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무열왕은 하루에 쌀 서 말(斗)의 밥과 꿩 아홉마리를 먹었다. 백제를 멸한 뒤에는 점심을 먹지 않고 다만 아침 저녁만 먹었다. 그래도 하루에 쌀 여섯말, 술 여섯말, 꿩 열마리를 먹었다.”
<삼국유사>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을 다룬 기록이다. 무열왕은 대식가다. 왕이 비범하다는 것을 알리려 다소 과장을 했을 수는 있다. 백제 멸망 후 두끼만 먹었다는 것은 백제고토의 민심수습과 고구려 정벌, 당나라와의 외교 등으로 할 일이 많아졌음을 뜻한다.
■신라왕·귀족은 탐식가
하지만 두끼만 먹었다는 데 하루 세끼 먹었을 때의 식사량과 견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하기야 <삼국유사>는 대식가 태종무열왕의 식탐을 다루면서 ‘백성들이 이 때를 태평성대했다’고 부연설명한다. 또 있다.
문무왕(재위 661~681)때의 일이다. 문무왕의 서제(庶弟)인 거득공이 신분을 감추고 지방을 순행했다. 재상이 되기 전에 민심을 살피려고 전국을 돌던 일종의 암행어사였다. 그가 거사(居士) 복장으로 무진주(광주)를 돌다가 그곳의 관리 안길의 집에 들러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안길은 상다리가 휘는 음식을 차렸음은 물론이고, 세 명의 아내 중 한사람을 설득해서 거득공을 접대하도록 했다. 뜻하지 않은 환대를 받은 거득공은 다음 날 떠나면서 “서라벌에 오면 꼭 날 찾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후 안길은 파견 관리가 되어 서라벌을 방문, 재상이 된 거득공을 찾았다.
버선발로 달려온 거득공은 안길을 궁으로 잡아끌더니 자신의 부인을 불러내 함께 연회를 즐겼다. 이 때 차린 음식은 무려 50가지나 되었다. 거득공이 굳이 부인까지 불러낸 것은 무진주에서의 일(안길이 부인을 설득해서 거득공을 모신 일)에 답례한 것일 수 있다. 또 영남 출신인 거득공은 푸짐하기 이를 때 없는 호남사람 안길의 음식대접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50가지나 되는 음식으로 접대했을 것이니….
신문왕이 일길찬 김흠운의 작은 딸을 왕비로 맞았을 때 신부집에 보낸 예물 목록을 보면 깜짝 놀랐다.
“신문왕 3년(683년), 김흠운의 작은 딸을 맞아들일 때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였다.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35수레였으며, 조(租)가 150수레였다.”
한번 상상해보라. 예물의 대부분이 음식이라는 것은 놀랍다. 먹을거리를 가득 실은 285대의 예물 수레가 서라벌 시내를 행진하고 있는 모습을….
■“늘 배가 고팠던 고구려 사람들”
“고구려엔 좋은 밭이 없다. 힘들여 밭을 갈아봐야 수확이 충분하지 못해 배가 고프다.(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삼국지> ‘위서·동이전’ 등에 나온 기사이다, 먹을 게 부족해 늘 배를 곯았다고 한다. 큰 산과 계곡이 많지만 벌판과 호수가 없으며, 산과 골짜기를 따라 계곡물을 마시며 사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소식(小食)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늘 배를 곯으며 살았던 고구려는 그 ‘헝그리 정신’을 무기로 요동(遼東)의 곡창지대를 넘본다. 291년부터 시작된 중국 진(晋)왕조의 내부혼란을 틈탄 것이다. 고구려 미천왕은 311년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한 데 이어 낙랑군(313)과 대방군(314), 현토군(315)을 공략한다. 다음은 요동이 타깃이었다.
“385년 (고국양)왕은 요동을 습격했다. 마침내 요동 현토를 함락하고 남녀 1만명을 포로로 잡았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고국양왕조’)
고구려가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고국양왕(재위 384~391)의 뒤를 이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 때(402년)였다. 광개토대왕의 비문은 요동정벌을 즈음해서 욱일승천한 고구려의 기운을 자랑스럽게 표현한다.
“무훈이 사해에 크게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내니 국가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히 살게됐다. 오곡이 풍성하게 잘 익었다.”
■술과 고기, 쌀이 남아 돈 고구려 귀족
고구려 벽화를 보면 집작할 수 있다. 벽화는 당대 사람이 그린 생활상이므로 그 어떤 기록보다 신빙성이 있는 사료이다. 평남 덕흥리 고분에서 확인된 묵서명을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무덤을 만드는데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다. 아침에 먹을 간장이 창고에 가득하다.”
묘주인 유주자사 진(鎭)은 광개토대왕 때인 영락 18년(408년) 사망한 인물이다. 그가 유주, 즉 지금의 랴오시(遼西)지방을 지배한 고구려인인지 어쩐지는 100%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술과 고기, 쌀을 다 먹지 못할 정도였고, 아침에 먹을 간장을 한 창고분이나 보관해 둘 정도였다니 대단한 음식자랑이다.
5세기 말 무덤인 지안(集安)의 무용총 벽화에서는 귀티나는 고구려 귀족의 식사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주인과 객이 각각의 의자와 독상을 차려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먹고 있다. 긴 다리가 있는 상에는 식사와 함께 떡과 과일, 차 등을 차렸다. 이 벽화는 격식을 갖춘 귀족의 식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른 벽화에는 소반과 상 같은 것을 들고 음식을 담아 나르는 여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황해도 안악 3호분의 벽화에도 생생한 식생활의 모습이 나타난다. 귀족 저택의 안채에는 부엌과 고기창고 등을 그렸는데, 고기창고엔 돼지와 소, 그리고 개(혹은 노루)고기 같은 동물이 갈고리에 걸려 있다. 기와집 주방에는 3명의 여인이 부엌일에 열중하고 있다. 시루 앞의 여인은 자루가 짧은 국자를 든 채 왼손에 쥔 막대 모양의 도구로 시루 안을 휘젓고 있다. 부뚜막 아래의 여인은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는 여념이 없다. 또 다른 한 여인은 그릇이 쌓인 소반 곁에서 상을 차리고 있다. 또 우물에서는 물을 뜨고, 또 귀부인에게 차를 올리는 모습까지…. 풍성한 귀족 가문의 음식문화를 엿볼 수 있다.
■누릅나무 껍질로 살았던 온달
그렇다면 평민들은 어땠는가. 사서를 들춰보자.
“그 나라(고구려)의 대가들은 밭을 갈지 않는다. ‘앉아서 밥먹는 자(坐食者)’가 1만 여 호가 된다. 하층민들이 멀리서 쌀과 양식, 생선과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공급했다.”(<삼국지> ‘위서·동이전’)
같은 <삼국지>는 “고구려의 강역이 사방 2000리요, 인구는 ‘3만호’”라 했다. 진수(陳壽·233∼297)가 <삼국지>를 쓴 것이 3세기 후반이었다. 따라서 <삼국지>가 기록한 것은 고구려 초기의 강역과 인구였을 터. 그렇다면 3만 호 가운데 1/3인 1만 호 이상이 농사도 짓지 않고, 하층민이 공급하는 식량에 기대어 먹고 살았다는 얘기다. 기사에 과장이 있다고 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유명한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는 고구려 평강왕(재위 559~590)의 이야기다. 고구려가 절정의 국력을 발휘할 때였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읽으면 왕족인 평강공주와 평민인 온달의 상반된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평강공주는 말로만 듣던 ‘바보 온달’을 만나기 위해 보물 팔찌 수십개를 차고 가출한다.
수소문 끝에 온달의 집을 찾은 공주에게 온달의 어머니가 말한다.
“(당신은) 천하의 귀인일텐데 누구의 속임수로 우리 집을 찾았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楡皮)’을 벗기려 간 지 오래됐소. 공주가 그 집을 나와 걷다가 산 밑 이르니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삼국사기> ‘열전·온달전’)
평강공주는 가출할 때 가져나온 보물팔찌를 팔아 농토와 집, 노비, 우마와 기물(생활용기) 등을 샀다. 이로써 살림살이가 다 갖추어졌다.
이 기록을 반추해보면 온달 같은 평민은 굶주림에 시달려 누릅나무 껍질을 먹는 비참한 지경에 처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왕족은 물론이고, 귀족의 창고에도 온갖 고기가 통째로 걸려있고….
■굶어죽는 백성과 진정법사의 눈물
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귀족이 호화음식을 자랑하고 흥청거릴 때 일반 백성들은 기아선상에서 헤맸다.
705~707년 사이 신라는 엄청난 가뭄에 시달렸다.
“705년(성덕왕 4년)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떠돌아 다녔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진휼하였다. 707년 봄 정월에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었다. 한 사람에게 하루 벼 3되씩을 7월까지 나누어 주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성덕왕조’)
바야흐로 신문왕이 왕비를 맞이하면서 음식을 가득 담은 285대의 수레를 예물로 보낸 이후 불과 20여 년이 흘렀을 때였다. 얼마나 많은 백성이 굶어죽었는지 조정이 무려 7개월 동안이나 창고를 열어 구휼에 나섰겠는가.
비슷한 시기였던 의상대사(625~702)의 제자인 진정법사의 이야기는 눈물겹다.(<삼국유사> ‘진정사 효선쌍미’) 법사는 출가 전에 졸오(병정)으로 있었는데, 집이 가난해서 장가도 들지 못했다. 설상가상 부역에 동원됐던 그는 틈나는 시간에 날품팔이로 홀어머니를 공양했다. 재산이라고는 오로지 다리 부러진 쇠솥 하나 뿐이었다. 어머니는 어느 날 어떤 스님이 문간에 와서 “절을 지을 쇠붙이를 구한다”고 하자 선뜻 그 쇠솥을 공양했다. 법사는 기쁜 얼굴로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드디어 법사가 출가하던 날, 어머니가 쌀자루를 털어보니 쌀 일곱되가 있었다. 어머니는 이 쌀로 밥을 지은 뒤 말했다.
“자, 한 되의 밥은 여기서 먹어라. 나머지 여섯되는 싸 가지고 가서 먹도록 해라.”
아들이 “차마 그럴 수는 없다”고 흐느꼈다.
“자식으로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며칠 동안의 미음거리까지 모두 싸 가지고 떠난다면 절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들은 세 번이나 사양했지만, 어머니의 강경한 뜻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아이를 차라리 묻자’
흥덕왕 시대(재위 826∼836)는 신라의 최절정기를 구가하던 때였다. 이 시기에 손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날품팔이로 근근히 식량을 구해 홀어머니를 봉양했디. 그런데 손순의 어린 아들이 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보다 못한 손순 부모는 머리를 맞대고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들은 다시 낳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어요.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다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가 굶어죽게 생겼소. 아이를 묻읍시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머니의 배를 채울 수 없소.”
부부는 눈물을 머금고 취산의 북쪽 들에 아이를 묻으려 했다. 하지만 땅을 파자 그 곳에서 은은한 소리를 내는 석종(石鐘)을 발견했다. 부부는 “신령스런 물건을 얻은 것도 아이의 복인 것 같다”며 아이를 묻지 않았다. 외려 석종을 집에 가져와 시험삼아 두드렸다. 이 종소리는 대궐까지 들였다. 손순 부부의 자초지종을 들은 흥덕왕은 부부에게 집 한채와 연 50석의 벼를 내렸다.(<삼국유사> ‘손순매아 흥덕왕대’)
■‘효성 금메달’에 쇄도하는 성금
이 뿐이 아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동시에 출연하는 ‘빈녀양모(貧女養母)’, 즉 ‘효녀 지은이 어머니를 봉양한 이야기’도 심금을 울린다.
진성왕대(재위 887~897)의 효녀 지은은 홀어머니를 모시느라 32살이 되도록 시집도 가지 못했다. 날품팔이와 구걸로도 도저히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절망감에 빠진 지은은 부자집에 가서 몸을 팔아 종이 되기로 했다. 그 조건으로 쌀 10여 섬을 마련했다. 온 종일 주인집에서 일을 하고는 저녁에는 밥을 지어 어머니를 돌봤다. 3~4일 후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 지은아. 예전엔 밥은 거칠었지만 맛은 달았는데, 왜 요즘엔 밥은 좋은데 밥맛은 예전 같지 않느냐? 마치 칼날로 간장을 찌르는 것 같구나.”
하도 거친 밥만 먹다보니 윤기가 흐르는 쌀밥을 어머니의 뱃속이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딸이 자초지종을 고백하자 어머니가 대성통곡했다.
“나 때문에 네가 남의 집 종이 되었구나~!”
딸의 마음도 찢어졌다. 그저 어머니의 ‘입과 배(口腹)’만 채울 줄 알았지, 정작 색난(色難), 즉 어머니의 마음에 맞는 봉양을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졌다. 딸과 어머니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 때 화랑 효종랑이 부녀간 대성통곡의 장면을 목격하고는 곡식 100섬과 옷가지를 전해주었다.
효종랑은 지은을 종으로 산 주인에게 보상하고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의 낭도 수천 명이 각각 곡식 한 섬씩을 내어 도와주었다.
진성여왕은 조(租) 500섬과 집 한 채를 내려주고 잡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졸지에 집에 쌓인 재산을 혹 도둑맞을까봐 군대를 보내 지키도록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지은의 마을을 기려 ‘효양방(孝養坊)’이라 했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진성여왕은 당나라에까지 표문을 올려 지은의 효성을 알렸다.(<삼국사기> ‘열전·효녀지은), <삼국유사> ‘빈녀양모’) 지은의 효성은 당대 신라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었음은 물론, 당나라에까지 알려질만큼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백성의 역사를 위하여
이와 같이 번드드르한 왕족이나 귀족의 역사만 읽으면 안된다. 사관이 슬쩍슬쩍 던져주는 편린, 즉 민초의 뼈아픈 역사도 놓쳐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안악 3호분이나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묘주인의 화려한 생활상과 함께 부엌에서, 마굿간에서, 푸줏간에서 피땀 흘려 일하는 백성의 역사를….
또 하나 간과하서는 안될 일이 있다. 온달이나, 진정법사나, 손순이나, 지은이나…. 모두 가난했지만 귀인을 만나, 혹은 뜨거운 효심 덕분에 살아서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었고, 죽어서는 그 거룩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가혹한 굶주림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이름없는 백성들의 가여운 삶은 어떻고….
|경향신문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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