰니나제) 각간 위홍(판니판니소판니)을 비롯한 총신 2~3명(우우삼아간)과 여왕의 유모(부이) 등 때문에 망할 것(나무망국)을 빈다.(사바하)”
삐라의 내용을 해독한 진성여왕은 대대적인 범인색출에 나섰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신라는 누군가가 던진 이 삐라의 내용대로 47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당대 신라는 극심한 왕위쟁탈전과 경제혼란으로 망조가 들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서라벌 한복판에 뿌려진 삐라는 신라 백성들의 민심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누군가 삐라를 매개로 벌인 심리전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진성여왕을 겨냥한 최초의 삐라
이렇게 진성여왕과 신라의 망국을 재촉한 삐라는 과연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가. 삐라는 짐작하다시피 전단, 벽보를 뜻하는 ‘빌(Bill)’의 일본어(ビラ)가 경음화한 것이다. 비슷한 표현인 ‘찌라시’는 역시 일본어로 뿌리다는 뜻의 ‘치라스(ちらす)’에서 비롯됐다. 흔히들 삐라를 두고 가장 대표적인 심리전 매체라 일컫는다. 요약하면 총칼과 대포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적의 마음을 공격하는 ‘종이폭탄’이라 할 수 있다. 적의 심금을 후벼파서 싸우지 않고도 무장해제시키는 전술이니 얼마나 효과적인가.
물론 적개심에 불타는 적의 마음을 사로잡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말(중언·衆言)은 쇠라도 녹인다(삭금·삭金)는 성어가 있다. 동양 역사상 불멸의 효자로 알려진 증삼과 어머니의 고사성어가 바로 ‘중언’과 ‘삭금’의 대표적인 예다.
증삼은 공자의 애제자이며, 하루에 세번씩 자신을 반성한다는 삼성오신(三省吾身)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하루는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말을 들은 증삼의 어머니는 꼼짝도 하지 않고 베 짜는 일을 계속했다. 아들이 그럴 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얼마후 다시 어떤 이가 ‘증삼이 살인했다’고 어머니에게 전했다. 역시 어머니는 태연히 베를 짰다. 하지만 세번째로 ‘아들이 살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머니는 담장을 뛰어넘어 달아났다. 진짜 살인자는 증삼과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이었다. 천하의 효자인 아들을 무한신뢰했던 어머니조차도 여러 사람이 의심하자 아들을 불신하게 된 것이다.(<전국책> ‘진책’)
삼인성호(三人成虎)의 성어도 있다. 세 사람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면 거짓이라도 결국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말이다.(<한비자> ‘내저설’)
이렇게 쇠라도 녹일 수 있고, 증삼과 같은 효자의 어머니도 도망가게 만들며, 없는 호랑이도 출몰했다고 믿게 하는…. 이것이 바로 적(상대)의 마음에 불화, 불신, 공포, 무력감 등을 불어넣는 삐라를 비롯한 심리전의 목표라 할 수 있다.
■“적을 삐라로 묻어라!”
첨단 무기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던 현대전에서도 삐라는 심리전의 핵심전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도 뿌려진 6500만 장의 삐라는 새발의 피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한 지중해 및 유럽의 전선에서 무려 80억장의 삐라가 하늘을 뒤덮었다. 당시 세계인구가 20억명 가량이었으므로 유럽에서만 1인당 4장을 살포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때의 한반도는 어땠을까.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으로 시작됐다. 당일 대부분의 한국군과 미군 군사고문단 장병들은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3일 뒤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트루먼 대통령이 미 공군과 해군에 명령한 몇시간 뒤 삐라 살포를 위해 인쇄가 준비됐다. 6월28일 1200만장의 삐라가 살포됐다.”
창졸간에 기습을 당해 경황이 없었는 데도 딱 3일 후에, 그것도 1200만장에 달하는 삐라를 제작했다는 것이다. 미군 극동사령부에 2차대전과 그 이후 일본과 필리핀, 남태평양에서 심리전을 담당했던 조직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미 육군장관인 프랭크 페이스가 던진 한마디가 의미심장했다.
“적을 삐라로 묻어라.”
미 국무부 역시 “적군과 시민들에게 날마다 한 장 씩의 삐라를 전달하라”고 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 뿌려진 삐라의 수는 25억~40억장에 이르렀다. 미극동사령부 자료는 25억장이라 했고, 한국군 심리전감실과 국방부 자료는 40억장이라 했다. 최고 절정기 때의 제작량은 매주 2000만장 이상이었다. 1950년 10월 말이 되면 이미 1억장을 돌파하고, 다음해인 1월26일엔 2억장, 11월16일에는 8억장을 기록했다. 25억장이라 쳐도 그것을 펼치면 한반도를 스무번 뒤덮고 지구를 열바퀴 돌고도 남는 양이다.
삐라는 펄펄 내리는 눈처럼 뿌려졌다. 심할 경우엔 눈처럼 쌓인 삐라가 병사들의 무릎까지 차올랐다고 한다. 공산측도 인쇄기술이 낙후됐고, 제공권까지 빼앗겼지만 그래도 3억장의 삐라를 뿌려댔다. 비록 2차대전 때의 유럽(80억장)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단위면적당으로 계산하면 한반도에 뿌려진 삐라는 가히 천문학적인 양이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목을 잘라오면…’
삐라 가운데서도 투항자들에게 가장 영향을 준 것은 바로 다양한 형태로 제작·살포된 ‘안전보장 증명서’였다. 게중에는 고압적인 내용도 있었다.
‘…중공군의 목을 잘라오는 자는 특별히 환영한다. 4284년 1월 대통령 각하의 의도에 따라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신성모.’
하지만 대부분의 삐라는 부드러운 투항권유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군은 죽음과 삶, 어느 편을 택하겠는가. 운명은 그대 손에 달렸다.’
‘그대는 죽지마라! 살아서 유엔쪽으로 넘어오라!’
‘좋은 음식과 따뜻한 의복과 맛 좋은 담배가 준비돼있다.’
‘진정한 영웅은 죽기보다 살기를 희망한다. 왜냐면 죽은 사람은 조국을 재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진 상관은 부하의 안녕을 생각하는 법이다. 그대는 어데로 그대의 부하를 이끌고 가려는가.’
이런 사탕발림의 문구와 함께 항복의 구체적인 방법과, 그 루트까지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삐라의 효과
‘귀순할 때는 적당한 기회에 부대를 떠날 것, 무기를 파괴 혹은 땅에 묻을 것, 낮에만 유엔군 쪽으로 올 것, 손을 높이 들고 길로만 올 것’ 등이다. 그러면서 귀순자가 이 안전보장증명서를 제시할 경우 유엔군 혹은 한국군이 취해야 할 자세까지 유엔군총사령관의 이름을 걸고 신신당부했다.
“보증서는 북한군 귀순병에게 인도적 대우를 할 것을 보증한다. 이 귀순병사를 곧 상관에게 인도할 것과 명예포로로 대우할 것을 명령한다.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안전보장증명서는 통행증과 귀향증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제작·살포됐다.
‘귀향증을 가지고 오라. 한 장을 가지고 와도 되고 여러사람이 같이 와도 좋으며 한 장도 가지지 못했다면 삐라 뿌린 것을 보고서 귀순하였다고 말하라. 무기는 버리지 말고 등에 매고 오라. 상을 준다. 국군과 경찰은 대한민국의 품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특별히 보호하라. 백야전투사령관 백선엽’
어떤 포로는 투항할 때 무려 13장의 안전보장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삐라들이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존스홉킨스대의 작전연구소는 1950년 9월27일~10월9일 사이 항복한 공산군측 포로 가운데 54%가 삐라와 같은 심리전의 영향을 받았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심리전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 효과 역시 컸음을 알 수 있다.
■돈을 미끼로 던진 삐라의 도덕성 논란
가장 논쟁을 일으킨 삐라작전은 아마도 1953년 초 시작된 ‘물라(Moolah)작전’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마크 클라크는 물라작전을 두고 ’가장 위대한 심리전의 승리’라 했다. 이 작전은 1952년 초 어떤 전쟁 특파원이 술을 마시면서 꺼낸 이야기가 정식 심리작전으로 발전한 것이다. 물라는 돈을 뜻하는 속어이다. 작전명대로 남한으로 소련의 미그기를 가져오는 조종사에게 5만달러를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첫번째 귀순자에게는 5만달러를 추가로 준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이 작전은 사실 안팎의 논란을 일으켰다.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쟁일지언정 거액을 미끼로 귀순을 종용한다는 자체가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귀순해야지, 단순히 돈에 이끌려서야 넘어온다면 그게 무슨 귀순이냐는 것이다. 돈에 팔려 오는 것은 진정한 귀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비도덕적이라 주장했고, 클라크는 보상을 해주는게 훨씬 도덕적이라고 맞섰다. 당연히 소련은 ‘값싼 속임수이며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이 작전은 어쨌든 외견상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1953년 4월27일 미군은 중국어·한국어·러시아어로 된 ‘미그 15기 조종사에 대한 호소’ 삐라는 압록강 유역에 살포했다. 그러자 그후 8일 동안 모든 미그기는 지상에 머물렀다. 5~6월이 됐는데도 소련의 미그-15기 전투기 출격은 21%로 감소했다. 결국 물라 작전 때문에 미그기 조종사들은 한국전쟁을 통틀어 가장 적은 비행횟수를 기록했다. 심리전 전문가인 스테판 피스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미그기 조종사의 이탈을 부채질하는 전략은 북한군에 커다란 부담을 줬고, 가장 필요한 시기에 유엔에 큰 도움을 주었다. 어떤 이들은 비도덕적이라 주장했지만…중국군은 밤낮 구별없는 하늘의 공격으로부터 무방비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전투기를 압록강 지방의 은신처로 이동시켰기 때문이다.”(<한국전에서의 심리전>, 국군심리전단 옮김, 2000)
그러나 물라작전 덕분에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했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개전초부터 줄곧 제공권은 장악한 것은 미군이었기 때문이다. 전쟁내내 북한지역에 융탄폭격을 해댄 것도 역시 미군이었으니까….
■미그 15기의 성능을 알기 위해…
그런데도 미군이 전쟁 막바지인 1953년 4월에 들어 새삼스럽게 이 물라작전을 감행한 이유는 뭘까. 바로 소련의 첨단 무기인 미그 15기를 분해해서 소련공군의 능력을 파악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련의 미그 15기는 미 공군의 전투기보다 성능이 앞선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1953년까지 추락하는 미그 15기가 없었다.
따라서 초조해진 미군이 돈을 미끼로 걸고서라도 미그기를 입수해서 그 성능과 기능을 알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전쟁 중에는 정작 미그15기를 몰고 귀순한 예는 없었다. 전쟁이 끝난지 두 달 만인 1953년 9월21일이 되어서야 귀순자가 생겼다. 북한군 소위 노금석이 미그 15기를 몰고 투항한 것이다. 물라작전 후 첫번째 귀순자가 된 그에게 10만 달러의 포상금이 지급됐다. 하지만 노금석은 ‘돈을 준다’는 삐라 때문에 귀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물라작전이 펼쳐진 53년 4~7월 사이 삐라 살포와는 무관한 만주지역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귀순한 이유는 자유를 향한 갈망 때문이라 했다. 10만달러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 지도 몰랐다고 했다. 진술이 맞다면 노금석의 귀순은 아이젠하워의 주장처럼 이데올로기의 이유, 즉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지 클라크의 주장처럼 돈을 향한 열망이 아니었던 것이다.
■담배말이용 삐라
삐라를 담배 마는 종이의 형식으로 보낸 사례도 있다.
“담배 마는 종이. 우리는 당신들의 공급부대가 담배 말아 피울 종이조차 주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들이 삐라로 담배를 말아 피우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유엔군은 제군들이 담배를 말아 피울 수 있도록 마련한 종이다.”
그러면서 항복권유를 노골적으로 덧붙인다. “유엔수용소에서는 유엔군이 말아놓은 담배만 주고 있으니 제군은 어서 유엔편으로 넘어와 전쟁 없는데서 맘 편히 말아놓은 담배를 피우라”는 것이다.
직접 선물을 투하하는 방법도 썼다. 새해를 맞아 담배 5개, 성냥 1갑, 편지지 6장, 장기판, 달력, 연하장 등을 투명고무방수 가방에 넣어 떨어뜨렸다. 적에게 친밀한 인상을 줘야 한다는 이유였다. 또 “이 가방은 우정으로 당신들에게 주는 것이며, 당신이 유엔으로 넘어오면 훨씬 더 많은 우정을 누릴 것”이라는 내용을 쓴 가방을 투하하기도 했다.
■중국군은 되놈, 소련군은 죽음의 사자
직접 참전한 중국군에게는 오랑캐 혹은 되놈의 낙인이 찍혔다. 청나라 ‘오랑캐’들에게 당했던 병란(병자호란)의 아픔을 상기시키고자 한 것이다.
‘오랑캐란 중공이란 되놈이랍니다. 잔인한 금수들입니다.’
그러면서 고구려의 후손임도 강조했다. “우리는 다 빛나는 역사를 가진 고구려의 후손이며, 선조들은 수십배나 되는 되놈들의 침입을 능히 물리쳤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중국군 병사들에게는 ‘중국은 소련의 대포밥(총알받이)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삐라를 대대적으로 살포했다.
‘중국인은 러시아의 노예가 되다. 마오쩌둥-스탈린이 적어도 한달에 50만의 노예를 보내달라고 한다. 1만명의 중국인이 러시아 노예 노동자가 됐다.’
‘소련 고문단은 창문에서 소련의 개(류샤오치), 소련의 괴뢰(마오쩌둥), 소련의 인형(저우엔라이) 등 꼭두각시를 일렬로 조종하고 있다.’
전쟁의 배후로 지목된 소련의 스탈린은 죽음과 황천의 사자이자 마왕으로 저목됐다. 스탈린의 몸을 상징하는 뱀의 혀 속으로 군인들이 들어가는 그림은 삐라의 단골메뉴였다. 또 소련을 싱징하는 이미지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것은 해골인데, 오른손엔 낫을. 왼손엔 망치를 든 죽음의 사자가 중국군을 무참히 살육하는 그림을 곁들였다.
■김일성, 괴뢰, 꼭두각시, 역도, 매국노…
뭐니뭐니해도 가장 많은 악명을 얻은 이는 바로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이었다.
소련의 앞잡이, 두목, 공비, 비적, 적귀, 역도, 꼭두각시, 괴뢰, 민족반역자, 가짜 김일성, 매국노, 비도, 게릴라, 적도, 인류의 적, 민족의 적, 괴수, 도당, 만고의 역적, 적괴도당, 매국역적, 반역군, 반역도배, 적구, 오열, 모략분자, 참략의 노예, 인종의 적, 세기의 적, 잔인한 마귀, 악당….
사전에 나온 온갖 나쁜 수식어, 아니 사전에는 없는 조어까지 만들어가며 김일성을 마음껏 저주했다.
“김일성은 소련의 앞잡이 심부름꾼이다. 나라와 민족을 소련에 팔아먹고 영원히 종노릇을 시키려고 한다.”
“소련의 허수아비인 김일성은 상전의 비위를 맞춰 그대들을 죽음의 싸움터로 몰아놓고 있다.”
“김일성은 4년 전에 쏘련의 허수아비 정원을 세웠다, 김일성은 크레므린의 피리에 맞춰 춤추고 있다.”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김일성과 그 김일성에게 코뚜레를 끼워 조종하는 스탈린을 그린 삐라도 있다. 김일성 가짜론도 등장했다.
“제일 고약한 것은 이 자가 한국의 위대한 영웅인 김일성으로 거짓 행세한 것이다. 이 자는 절대로 김일성이 아니다. 진정한 김일성은 1885년에 나서 15년에 만주에서 돌아간 분이다. 1910년까지는 이 가짜 김일성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김일성의 침실
특히 한국의 국방부 정훈국이 제작한 포스터와 글은 김일성을 머리에 뿔이 달려있고, 온몸에 털이 감싸고 있는 짐승으로 그려졌다. 구렁이나 쥐새끼, 승냥이, 털달린 짐승의 손과 해골 등의 이미지도 많았다. 전쟁 후에도 김일성과 북한군은 뱀, 늑대, 여우, 이리, 돼지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50대 이후의 사람들은 지금도 붉은 옷을 입고 탐욕스런 돼지가 김일성 수령으로 등장하고 그 수하들이 여우와 늑대로 묘사된 반공만화를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게다가 따발총을 들고 감시하는 괴뢰군 사이로 힘겹게 일하는 북한 동포들의 모습까지…. 1970년대까지 은밀하게 돌았던 ‘김일성의 침실’ 만화도 기억할 수 있다. 김일성의 문란한 사생활을 그린 만화를 돌려보곤 했던 그런 시절….
이렇게 한국 사회에 형성된 ‘뿔 달린 김일성’의 이미지와 ‘레드 콤플렉스’는 그렇게 한국전쟁 때 뿌려진 삐라의 그림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간 당하는 여성들
삐라는 또 소련이나 중국군을 ‘She’나 ‘her’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제국주의가 시작할 때부터 제국주의자들의 정복은 강간으로 묘사됐다. 때문에 지배국은 남성, 식민지는 여성으로 치부됐으며, 문명국은 남성, 야만국은 여성으로 표현됐다. 삐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적국과 적국 군인, 적국 백성들은 여성으로 표기됐다. 따지고보면 미국은 소련을 뱀으로 폄훼했는데, 따지고보면 뱀은 이브와 함께 모든 죄악의 출발점이 아닌가.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명약관화하다.
죄없는 여성들을 강간하는 적군의 사악함을 고발하는 삐라도 있었다.
“친구의 안부를 전하려 친구 집을 방문한 (북한군) 소대장이 여인의 울음소리와 고함소리를 들었다. ‘사람살류!’ 문구멍으로 들여다보니 중공군 병사가 친구의 아내를 강간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이 순간 한국인의 진정한 적이 중공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강간 당하는 아내와 누이의 모습을 노랑색 바탕으로 묘사한, 가장 일반적인 삐라도 제작 살포됐다. 물론 공산측도 비슷한 삐라를 뿌렸다.
‘어머니 엄마. 우리 엄마 누가 죽였나. 미국 강도의 비행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원통하게 죽어간 조선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원한을 풀자.’
‘당신들은 동족상잔의 무의미한 전선에서 죽고 있는 동안에 미국놈들은 당신들의 가정을 파괴하고 당신들의 어머니 누이와 부인을 롱락하고 있다.’
‘조선사람이라면 조선의 어머니와 어린이들이 당하는 이 불행을 보고 응당 량심에 찔릴 것이 아닌가. 눈이 있거든 이 처참한 상태를 보라.“
■‘뿔달린 도깨비’ 김일성
삐라를 제작하면서 주로 썼던 기법은 어둠과 빛, 결박과 자유, 죽음과 부활, 부패와 재생 따위의 이분법이었다.
예컨대 헝겊모자를 쓴 공산군과 철모를 쓴 유엔군, 자유로운 대한민국과 철의 장막에다 인민을 쇠사슬로 묶어둔 공산세계, 가는 곳마다 원조받는 국군과 원조없이 개주검 당하는 공산군을 삐라 한장에 극명하게 대비시켜 놓았다. 이같은 이분법은 1970년대 유신체제를 홍보할 때도 그대로 답습됐다. 지금도 50대 이상의 사람들이라면 신동우 화백의 그림을 기억할 것이다. 유신체제에 순응하면 광명과 번영이 기다리는 반면, 반대하면 해골이 가득한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던 포스터를….
이처럼 삐라의 형식은 전쟁이 끝났지만 체제유지를 위한 대중계몽도구로 활용됐다. 특히 삐라의 대본이 가장 효과적으로 재생산된 곳은 바로 학교였다.
“북쪽으로 갔던 곰과 당나귀가 달려왔습니다. 곰과 당나귀들은 이리를 붙잡아 묶어놓고 말했습니다. ‘이놈 나쁜 놈 북쪽 마을에 가니 먹을 것도 없더라. 죽도록 일만 시키더라. 말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더라’. 이 이야기를 듣고 소가 점잖게 말했습니다. ‘이 이리말에 속은 당신들도 잘못이요. 남의 말에 속아 큰일납니다. 이제는 속지맙시다. 나쁜 말도 터뜨리지 맙시다.’”(<도덕> 1963년 1-2)
이밖에도 이리가 오리를 끌고 가거나, 총 든 공산당이 사람을 위협하거나 물건을 빼앗아가는 장면들은 도덕교과서(1962년판)에 등장한다. 지금 이 순간까지 북한과 김일성을 연상하면 이리나 승냥이 돼지가 떠
오르는 것은 바로 이 어릴 적 받았던 교육 때문이리라.
■삐라를 보기만 해도 눈이 먼다
삐라는 최첨단 전자무기가 경쟁하는 요즘의 시대에도 유효한 심리전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총알 한발, 폭탄 한발 대신 ‘적의 마음을 쏘는 매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북한은 특히 삐라(대북전단) 살포 등의 심리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건 것이 바로 삐라 살포 등 심리전의 중단이었다.
1998년 북한 인민무력부는 ‘면전 심리전의 검은 내막’이라는 영상물을 제작하여 전 인민군과 주민들에게 특별교육을 시켰다. 영상물의 내용이 흥미롭다.
“남쪽에서 보내는 삐라와 함께 투하된 라면 및 일용품 등에는 세균으로 오염돼있다. 방사선 처리를 하였기에 보기만 해도 1~2년 후에는 눈이 먼다. 접촉한 피부는 피부암에 걸리고 먹으면 장이 꼬여 죽는다.”
요즘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다시 삐라가 살포되고 있다. 남한의 극우세력은 물론 북한도 대대적인 삐라살포에 나섰다. 경기도 전역과 서울 시내 한 복판에도 한번에 수 만 장의 삐라가 뿌려졌다. 파주 교하에 사는 필자도 최근에 북한이 보낸 삐라 몇 장을 주웠다. 하지만 삐라를 읽고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SNS로 일상의 모든 삶이 생중계될 정도의 사회라면 삐라로 적의 마음을 쏘겠다는 따위의 전술은 헛수고가 아닐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 및 사진 자료>
이임하, <적을 삐라로 묻어라-한국전쟁기 미국의 심리전>, 철수와 영희. 2012
박기준 이윤규 장유정 권혁희 등, <보이지 않는 전쟁, 삐라>, 청계천문화관, 2010 등
'흔적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민MC 유재석이 SNS 안하는 이유 (0) | 2016.02.26 |
---|---|
딜쿠샤와 은행나무 (0) | 2016.02.26 |
조선의 임금들도 순식간에 잿더미 되다 (0) | 2015.12.29 |
세종이 고려임금의 어진을 불태운 까닭은 (5) | 2015.12.29 |
기황후, '고려판 한류' 열풍의 주역 (4) | 2015.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