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부터 대구 경북 지역 골동품상 사이에서 심상치않은 소문이 돌았다.
“(영주) 순흥면의 어느 곳에 벽화고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소문을 허투루 듣지않은 이가 있었다. 당시 진홍섭 이화여대 박물관장이었다. 틈나는대로 순흥 지역을 답사하던 진관장은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라 도굴 구덩이가 있는 무덤을 들어가 벽화의 유무를 확인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인 1971년 마침내 바로 그 순흥 태장리에서 벽화고분을 찾아냈다.
여러차례 도굴의 화를 입은 벽화 묘는 철저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도굴이 시작된 후 “무덤 내부의 벽에 칠해진 회를 삶아먹으면 만병통치”라는 헛소문까지 퍼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무덤 벽과 천정에는 채색화의 흔적만 겨우 남아있었다.
그나마 널길 천정에서 커다란 연꽃 그림(대연화도·大蓮花圖)이, 돌문짝에서 청색과 백색 치마를 입은 두 여인의 흔적이 각각 보였다. 연꽃의 꽃술 표현이라든지, 두 여인의 치마 등을 미루어 고구려 계통의 벽화로 추정됐다. 석비의 내면에는 ‘을묘년 어숙지 술간(乙卯年於宿知述干)’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595년(신라 진평왕 17)으로 추정되는 ‘을묘년’ 명문은 연대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였다. 이 무덤은 ‘순흥 어숙묘’라는 이름으로 사적이 됐다.
■신라 땅에서 발견된 고구려 벽화
진교수의 발견 이후 벽화분을 좇는 또 한사람의 연구자가 있었다. 대구대 이명식 교수였다.
이 교수는 ‘제2의 어숙묘’가 분명 어디엔가 존재할 것으로 여겨 방학 때만 되면 순흥 일대를 답사했다. 1985년 1월 29일에도 등산복 차림에 지표조사 도구와 카메라를 챙겨 비봉산(해발 430m) 자락인 순흥 읍내리 뒷산을 뒤지고 있었다.
이곳은 ‘어숙묘’에서 불과 900m 떨어진 곳이었다. 답사길은 밤새도록 내린 눈 때문에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이교수는 읍내리 마을 뒤로 돌아 50m쯤 더 눈길을 올라갔다. 이 때 이상한 무덤 하나를 발견했다.
“다른 고분들은 다 눈으로 덮여있는데 유독 한 무덤만 눈이 쌓여있지 않고 흙빛 그대로였습니다.”
다가가보니 무덤 한쪽에 도굴구덩이가 선명했다. 막 도굴된 무덤이었다. 설렘반 두려움반으로 도굴구덩이로 몸을 밀어넣었다.
눈 앞에 펼쳐진 무덤 안의 광경은 놀라웠다.
“희미한 햇빛을 받은 북벽에 연꽃과 함께 구름 그림이 보였습니다. 내가 찾던 신라벽화고분이었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무언가 발에 걸리는 느낌이어서 밑을 보니 인골이 쌓여있었다. 3일 후(2월 2일) 다시 고분을 찾은 이교수는 차근차근 고분의 벽을 살펴보았다.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물 등 그림의 모습이 선명했다.
이교수의 눈에 널길의 남벽에 새겨진 9자의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중 7자(기미중묘상인명·己未中墓像人名)’는 선명했다.
‘기미(己未)’라면 연대를 알 수 있는 간지가 아닌가. 이명식 교수의 최초 발견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대구대박물관이 공동으로 조사에 나섰다. 역시 이 ‘읍내리 벽화분’도 사적으로 지정됐다.
■대통령 방문소식에 공무원 총동원령
각 언론은 ‘어숙묘’(1971년 8월)와 ‘읍내리 벽화분’(1985년 7월)의 발굴 성과가 공식 발표될 때마다 주요 뉴스로 다뤘다. 신라 고분에서 고구려의 전통이 역력한 벽화가 잇달아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그때까지 조사된 벽화고분의 절대다수는 고구려(61기)에서 확인됐다. 백제(2기·송산리 6호분 사신도와 능산리 동하총의 연꽃 구름무늬 천정)와 가야(1기·고령 고아동 벽화동 연꽃무늬 천정)에서는 극히 일부가 보였다. 신라에서는 1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숙묘’(1971년)와 ‘읍내리 벽화분’(1985년)이 잇달아 현현한 것이다. 학계는 흥분했다.
고구려와 신라가 지하에서 만난 셈이었으니 그 가치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중 ‘읍내리 벽화분’은 훼손이 심한 ‘어숙묘 벽화’보다 한결 잘 남아있었다. 그 과정에서 한가지 웃지못할 일화가 터져 나왔다. ‘읍내리 발굴 성과’가 대서특필되면서 순흥 지역이 일약 각광을 받았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유적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때 기막힌 일들이 벌어졌다. 공무원들이 총동원되어 비포장이었던 풍기~순흥 간 약 6㎞ 도로를 꽃으로 장식하고, 물주고 난리를 떨었단다. 그 뿐이 아니었다. 도로변에 있는 모든 집들의 담장을 시멘트로 새 단장하는 촌극까지 빚었다. 그런데 더욱 웃기는 일은 정작 대통령이 방문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시쳇말로 ‘쌍팔년도’, 옛날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군사문화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씁쓸한 대목이다.
■귀고리 달고 눈을 부라린 역사는 누구
올해는 경북 영주에서 신라벽화분이 발견된지 꼭 50년이 되는 해다.
최근 영주시가 순흥 벽화분 보존 관련 학술대회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발표된 전호태 울산대 교수의 논문(영주백화고분의 역사적 기치와 의의)을 토대로 ‘어숙묘’와 ‘읍내리 벽화분’의 벽화의 내용을 살펴보자.
둘다 불교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읍내리 고분의 경우 널길 동벽과 널방 서벽에 묘사된 붉은 몸의 문지기가 사찰의 입구를 지키는 신장(불교의 호법신 중 하나)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금강역사(사찰이나 불전의 수호신)가 연상된다.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려 이를 드러내며 벽력같은 소리를 내는 모습은 고구려 벽화인 통구(通溝) 사신총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읍내리’의 연못과, ‘어숙묘’의 연꽃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불교의 극락세계에서는 모든 신자가 연꽃 위의 신으로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연못과 연꽃은 무덤 주인공이 사후에 살기를 원하는 하늘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수 있다.
■뱀과 버드나무의 정체
‘어숙묘’에서는 두 여인의 긴 저고리 아래쪽과 치마가 특히 눈길을 끈다. 남은 화려한 색감과 자연스럽게 흐르는 옷자락 등이 눈길을 끈다. ‘읍내리 벽화분’에서는 머리 위로 뱀 한마리를 치켜들고 있는 역사상이 이채롭다.
두 귀가 뚜렷하게 표현된 뱀은 목에 띠를 두르고 있다. 뱀은 머리를 돌려 역사의 눈길을 향한 널방 입구쪽을 보고 있다. 마치 집에서 묶어놓고 키우는 ‘반려뱀’처럼 보인다. 고대인들은 뱀을 재생력을 지닌 불사의 영물로 여겼다.
고구려 삼실총 벽화에 등장하는 역사들의 목이나 다리에도 뱀이 걸리거나 감겨 있다. 읍내리의 역사가 두 손으로 잡은 뱀도 재생력을 지닌 무덤 지킴이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널방 서벽 윗단에 구름 사이로 높이 솟은 커다란 버드나무는 어떤가.
고려 불화의 수월관음도에 등장하는 정병에 꽂힌 버드나무는 사악한 존재를 물리치는 데 쓰는 신목(神木)이었다. 고구려 건국시조인 동명왕(주몽)의 어머니가 ‘버드나무 꽃’을 가리키는 ‘유화(柳花)’가 아닌가.
읍내리 벽화의 버드나무도 사악한 기운을 쫓는 상징적인 의미로 그렸을 것이다.
널방 서벽에 묘사된 역사의 귀에 걸린 귀고리가 눈에 띈다. 우락부락한 역사의 모습에 걸맞지않게 나뭇잎(하트형) 드리개를 단 가는고리 귀고리라는 것이 이채롭다. 이런 귀고리는 5세기부터 내려오는 신라 귀고리의 모습이다.
귀고리는 고대사회에서 소속집단과 신분을 상징하는 장신구였다. 읍내리 벽화분의 경우 무덤 주인공의 내세를 지키는 역사의 신분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귀고리를 달아주었을 것이다.
■노인성질환에 시달린 40대 남성과 20대 여인은 누구?
무덤방에서 출토된 9인 이상의 인골이 흥미롭다. 우선 주인공의 공간인 시상대에는 40대의 남성과 20대의 여성으로 보이는 인골 2구가 확인됐다. 발굴단은 애초에 나란히 묻힌 40대 남성과 20대 여성의 인골을 보고 “첩이 아니냐”고 수근댔다. 그러나 먼저 죽은 부인이 묻힌 자리에 10~20년 뒤에 죽은 남편이 추가장 형태로 안장될 수 있기에 ‘첩’ 운운은 객쩍은 소리가 됐다.
아무튼 주인공 남자의 키는 165~169㎝, 여자는 162㎝ 정도로 측정됐다.
40대 주인공은 극심한 허리 측만증에 시달린 것 같다는 소견이 나왔다. 요추의 앞쪽 추체가 뒤쪽보다 훨씬 얇았으니 허리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허리가 90도 굽어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다니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요추가 폐결핵균 등에 의해 손상을 받은 것으로 추정됐다. 폐병에 시달렸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척추에서 뼈가 밖으로 자라는 골증식증과 구멍이 많이 생기는 골다공증도 심했다. 무덤주인공은 한마디로 노인성 질환에 시달린 것이다. 그렇다면 20세 이상(21~25세)으로 추정되는 여주인공의 상태는 어땠을까. 젊은 여자인 만큼 다른 병은 감지되지 않았다.
다만 치아의 범랑질(enamel)이 심하게 마모됐으며, 치근과 법랑질 사이에 부패(치주염)가 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보통 범랑질은 40세 이후에나 벗겨지는데 이 젊은 여인은 20세 나이인데도 그렇게 됐다.
남녀 주인공 외에 다른 7명 이상의 인골들은 무엇인가. 주인공 남녀가 묻힌 뒤 따라죽어야 했던 순장인지, 아니면 주인공 가족이 추가장 형태로 차례로 들어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9개체분의 인골 가운데 7명이 17~21세인 여성으로 추정된다. 또한 주인공으로 보이는 40대 남자와 20대 여성을 제외한 나머지 인골들이 보조관대에 쌓여있었다. 이들의 신분 또한 무덤 주인공 부부보다 낮은 것으로 추정됐다.
그렇다면 순장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100% 단정지을 수는 없다. 남자 주인공이 묻힐 때 다른 곳에 묻혀있던 가족들의 뼈만 추려 이장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519년, 539년, 579년…
고구려 벽화분의 전통에 신라식 무덤에 묻힌 두 벽화묘는 언제 조성됐고, 또 그 주인공은 누구일까.
학계는 ‘어숙묘’의 경우 ‘을묘년어숙지술간(乙卯年於宿知述干)’의 명문에 따라 ‘595년 을묘년 제작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어숙묘’는 ‘을묘년(595년) 술간(신라 지방의 2번째 관등)인 어숙지’라는 인물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의 유물설명란은 “(어숙묘의 주인공)인 어숙은 고구려계로 추측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설이 아닌 이상 정부의 공식 설명란에 그렇게 단정적으로 기록해놓았다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렇다면 ‘읍내리 벽화분’은 어떤가. 이 고분은 ‘어숙묘’보다 약간 거칠게 조성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따라서 ‘어숙묘’보다 앞선 시기에 조성된 고분일 가능성이 짙다. 또 읍내리 벽화분에서는 먹으로 쓴 명문(기미중묘상인명·己未中墓像人名)’이 보였다. 그렇다면 어숙묘의 ‘을묘년’보다 앞선 ‘기미년’은 479년(법흥왕 6)이나 539년(진지왕 4) 중 하나가 된다. 지금까지는 479년설과 539년설이 팽팽하게 맞서왔다.
그런데 최근들어 간지명이 그간 정설로 여겨졌던 ‘기미(己未)’가 아니라 ‘기해(己亥)’라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그동안 ‘미(未)’자로 읽었던 글자가 실은 ‘해(亥)’자의 이체자라는 것이다. 만약 ‘기해’가 맞다면 읍내리 벽화분은 519년 혹은 579년 기해년에 조성됐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된 고고학적인 성과가 있다. 즉 순흥지역에서는 두 벽화분 외에도 10여기를 조사했는데, 그중 5호분에서 경주에서 제작된 금공세공품이 적지않이 출토됐다. 도굴분이었는데도…. 5호분은 굴식돌방무덤으로 조성된 ‘읍내리 벽화분’과 ‘어숙묘’보다 앞선 6세기 전반에 축조된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실석실분)이다. 이렇게 무덤형식이 완전히 다른 고분을 시기차 없이 조성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분석이 있다. 이 때문에 만약 ‘기해년’이 맞다 해도 6세기 전반인 519년보다는 후반인 579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
■주인공은 고구려인인가 신라인인가
그렇다면 고구려 벽화를 그린 신라의 고분에 묻힌 주인공은 누구일까.
“영풍 순흥면이 고구려 급벌산이었다”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라 순흥이 고구려의 영역이었으며 따라서 ‘읍내리 벽화분’의 주인공도 고구려인일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순흥 지역의 두 고분은 벽화만 고구려풍이지 나머지는 신라 일색이다. 순흥 일대에서 고구려적인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는다. 물론 고구려 출신 신라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야말로 상상일 뿐이다.
신라인이라면 어떨까. 417년 즉위한 눌지왕은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간 두 동생을 구하려고 3명의 현인에게서 조언을 들었다.(<삼국사기> ‘열전 박제상’). 3명의 현인은 한결같이 ‘박제상’을 추천했다. 그렇게 눌지왕에게 조언을 해준 현인 중 한사람이 영주(이이촌)의 파로였다. <삼국사기> ‘본기·소지왕’조 역시 심상치 않다.
“500년(소지왕 22) 임금이 날이군(영주)로 행차했다. 이때 파로라는 인물이 16살 딸 벽화를…바쳤다. 벽화는 절세미인이었다. 왕은 처음에는 마다했지만 갈수록 보고싶은 마음이 들어 미복 차림으로 그 집에 행차해서 사랑을 나눴다…아들 하나를 낳았다.”
두 사료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영주가 이미 5세기초에 신라의 영역이었고, 왕에게 자문을 해줄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00년 무렵에도 왕이 영주 지역을 순행하고 그 지역 유력 가문의 딸을 취할 만큼 그 위상이 유지됐다.
아닌게 아니라 순흥의 지정학적인 위상은 만만치 않았다. 이곳은 광개토대왕의 남정(400년) 이후 죽령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고구려-신라의 국경지대였다. 그랬으니 신라 임금이 요충지 중 요충지인 순흥 지역 출신 유력자의 자문을 받고, 그 지역 여인을 부인으로까지 맞이했던 것이 아닐까.
이 지역은 광개토대왕이 신라왕을 ‘동쪽 오랑캐(동이)의 임금(매금)’이라 지칭하고, 영원토록 형제처럼 지내겠다는 약속했던 5세기부터 고구려의 영향력을 맨먼저 체험한 곳이기도 했다. 순흥에서 확인된 두 고구려 벽화분의 출현은 신라 영역이지만 자율성을 부여받은 이곳 유력자들의 과감한 문화 실험장이 아니었을까. 지하에서나마 생전에 맛본 고구려의 선진문화를 표현해본 것일까. 아니면 지하에서나마 고구려와 신라의 접점을 찾아보려 애쓴 것일까.
(이 기사를 위해 이명식 대구대 명예교수와 전호태 울산대 교수, 이한상 대전대교수, 김재홍 국미대 교수, 황정숙 대구대박물관 학예과장, 이원현 서라벌문화재연구원 건축연구실 과장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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