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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한국전쟁, 원자폭탄 불바다 될 뻔한...

 “군사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모든 행동을 취할 겁니다.”
 1950년 11월30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애매모호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눈치 빠른 기자들이 대통령의 발언을 파고 들었다.
 “그 모든 행동에는 원자탄도 포함됩니까.”(<뉴욕데일리 뉴스>의 젝 도터 기자)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무기가 포함됩니다.”(트루먼)
 “그 말은 핵무기 사용을 적극 고려한다는 말입니까.”(<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폴 리치 기자)
 “핵무기 사용에 대해선 항상 적극적인 고려가 있었습니다.” 

미 극동군사령부가 1951년 9월15일 작성한 원자폭탄 가상표적. 강원 평강이 표적이었다, 자칫했으면 불바다가 될 뻔했다. 미국은 중국군이 전면개입하자 한반도와 중국 만주 등에 원자폭탄의 투하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평강엔  10여 차례 용암이 분출한 오리산과 검불랑 등 휴화산이 2개나 있다.  

■트루먼, 판도라의 상자를 만지작거리다
 무슨 말인가. 한국전쟁 승리를 목전에 두고 생각지도 못한 중국군의 개입으로 당황한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함으로서 반전을 노린다는 뜻이 아닌가.
 하기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중국군의 개입으로 패닉에 빠졌다. 미국은 사실 중국의 대규모 참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유엔군은 ‘크리스마스는 고향 땅에서’라는 구호를 흥얼거리며 승전무드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10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국경을 넘어오기 시작한 중국군은 11월까지 30만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유엔군은 주로 산악지대를 이용한 야간행군으로 남하하는 중국군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중국군은 은밀히 유엔군을 포위한 뒤 뿔피리와 나발을 불고 꽹과리를 치면서 밀집대형으로 전진하는 인해전술을 펼쳤다. 유엔군으로서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전술에 혼비백산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긴급 기자회견을 연 11월30~12월1일 사이 유엔군의 인명피해는 1만1000여 명에 이르렀다. 미군 2사단은 병력의 절반인 6380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터키여단은 5600명 가운데 1000명을 잃었다.(조지프 굴든, <한국전쟁>, 김쾌상 옮김, 일월서각, 1982)
 미국 언론은 중국군이 미 10군단과 8군을 포위·협공하는 전황도를 1면 기사로 보여주며 연일 패전소식을 전했다. <뉴스위크>는 ‘진주만 이래 미국의 가장 큰 참패’라고 했고, <타임>은 ‘패전-미국이 겪었던 것 중 가장 비참한 참패’라 했다.
 사실 미국은 개전 때부터 핵무기 사용 여부에 계속 연구하고 있었다. 트루먼이 기자회견을 열기 이틀전인 11월28일, 랄로 합동참모본부 국장은 합동전략조사위원회에 “사용할 수 있는 원자폭탄의 숫자와 표적지, 수송 등’ 고려할 수 있는 사항을 검토해달라”고 요구했다. 이튿날인 29일 합동전략조사위는 “유엔군이 한국에서 압도되는 것을 목기 위해 핵무기의 운영이 필요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전망하고 “결심은 최고위층이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인 30일 트루먼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을 시사한 발언은 이런 심각하고도 긴박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강원 철원 동주산성에서 바라본 평강고원. 바로 앞 쪽의 평원은 철원이고, 휴전선 저 멀리 지대가 높은 곳이 평강고원이다. 가운데 야트막한 산이 오리산이다.   

 ■경악한 서유럽, “3차대전 발발한다.”
 트루먼의 발언은 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벌집을 쑤셔놓은 격이 됐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원자폭탄을 터뜨린다면 소련을 자극해서 제3차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닌가. 당장 유럽언론은 ‘충격과 분노(Shock and outrage)’라는 표현을 쓰면서 워싱턴을 비난했다.
 특히나 영국의 집권 노동당 의원 100명은 애틀리 총리에게 “어떤 경우에든 핵무기 사용은 반대한다”고 서명한 편지를 보냈다. 의회는 애틀리 총리와 트루먼 대통령과의 긴급회담이 성사되고, 애틀리가 트루먼을 반드시 설득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겨우 해산했다. 서유럽 대사들은 트루먼의 발언 직후 득달같이 미국의 오스틴 유엔대사를 찾아갔다. 네덜란드 대사는 눈물까지 머금으면서 “미국이 매우 어렵고 불리한 시기에 아시아에서 일어난 전쟁을 서유럽으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트루먼의 핵발언을 비난했다.
 트루먼과의 회담을 합의한 영국 애틀리 총리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비공산권 국가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트루먼과의 회담에 나서야 하는 엄청난 역할을 맡게된 것이다. 프랑스 르네 플레망 총리와 로베르 슈망 외무장관이 급거 영국을 방문했다. 네덜란드 관리들도 영국 외무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영연방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도의 네루 총리는 “한국전쟁에서 대만을 참전시키거나 원자폭탄을 사용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주장했다. 극우친미 성향이던 호주의 퍼시 스펜더 외무장관 조차도 “핵무기는 완전한 합의를 거친 후에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12월4일부터 열린 애틀리-트루먼의 역사적인 회담은 ‘핵무기가 사용될 작전사항이라면 언제든 영국 총리에게 미리 알린다”는 구두합의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트루먼의 원자폭탄 사용발언은 엄청난 충격파를 던진채 10일 만에 일단락된 것 같았다.(월리엄 스톡, <한국전쟁의 국제사>, 김형인·김남균·조성규·김재민 공역, 푸른역사, 1995) 

끊어진 금강산 전기철도. 철원군 김회읍 도창리와 갈말읍 정연리 경계에 있다. 한국전쟁 당시 정연리는 강원 평창군에 속해 있었다. 

■달콤한 원자탄의 유혹
 하지만 원자폭탄의 유혹은 달콤했다. 한국전쟁 내내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잘하면 한 방에 전쟁을 끝낼 수 있지 않는가. 미국은 전쟁 내내 ‘원자탄 카드’를 만지작 만지작거렸다. 사실 한국전쟁 당시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전력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1950년대 말 미국은 원자탄 369개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소련은 단 5개 정도만 갖고 있었으니까….
 ‘1951년 4월부터 10월까지’가 가장 위험했다. 소련이 항공기와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군사개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보보고서가 트루먼에게 보고됐다. 이 시기는 또 중국이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만주지역에 집결시킨 때였다. 이 때 트루먼은 ‘정말로’ 원자폭탄의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4월5일 미 함참은 새로운 대규모 중국군 병력이 전선에 투입되거나, 또는 소련전투기들이 유엔군을 공습할 경우 즉각 원자폭탄으로 보복공격할 것을 결정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9개의 ‘마크-4(Mark-Ⅳ)’ 원자탄을 괌으로 이관시켜달라는 미 합참의 요청을 승인했다. 이로써 1945년 이후 처음으로 원자탄이 해외로 배치됐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 때 트루먼은 ‘중국군과 북한군의 목표물’에 ‘마크-4‘ 원자탄을 투하하는 명령서에 사인했다”고 했다.
 하지만 일촉즉발의 핵무기 투하계획은 다시 ‘숨겨진 카드’로 남았다. 맥아더 해임(4월15일)을 둘러싼 혼란이 생긴데다 소련과 중국이 전쟁을 확대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질 때마다 원자탄의 유혹에 빠졌다.
 미군부는 한국전쟁에서 원자폭탄의 ‘전술적인’ 사용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특히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된 정전회담이 중단·결렬될 때마다 이 카드를 커내고 싶어 안달했다. 특히 9월과 10월에는 B-29 전폭기들이 단독비행의 형태로 오키나와 기지를 이륙했다. 전폭기들은 원폭 투하 모의출격에 나서 북한상공에서 ‘모조 핵탄두(Dummy A-bombs)’와 대형 TNT 폭탄을 투하했다. 인구밀집지역이나 산업기지와 같은 곳에 터뜨리는 전략적인 목적의 핵무기가 아니었다. 바로 전쟁터에서 핵무기를 투하하는 ‘전술적인’ 사용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 모의 작전에 나선 것이다. 이 작전은 ‘허드슨 하버 작전(Operation Hudson Harber)’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이 위험천만한 계획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중국군과 북한군의 대규모 병력을 식별하는데 필요한 대응시간이 부족하다는 기술적인 이유 때문이었다.(유진석, <핵억지 형성기 최초의 전쟁으로서 6·25전쟁과 미국의 핵전략>, ‘한국과 국제정치’ 제27권2호 통권 73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2011) 

 북한이 휴전선 일대에 병력을 전진배치하고, 요새진지들을 구축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북한 핵공포의 시발을 ‘한국전쟁’으로 보고 있다. 전쟁 후에도 북한은 전국토의 요새화로 핵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끝내 열지못한 판도라의 상자
 사실 원자폭탄의 사용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미국은 수없는 갈등 끝에 원자폭탄의 사용을 포기했다.
 트루먼은 훗날 “2500만의 무고한 비전투요원들을 희생시킬 수 없었고, 전쟁을 세계대전으로 확전시킬 의도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트루먼으로서는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이어 3번째로 원폭투하를 결정한 지도자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피했을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우선 당시 미국이 보유한 369개의 원자폭탄은 원래 소련과의 전면전을 위해 비축해놓은 것이었다. 따라서 아시아에서 중국과 북한을 상대로 투하할 재고의 여력이 없었다. 또 하나 한반도와 중국 만주지역에는 적절한 핵공격 목표물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핵공격의 주된 용도는 원래 (소련의) 도시나 산업지역 등을 공격하는 전략폭격이었다. 하지만 북한에는 산업기반시설이 부족했던 데다, 공산군이 주로 산악지대를 이용해 공격했기 때문에 원폭의 목표를 설정하기란 매우 힘들었다. 만약 적절한 목표물이 없이 핵공격를 가한다면 결정적인 전과를 얻을 수 없다. 한반도 등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는데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하면 그야말로 큰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소련에게 ‘핵무기 별 것 아니네’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고. 그 경우 유럽은 소련의 위협을 감당할 결정적인 무기를 잃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핵무기를 잘못 투하할 경우 소련의 자동 개입을 불러올 수 있었다. 이는 제3차대전의 개막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트루먼은 소련과의 전면전, 즉 3차대전을 피하고 한국전쟁을 제한전으로 국한시키려 핵무기 사용을 자제한 것이다.  

북한이 구축한 요세. 김일성은 전 국토의 요새화로 원자탄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공포감에 떤 김일성 
 “만일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면 끝장이다.”
 북한 김일성이 1950년 11월30일 트루먼 대통령의 ‘원자폭탄’ 발언을 듣고 엄청난 공포심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이 증언한 것이다. 전쟁 중인 1951년 9~10월 사이 B-29 폭격기가 모조 핵탄두와 대형 TNT를 투하하는 모습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핵공포 속에서 전쟁을 끝낸 북한은 핵개발에 나섰다. 1955년 4월 원자 및 핵물리학연구소를 설치했다. 이후 북한은 과학자들은 소련의 다국적 연합핵연구소에 유학시켰다. 1962년에는 소련으로부터 IRT-2000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기도 했다. 여기에 남한에 1950년대 말 전술핵무기의 남한 배치는 북한을 더욱 압박했다. 북한은 이후 비록 번번이 거절당하기는 했어도 중국과 소련에 핵개발 지원을 끈질기게 요청했다.
 1972년 당시 문화공보부의 자료를 보자. 섬뜩한 내용이 나온다.
 “북괴는 1972년 3월 현재 비무장지대를 요새화하고 휴전선을 사실상 2㎞ 남진했다. ~콘크리트로 완전 갱도화를 이뤄 요새거점을 형성했다.”
 이 자료를 보면 북괴(한)를 향한 두려움과 적개심이 절로 생긴다. 그런데 ‘전 국토의 요새화’와 ‘북괴군의 전진배치에 따른 휴전선의 남진’이 북한의 핵공포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즉 북한은 1960년대부터 ‘전국토의 요새화’ 작업에 전력을 기울인다. 김일성은 지하터널을 파면서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온 나라를 요새화함으로써 원자탄 없이도 원자탄을 가진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북한은 재래식 병력을 휴전선 부근에 전진배치시켰다. 저명한 북한문제전문가 셀리그 해리슨은 그것을 ‘적을 껴앉는 전략(Hugging-the enemy)’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논개작전’? 즉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북한군 뿐 아니라 더욱 가깝게 배치될 수밖에 없는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민간인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도록 전진배치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공포가 엄청났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전문가들 가운데는 북한 핵개발의 원인(遠因)을 바로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 행정부의 핵무기 사용 위협에서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유진석의  <핵억지 형성기 최초의 전쟁으로서 6·25전쟁과 미국의 핵전략>에서 )         

불바다가 될 뻔했던 평강. 해방전에는 9만 가까운 인구가 벼와 밭농사, 그리고 소와 면양을 키우며 살았다.

■불바다가 될 뻔한 평강고원
 필자는 철원 동주산성에 올라 갈 수 없는 저 머나먼 땅 평강고원을 바라본다. 북한 땅이다. 어렴풋이 오리산(해발 453m)가 보인다.
 평강읍에서 5㎞ 떨어진 야트막한 산이다. 그 너머에는 검불랑(해발 670m)이 있다. 이 두 산은 한반도 내륙에서 유이(唯二)한 휴화산들이다. 이 두 봉우리에서는 ‘제4기 홍적세(200만년~1만년전)’ 이래 10차례 이상 용암이 분출했다. 그러나 폭발은 용암과 증기를 일거에 내뿜는 거대한 폭발, 즉 중심분출이 아니었다, 벌어진 지각 틈바구니에서 용암이 꿀렁꿀렁 흘러 나오는 ‘열하(熱하)분출’이었다. 이 때문에 백두산과 한라산 처럼 거대한 화산체가 형성되지 않고 오리산이나 검불랑 같은 아주 얕은 봉우리가 나타난 것이다. 어쨌든 이 열하분출 ‘덕분’에 평강과 철원, 이천·김화·회양 등 무려 2억평(650㎢)에 달하는 지역이 용암의 바다로 변했다.
 다만 평강은 해발 330m 정도의 고원이 되고, 철원은 그보다 100m 가량 낮은 거대평야가 된다. 오리산·검불랑과 가까운 평강에는 두꺼운 용암이 덮이고, 갈수록 그 용암의 두께가 얇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낮은 곳을 찾아 흘러가던 용암은 빙하기와 간빙기를 거치면서 임진강과 한탄강을 만든다.
 선사시대는 물론 역사시대에서도 강(江)은 문명의 고속도로였다. 한반도의 문명은 바로 이 임진강과 한탄강을 젖줄로 탄생했고, 성장했다.(이기환, <분단의 섬-민통선>, 책문, 2009)   

 ■원자탄이 잠자는 휴화산을 깨웠다면
 왜 원자폭탄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냐고? 이유가 있다.
 평강이 바로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핵무기 공격의 가상표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미 국방부는 미 극동군 사령부와 긴밀한 협의 끝에 ‘지상군 근접지원 핵무기 긴급사용(Emergency Use of Atomic Bombs in Close Supports)’을 수립했다.
 그런데 1951년 9월15일 극동군사령부가 작성한 문서에는 원폭 투하목표를 나타낸 지도가 첨부됐는데, 그 목표가 바로 강원도 평강지역이었다. ‘핵무기 공격을 위한 가상표적(Hypothetical Target under Consideration for Attack by Atomic Weapons)’이었다. 이 기밀문서는 일본 릿쿄대(立敎大) 아라 다카시 교수가 워싱턴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된 극동군 문서철에서 찾아냈다. 기밀문서에 따르면 평강지역에 투하할 원자탄의 규모는 40㏏이었다. 이것은 2차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2~3배 되는 것이다.
 51년 9월15일이면 미국이 원자폭탄의 전술적인 사용을 적극 고려했던 때였다. 9~10월 사이 미국은 B-29기를 이용, 모조 핵탄두와 대형 TNT를 한국전쟁의 전선에 투하하는 모의훈련을 한창 벌이던 때였다. ‘만약’ 실제로 이 표적에 원자탄이 떨어졌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재앙이 한반도를 휩쓸었을 것이다. 그리고 원자탄의 가상표적인 평강에는 휴화산이 두 개나 있다. ‘만에 하나’ 핵폭탄이 잠자고 있던 휴화산을 깨웠다면? 아무리 ‘만약’이라는 가정이라도 몸서리 쳐진다.

 <참고자료>
 유진석, <핵억지 형성기 최초의 전쟁으로서 6·25전쟁과 미국의 핵전략>, ‘한국과 국제정치’ 제27권2호 통권 73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2011
 조지프 굴든, <한국전쟁>, 김쾌상 옮김, 일월총서 8, 일월서각, 1982
 월리엄 스톡, <한국전쟁의 국제사>, 김형인·김남균·조성규·김재민 공역, 푸른역사, 1995
 아카기 간지, <핵무기와 6·25전쟁>, ‘일본의 6·25전쟁 연구’, 이종판 역, 서상문 편집,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정성화, <미국의 대소 핵정책:트루먼, 아이젠하워 시대>, ‘미국사 연구 9’, 한국미국사협회, 1999
 이기환, <분단의 섬-민통선>, 책문, 2009
                                                                                                    |경향신문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