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규문(閨門·부녀자들이 거처하는 곳) 안의 일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은 여사(女史)가 없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깊은 궁궐에서 거처하므로 그 하는 일을 바깥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중종 14년(1519년), 동지사 김안국과 장령 기준 등이 잇달아 임금에게 아뢴다.
“따라서 여사가 있으면 비록 구중궁궐 속, 혼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라도 소홀히 넘어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여사를 두어 그 선악을 기록하게 하면….”
무슨 말인가. 신하들이 말하는 ‘여사(女史)’란 ‘여자 사관’을 일컫는다. 중국에서 ‘여사’의 역사는 뿌리깊다.
<주관(周官)>은 “천관(이조)에 속한 관직으로 왕후의 예직을 주관했고,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했다. 한나라 때에도 왕후의 일을 기록하고, 자문역까지 담당하는 여사가 있었다.(<두우통전>)
■중종이 말꼬리를 돌린 까닭
중종의 신하들은 바로 이 대목을 들어 “여사가 있어야 구중궁궐에서 일어나는 임금의 사생활을 빠짐없이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마디로 일과시간은 물론 은밀한 사생활까지,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서에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으로서는 귀찮기 이를 때 없는 간언이었다.
“옛날엔 여자들이 모두 글을 지을 줄 알았지만 지금은 글에 능한 여자가 없으니 기록할만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울텐데….”
중종은 하기 싫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하지만 김안국 등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사가 반드시 글에 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보는 그대로만 기록하는 수준이면 됩니다. 그러면 후대의 사람들이 ‘아! 선왕이 사생활 공간에서도 잘못한 바가 없었구나’ 하고 느낄 겁니다. 밖에는 시종과 사관을 두고 있으면서 안(규문)에서는 여자 사관이 없으니, 이는 정치의 도에서 큰 결격사유 입니다.”
시강관 이청은 한술 더 떴다.
“언문(諺文)으로 기록해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꼭 문자(文字·한문)으로만 기록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쯤되니 임금의 논리가 몹시 군색해졌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여자 사관도 선악을 구별해서 기록해야 햔다. 그러니 반드시 마음이 올바른 여자라야 할 수 있다.(必正之女 然後可而) 사필(史筆)은 아무나 잡는 것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불현듯 가요 가사 생각이 난다. 남진의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라는 노래가…. 신하들의 집요한 공세에 중종은 그만 “마음이 올바른 여자라야 여사를 할 수 있다”는 실언을 하고 만 것이다. 지금이라면 ‘남녀차별 발언’이라고 공격받을 일이다. 신하들이 “여사는 규중 안에서 임금의 일상생활을 기록할 뿐”이라고 계속 고집을 피우자, 화제를 돌려버린다. 엉뚱한 얘기를 꺼내면서 되레 신하들을 꾸짖는다.
“그런데 어진 이를 천거하는 것이 대신의 직임이거늘, 최근 대신들은 소임을 다하지 않는 것 같구나.”
곤란하니까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로 화살을 피한 것이다. 신하들은 여자사관을 두는 문제를 이후에도 끈질기게 제기했다. 하지만 ‘사생활 침해’를 우려한 임금의 반대에 번번이 벽에 부딪쳤다. 그런데 중종이 누구신가. ‘여사’ 논란이 일기 11년전인 1508년 승정원과 예문관에 뜻깊은 선물을 내린 분이 아닌가. 붓 40자루와 먹 20홀을…. 그러면서 “이 붓과 먹으로 모든 나의 과실을 숨김없이 마음껏 쓰도록 하라.(以是筆墨 凡吾過失 百書無隱)”고 했다.
그랬던 분이 막상 여사논란이 일자 마음을 바꾼 것이다. 하기야 임금의 일거수일투족, 즉 은밀한 사생활까지 빠짐없이 쓰겠다는 것이니 어느 임금이 좋아할까.
■지독한 직필 삼형제
대대로 임금이 사관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역사가의 기본자세는 공자가 춘추를 쓰면서 견지했다는 ‘춘추필법’이다, 즉 객관적이면서도 엄정한 비판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 것이다. 특히 옳고 그름을 엄정하게 가리는 ‘포폄(褒貶)’은 춘추필법의 정신이다. 직필의 모범사례를 하나만 꼽아보자.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장공 6년(기원전 586)의 일이다. 호색한인 장공은 신하 최저의 부인을 유혹하다가 그만 최저에게 살해 당했다. 최저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런데 제나라 사관은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崔저弑莊公)”고 기록했다. 최저는 사관을 죽였다. 그러자 사관의 동생이 나타나 다시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썼다. 최저는 동생까지 죽였다. 이번에는 사관의 막내동생이 나와 역시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천하의 최저라도 막내동생 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지독한 직필 삼형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전통이 있으니 역대 임금들도 끈질기에 따라붙는 사관을 몹시 싫어했다.
1401(태종 1년), 임금이 편전에서 정사를 펼치는데 사관 민인생이 들어왔다. 임금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다. 그러니 편전에는 들어오지 마라.”
민인생은 한치의 거리낌이 없었다.
“편전이라 하지만, 대신들이 정사를 아뢰고, 강론을 펼치는 곳인데 사관이 들어오지 못하면 어떻게 기록한단 말입니까.”
그러면서….
“신이 만일 곧게 기록하지 않는다면, 신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
즉 “사관 위에는 하늘이 지켜보고 있으니 곧게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직필의 역사가가 아닌가.
태종이 누구인가. 1, 2차 왕자의 난으로 엄청난 피를 묻히고 막 왕위에 오른 무시무시한 임금이 아닌가. 그런 태종도 민인생 같은 사관에게는 고양이 앞에 쥐였다. 태종 4년(1404) 임금이 노루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일어서면서 곧바로 했다는 말이 기가 막힌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태종실록>)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도 역사를 두려워했다.
“임금이 두려워 한 것은 사서 뿐이다.(人君所畏者 史而己)”
바로 연산군이 한 말이다. 하지만 역사를 두려워 한 것은 좋았는데, 그만 역사를 감추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연산군의 다음 말을 보면 기가 찬다.
“사관은 시정만 기록해야지 임금의 일(사생활)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근래 사관들은 임금의 일이라면 남김없이 기록하려 들면서 아랫사람의 일은 감춰서 쓰지 않으니 그 죄 또한 크다. ~이제 사관에서 임금의 일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니 아예 역사가 없는 편이 낫다.”
역사가 무서우니 아예 없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앉아서 기록하렵니다.’
1489년(성종 20년) 8월27일 조정에서 재미있는 논쟁이 벌어진다. 검열 이주가 아뢴다.
“저희(사관)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그러니 목소리만 듣고 용모를 보지 못하니 사람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옛 역사서를 보면 ‘발연히 얼굴빛이 변했다’, ‘용모가 태연자약하다’,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성색(聲色)이 모두 노기를 띠었다’는 등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주의 말은 “옛 사관들은 용색(容色)과 언모(言貌)를 모두 기록했는데 조선의 사관들은 땅에 엎드려 기록하니 매우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럼 서서 기록하겠다는 말이냐?”(성종)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중국의 사관들은 지필을 잡고 황제의 좌우에 선다고 했습니다만…. 땅바닥에 엎드려 기록하는 것은 옳지않다고 봅니다.”(이주)
대신들은 설왕설래했다.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기록하는 것도 버릇없는 짓이라는 주장과. 엎드려서는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그래? 그러면 앉아서 기록하도록 하여라”
임금은 나름대로 묘안을 짜낸 것이다. 이 때부터 사관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사관을 싫어한’ 성군 세종
“두려운 것은 역사 뿐”이라는 연산군의 말처럼 역대 임금들은 사관의 평가를 몹시 두려워했다.
그랬으니 사관이 대체 무슨 평가를 내렸는지, 또 내리고 있는지 보고 싶어 하고, 또 고치고 싶어했다. 태조 이성계가 대표적이었다.
1398년 윤5월1일, 태조는 “왕위에 오른 때부터 이후의 사초를 바치게 하라”고 서슬퍼런 명령을 내린다. 그러면서 “군주가 당대의 역사기록을 보지 못하는 것근 무슨 이유인가”라고 물었다. 도승지 문화가 대답했다.
“역사는 사실대로 써야 합니다. 만약 대신과 군주가 보게 된다면 사관은 숨기고 꺼려해서 사실대로 바로 쓰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태조의 명은 거역할 수 없었다. “임금이 보겠다는데 사관이 거역한다면 이는 신하의 도리가 아닐 것”이라며 “빨리 사고를 열어 사초를 남김없이 바치라”고 명했다. 사실 사초에 관한한 태조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사연은 이렇다.
조선개국 직후 개국공신 조준이 고려왕조의 사초를 읽어보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려말 사관인 이행이 “(고려의) 우왕과 창왕을 죽인 자는 바로 이성계”라고 지목한 사초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성계로서는 정통성에 큰 흠집으로 남을 기사가 역사(고려사)에 남을 뻔 한 것이다. 만약 고려왕조가 지탱되었다면 이성계는 왕을 2명이나 죽인 패륜의 대역죄인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이런 가슴 철렁한 기억을 간직했던 태조 이성계였기에 사관들의 사초를 일일이 검열한다고 나선 것이다.
최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통에 일가견이 있다는 세종이었지만 몇몇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는 윤대(輪對)에는 사관의 입시를 불허했다. 이에 1425년(세종 7년) 사간원은 “윤대할 때 반드시 사관을 참여시키도록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말년에는(세종 28년·1446)에는 영의정 황희를 비롯해 우의정 하연·우찬성 김종서·우참찬 정분 등을 비밀리에 불러 정사를 논의했다. 물론 사관의 참여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관 정신석이 “사관이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의했지만 “피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며 일축했다. 즉 세종은 정사를 의논할 때 제일 먼저 사관을 물리쳤으며, 이로써 사관은 한마디도 못했다.
■역사는 3대 후에 써야
선왕이 죽으면 곧바로 실록을 편찬하는 전통도 두고두고 도마에 올랐다. 예컨대 태조 이성계의 실록은 태종 13년에 완성됐다.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은 세종 때 편찬됐다. 이것은 곧 곡필·직필 논쟁의 씨앗을 뿌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태종 9년(1409) 임금은 하윤에게 <태조실록>을 편찬하도록 명했다. 편찬작업은 일사분란하게 이뤄졌다. 곧바로 변계량·유관 등이 참여한 일종의 편찬위원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말단 기사관(정6~정9품)이 제동을 걸었다.
“예전 역사서를 보면 3대 후에 썼습니다. 전조(고려)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여러 편찬위원들님들은 상소를 올려 중단하지 않나요?”
편찬위원들이 머쓱해졌다. 하지만 서슬퍼런 태종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럼 당신(기사관)이 한 번 아뢰보시오.”
전형적인 책임회피 발언이다. 어쩔 수 없었다. 가슴 답답한 말단 기사관이 드디어 영춘추관사(춘추관장·국사편찬위원장) 하륜에게 직언했다.
“태조의 구신(舊臣)이 태조의 실록을 펴내면 후세에 반드시 논란거리가 됩니다.”
한마디로 태조 때 출세한 대신들이 자기들 입맛으로 쓴 역사를 후세에 어느 누가 믿겠냐는 것이었다. 하륜이 짜증을 부렸다.
“아니 그러면 일개 사관이 어떻게 다 사실(史實)을 알겠소? 마땅히 경험 많은 늙은 신하가 죽지 않았을 때 본말을 갖추어 실록을 만들어야 하오.”
<태조실록> 편찬시기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자 태종이 한마디 쏘아부쳤다.
“3대가 지나야 한다고? 왕씨의 일은 이씨가 편찬하고, 이씨의 일은 후대에 편수해야 한다는 말이냐?”
경연사관 우승범이 대답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태조부터 성상(태종)까지 3대라고는 하지만 겨우 18년의 일이잖습니까? 더구나 실록에는 편찬을 맡은 신하의 이야기도 있을 텐데 공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같은 때의 신하가 당대의 인물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황희 정승 역시 “사초는 반드시 3대가 지난 뒤에 나와야 하는 것”이라면서 실록편찬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러나 임금이 고집을 피우니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태조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를 모으는 일이었다. 사관들은 당대의 인물을 평가한 사초가 혹 피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선뜻 자신들이 쓴 사초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사초를 바치지 않는 사관들에게 금고(禁固·자손들을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게 함)와 은 30냥의 벌금 처분을 내리기까지 했다.
■실록을 보고싶은 임금들
사초는 물론 막 제작된 실록을 굳이 보려는 임금들의 마음도 한결 같았다.
세종은 편찬을 끝낸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을 보려다가 신하들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예컨대 1425년(세종 7년) 임금이 <태조실록>을 보고싶어 꼼수를 쓴다.
“<태조실록>은 한 책만 있으니 나중에 잃어버리면 큰 일이다. 한 책을 더 베겨서 춘추관에 납본하고 한 책은 내가 항상 볼 수 있도록 하라.”
하지만 변계량이 일축한다.
“<태조실록>에는 비밀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복사해서 여러 사람이 보게하면 안됩니다. 좋은 날을 받아서 사고에 넣게 하소서.”
실록을 엿보려는 세종의 욕심은 그치지 않았다. 1438년, 세종이 이번에는 “<태종실록>을 좀 봐야겠다”고 운을 땠다. 황희와 신개 등이 얼굴색을 바꿨다.(1438년)
“안됩니다. 역사서(사기)를 보면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게 됩니다. 사관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면 여러 신하들은 임금의 뜻에만 따르게 됩니다. 그럴 경우 천년 뒤에는 무엇을 믿겠습니까.”
세종은 신하들의 서슬퍼런 고집에 뜻을 꺾고 말았다. 1477년, 이번에는 성종이 은근슬쩍 신하들을 떠본다.
“<실록>을 가져다 보면 어떤가?”
우승지 손순효가 득달같이 “아니되옵니다”고 아룄다.
“잘못입니다. 그 경우 역사를 ‘사실대로’ 직서(直書)하지 못하여 선악(善惡)이 없게 됩니다.”
성종이 입맛을 다시며 포기했다.
“사관(史官)이 정도(正道)를 지킨다면 마땅히 ‘사실대로’ 직서해야지. 그러나 어떻든 임금이 보는 것은 참으로 잘못이로구나.”
■사초실명제가 뿌린 재앙의 씨앗
1469년 즉위한 예종은 <세조실록> 을 편찬하면서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쓰라고 명했다.
“사초에 이름을 쓰면 사관이 직필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다. 장계이가 “안된다”고 직간했다.
“역사는 본디 직필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초는 국가의 일만 기록한 게 아니라 사대부의 선악과 득실을 모두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초에 실명을 기록한다면 사람들의 원망을 얻을까 염려하게 됩니다, 이로써 직필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논란 끝에 이 의견은 기각됐다. 이른바 ‘사초실명제’를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제도가 장계이의 걱정대로 피바람을 불렀다.
사관 가운데 민수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사초를 쓰면서 대신들의 인물평을 적어놨다. 게중에는 특정 인물들을 혹평한 일이 많았다. 문제는 혹평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내로라는 대신들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윤사흔(尹士昕)은 술에 취하고, 임원준(任元濬)은 의술(醫術)로 관직(官職)을 임명받고, 양성지(梁誠之)는 탐오(貪汚)한 일이 있고….” 등등.
만약 당사자들이 이 인물평을 안다면 대신(大臣)들에게 원망을 살까 두려웠다. 민수는 드디어 동료 사관 강치성·원숙강 등과 함께 사초를 뽑아내 문제의 내용을 삭제·수정했다. 민수가 수정한 내용 중 대표적인 두가지만 꼽아보자. 먼저 민수는 춘추관 당상 양성지를 평가한 사초의 내용이다.
“사헌부 관헌이 옥사를 다스리다가 모두 좌천됐다.~대사헌 양성지는 홀로 구용(苟容)되어 그 일에 관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대로 재직했다.(司憲府員 以治獄 皆左遷~大司憲梁誠之 獨以苟容不與其事 仍在職)”
■‘사서의 한 글자는 부월보다 엄하다’
‘구용’, 즉 ‘구차하게 용서 받았다’ 혹은 ‘구차하게 용서를 빌었다’는 뜻이다. 당시 춘추관 당상이 된 양성지가 안다면 큰 일이었다. 민수는 바로 이 ‘구용’이라는 단어를 삭제했다. 또 하나만 더 예를 든다면 인산군 홍윤성을 평가한 대목이다.
“홍윤성(洪允成)이 부친상 도중 기복(起復·삼년상이 지나기 전에 다시 벼슬에 임명하던 제도)되어 함길도 절제사가 되었다. 그 때 한 집에서 잠을 자니, 그 집 주인이 처녀를 간통했다고 고소했다. 홍윤성을 조사했는데 그 집주인은 무고죄로 처벌받았으며, 처녀는 홍윤성이 데리고 살았다.(洪允成 居父喪起復 爲咸吉道節制使 其時嘗至一家宿 其家人奸我處女 發訴下允成獄推之 其家人坐誣訴 竟爲允成所畜)”
민수는 이 사초내용 중 ‘거(居)~시(時)’까지 삭제하고, ‘승취(乘醉)’ 2자를 추가했다. 또 ‘좌(坐)~축(畜)’까지 지워버렸다. 즉 ‘부친상 중에 다시 관직을 맡은’ 내용을 지우고. ‘술에 취해(乘醉)’ 우발적으로 간통을 저질렀다고 첨가한 것이다. 또한 ‘집주인이 무고죄로 처벌받았고, 처녀는 홍윤성이 데리고 살았다’는 내용도 지웠다. 결국 ‘상중에 처녀를 간통하고. 그 처녀의 아비를 무고죄로 처벌시켰으며, 마침내는 그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내용을 첨삭한 것이다.
이렇게 사초를 수정한 것이 발각되자 문제의 민수는 제주 관노로 쫓겨났다. 민수는 임금(예종)의 세자시절 교육을 맡았던 서연관(書筵官)이었다. 즉 예종의 스승이었으니 극형을 면한 것이다. 그러나 민수에게 사초를 건네준 강치성과 원숙강은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를 ‘민수 사옥’이라 한다.
따지고 보면 몇몇 신하의 인물평을 슬쩍 고친 것에 불과한 것 치고는 너무 심한 벌을 받은 것은 아닌가. 하지만 중종 때 예문관 관리들이 올린 상소를 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역사가 있은 뒤에 시비가 밝혀졌으며, 시비가 밝혀지자 공론(公論)이 사라지지 않았다 합니다.~ 그러므로 한 글자의 포폄(褒貶·평가)이 부월(斧鉞·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말)보다도 엄하고, 만세의 경계됨이 별이나 햇빛보다도 밝았습니다. 그러니 사관의 직책이 너무도 중하지 않습니까?”
■사초를 불태우고 도망간 한심한 사관들
물론 지극히 한심한 사관들도 있었다. 그 참담한 역사를 똑똑히 기록해야 할 사관들이 피란길에 오른 임금(선조)를 버리고 도망을 친 것이다. 1592년6월1일 <선조실록>의 기사를 보자.
“사관 조존세·김선여·임취정·박정현 등이 도망갔다. 상(선조)은 좌우 사관인 이들을 자식들처럼 예뻐했다. 그런데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갈 것을 결정하자 도망칠 것을 의논한 뒤 먼저 사초책을 구덩이에 넣고 불을 태운 뒤 어둠을 틈 타 도망쳤다. 새벽이 되어서야 사실을 알고는 모두 사색이 참담했다. 모든 이가 격분하기를 ‘뒷날 상(임금)이 환국하면 이 무리들은 살아남지 못하리라’ 했다.”
영·호남에서 가족들을 찾은 그들은 “전하는 어찌해서 왔느냐”는 주변의 의구심에 “주상전하가 돌아가라고 해서 왔다”고 거짓말을 쳤다.
사실 국난에 빠진 임금을 팽개치고 심지어 사초까지 불태우고 도망친 이들은 극형을 받아 마땅했다. 이들의 죄에 비하면 사초 좀 고쳤다고 참형을 받은 ‘민수 사옥’의 희생자들은 손톱 만큼의 죄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네 사람은 모두 이산해의 문하생으로 명문가의 세신(世臣)들이었다. 그런 탓일까. 국난이 끝났어도 이들을 정죄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선조실록>을 보면 오히려 네 사람의 복직 문제가 잇달아 불거진다.
1601년(선조 34년) 임진난 때 사초를 불태우고 도망간 박정현이 중국에 갈 사신으로 추천됐다. 그러자 선조임금이 짜증을 부린다.
“박정현은 임진란 때 임금을 버리고 사책을 불지르고 도망간 자이다. 이제 명을 받들고 다가가 중도에서 도망치게 하려는가. 중국 땅을 더럽히고 말 것이다. 또 병란 때는 임금을 배신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관직을 가졌으니, 진신(搢紳)의 수치스러움이 극에 달했다 할 것이다. 공론(公論)은 어디로 갔는가.”
이미 문제의 인물 중 김선여를 홍문관 후보명부에 올린 것을 괘씸하게 생각했던 터였다. 선조는 “도대체 권선징악의 법도도 없다는 말이냐”고 한탄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대신들은 불과 3개월 뒤 다시 ‘도망 4인방’의 복직을 간언한다.(1601년7월1일) 그나마 대신들이 남아있는 임진란 당시의 사초를 정리할 적임자로 ‘도망 4인방’을 추천한 것이다. 그러자 선조는 단칼에 일축한다.
“조존세·김선여 등은 사초를 버리고 도망한 자들이다. 다시 이런 무리에게 역사의 수정을 맡겨 국사(國史)를 욕되게 할 수 없다.”(<선조실록>)
사실 ‘도망 4인방’의 으뜸 가는 죄는 사초를 불태운 죄였다. 당대의 학자 신흠(申欽)은 <상촌휘언(象村彙言)>에서 “임난 당시 사관들이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도망갔기 때문에 선조가 즉위한 후 임란이 일어나기까지 25년간의 사적이 깜깜하게 됐다”고 썼다.
역사를 불태운 죄, 그 죄값을 받아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도리어 ‘도망 4인방’ 가운데 임취정은 형조참의로(광해군 5년), 박정현은 사은사(인조3년)로 임명됐다. 이들의 생명력은 참으로 질겼던 것이다. 하지만 <실록>을 쓰는 사관의 냉엄한 평가마저 피해갈 수는 없었다.
“임취정은~왜적의 선봉이 가깝게 오는 것을 보고~ 김선여·조존세·박정현 등과 함께 사초를 태우고 밤에 도망쳤다. (그러나) 이이첨의 세력이 융성하자 드디어 조존세와 더불어 현직에 등용됐다. 임취정 형(임수정)의 첩의 딸이 후궁에 들어가~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로써 임취정은 승지가 됐다.”
“박정현은~ 임진년에~기사초(記事草)를 불태워버리고 밤을 틈타 도망하였는데~ 오늘날 표문을 받들고 천조(중국)에 가는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인조실록> 1625년 3월 22일)
이를 보면 늘 ‘역사’를 무서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사를 회피하려는 자는 사가의 ‘춘추필법’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천하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 했다지 않은가. 또 하나. 사마천은 불후의 역사서 <사기>를 쓴 까닭을 말했다.
“지난 날을 서술하여 미래에 희망을 걸어본다.(故述往事 思來者)”
역사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미래사의 거울이라는 말이다.
|경향신문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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