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출토된지 꼭 100년 되는 해다. 때는 바야흐로 1921년 9월이었다. 경주 노서리에서 주막집 증축을 위한 터파기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유리옥 등 유물들이 수습됐다. 그렇게 시작된 발굴조사는 어수선했다.
긴급상황인데도 당시 김해 패총 발굴에 전력을 다하던 조선총독부가 전문인력의 파견을 늦췄다. 그 사이 발굴경험이 없는 지역의 비전문가들이 4일간 졸속으로 파헤쳤다. 그럼에도 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등 온갖 황금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제는 금관이 나온 이 무덤을 ‘금관총’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금관총 유물과 거의 흡사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세트가 출토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5년 만에 현현한 부부
그보다 10개월 전인 1920년 11월 13일이었다. 조선총독부가 18기의 고분이 늘어서 있던 경남 양산 북정동에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발굴대상은 고분군의 중간 쯤에 자리잡고 있고, 따라서 축조연대도 중간쯤일 것 같은 10호분이 선정됐다.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고분이었던지라 13일간의 발굴성과는 놀라웠다.
관과 관모, 신발 등 금동 유물과, 금은동제 팔찌,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관모, 관장식, 가늘고 굵은 귀고리, 곡옥목걸이, 은제허리띠, 허리띠드리개, 가는 둥근고리자루큰칼, 가위 등이 쏟아졌다. 주인공 부부가 사용했을 다양한 말장신구와 토기류는 구석 벽 앞에 마련된 별도의 공간에 쌓여있었다.
주인공 부부의 유해는 높은 무덤대(屍床) 위에 동벽에 머리를 두고 나란히 누워있었다.
밑바닥에는 순장자로 보이는 3구의 유해가 놓여져 있었다. 유해는 문자 그대로 ‘백골이 진토되기’ 일보 직전이어서 손을 대면 부서졌다. 하지만 부부가 착장하고 있던 장식품들은 그 위치 그대로 노출되었다.
남성은 금동관을 썼고, 순금제 달개를 단 귀고리를 착용했다. 얼굴에는 마포 같은 천을 씌운 흔적이 있었다. 목에는 유리옥을 연결한 비취의 굽은옥을 달았고, 양손가락에는 은반지를 끼었다. 허리에는 은제 허리띠를 찼고, 발에는 금동신발을 신었다. 시신의 왼쪽에는 둥근고리큰칼이 놓여있었다.
나란히 안치된 부인은 어떤가. 머리에서 30㎝ 떨어진 곳에서 자작나무 껍질(백화수피)로 만든 관모가 발견됐다. 머리쪽에서는 드리개가 달린 귀고리가, 목과 가슴 사이에도 각종 장식을 연결한 목걸이가 달려있었다. 양쪽 팔목 부근에는 금·은제 팔찌가 놓여있었다. 복부에는 바퀴를 이룬 허리띠가, 왼쪽에 금은장도가 각각 있었다. 발굴자들은 이 고분을 ‘양산 부부총’으로 명명했다.
■도굴없이 묻은 그래도 드러났다
주인공 부부가 1500년 전 묻힌 그대로의 모습대로 현현했고…. 게다가 사상 처음으로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가 완벽한 세트를 이루며 쏟아져 나왔고…. ‘양산 부부총’의 발굴 성과는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개월 뒤(1921년 9월) 경주 금관총을 시작으로 금령총(1924년)과 서봉총(1926년)에서 잇달아 금관을 비롯한 순금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순금제 금관과, 구리와 금을 도금했거나 섞은 금동관은 차원이 다르다.
그 때문일까. 양산 부부총의 발굴 성과는 이후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다.
하지만 1927년 뒤늦게 나온 양산 부부총 발굴조사보고서를 보면 재미있는 서술이 눈에 띈다.
“(부부총 발굴 이후) 1921년 경주 노서리에서 출토된 금관총 금관은…모양이 흩어져 분해되어 경찰서에 보관된 것을 박물관이 입수해서 양산 부부총 금동관을 보고 조립했다.”
이 무슨 소리일까. 양산 부부총은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이다. 돌로 무덤방을 만든 뒤 한쪽을 터서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든 무덤의 구조이다. 도굴꾼이 침입하면 끝장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덤 안은 세월이 흘러도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다.
반면 부부총과 동시대인 5~6세기 경주에 묻힌 왕과 왕족의 무덤은 그 유명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덧널, 즉 목곽을 조성한 뒤 그 위에 엄청난 돌과 흙을 쌓았다. 그러니 쉽게 도굴할 수 없는 장점이 있었다.
파들어갈수록 돌과 흙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덧널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원모습을 쉽게 알기 어려운 형태로 출토된다. 역시 무너지는 돌과 흙 때문이다. 게다가 금관총의 경우 비전문가가 졸속 발굴했기 때문에 부부총 보고서의 표현대로 ‘흩어진채 발굴된 금관이 분해된 채로 경찰서를 거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금관총 금관과 쌍둥이 금동관
그런데 그보다 10개월 전에 발굴된 부부총의 금동관과 분해된 금관총 금관이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선 ‘뫼 산(山)’ 자와 사슴뿔처럼 생긴 세움장식이 ‘3(山)+2(사슴뿔)’인 점이 금관총 금관과 똑같다. 일부 장식에서 다소 간 차이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금관(금관총)과 금동관(부부총)이라는 점이 다를 뿐 형태는 똑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또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관모와 둥근고리큰칼 등 다른 장신구와 말갖춤새 등도 경주 왕릉(금관총과 황남대총 등)의 출토품과 다르지 않다. 다만 중앙(왕·왕족)과 지방(호족세력)간의 신분차이 만이 엿보일 뿐이다.
그랬기에 완전한 모습으로 출토된 부부총의 금동관이 흩어져 분해된 채 보관된 금관총 금관을 조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부부총 보고서를 쓴 오가와 게이키치는 “부부총 금동관을 보고 금관총 금관을 조금씩 조립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부부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양산은 신라의 충신인 박제상과,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의 고향으로 알려져있다. 삽량주(양산)의 간(干·지도자)였던 박제상(369~419)은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있던 눌지왕의 두 동생(복호·미사흔)을 구한 뒤 장렬하게 순국한 충신이다. 진평왕(579~632) 시대에 활약한 김서현은 삼한통일의 일등공신이다.
부부총의 조성연대가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이기 때문에 박제상이나 김서현(생몰년 미상)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부부총 근처에는 김서현과 만명부인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김서현 본인은 아니더라도 김서현 가문과 관련이 있는 고분이 아닐까. 즉 신라 중앙 조정의 지배를 받는 지역지도자의 고분이라는 것이다.
■일제가 부부총을 선택한 이유
한가지 짚고 넘어갈게 있다. 금관총이야 우연히 발견한 것이지만, 양산 부부총은 정식발굴로 조사된 고분이다.
일제는 왜 부부총을 조사한 것일까. 여기에 일제의 간계가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제는 일찍부터 평양과 경상도 고분에 눈독을 들여 대대적인 발굴작업에 나섰다. 1909년부터 평양 대동강변에서 시작된 발굴은 1916년부터 이어진 5개년 고적조사사업에 따라 경상도 지역까지 확대된다. 저의는 분명했다.
평양은 기원전 108~기원후 313년 사이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 낙랑군의 치소로 알려진 곳이다. 경상도는 일제가 이른바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던 곳으로 점찍은 바 있다. 저들은 왜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369~562년 사이 백제·가야·신라를 정복하고 한반도 남부에 식민지 관청인 ‘임나일본부’을 세워 다스린 곳이 바로 가야지방이라 주장했다.
한마디로 ‘너희(한국)는 기원전 108~기원후 313년 사이는 중국에게, 기원후 369~562년 사이는 일본에게 지배를 받은 종족’으로 여겼다. 일본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언급이 소름끼친다.
“조선은 예로부터 중국 문화의 은혜를 입었고 항상 그에 복속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때때로 일본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세키노는 “조선은 역사적으로 완전히 독립국을 형성할 실력이 없다”면서 “그렇기에 자연히 사대주의와 퇴영 고식주의에 빠져 국민의 원기도 차츰 닳아 없어졌다.”(세키노의 <조선의 건축과 예술>)
■“임나일본부의 흔적 찾을 수 없었다”
일제는 한국 역사의 타율성·정체성의 증거를 평양과 경상도 고분의 마구잡이 발굴로 찾으려 한 것이다.
1915년 도쿄대(東京大)의 명을 받고 기야고분을 조사한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의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남조선은 내궁가(內宮家·서기 209년 일본이 신라정벌 후 설치했다는 관청)를 둔 곳이고, 조정의 직할지가 되어 일본의 영토가 된 일이 있다. 한국병합은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니….”(<매일신보> 1915년 7월24일자)
구로이타는 가야고분의 조사목적을 ‘임나일본부의 확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실컷 경상도의 고분 및 산성을 파헤친 구로이타의 후일담이 기가 막힌다.
“막상 임나일본부라고 해도 조사하면 조선풍인 것이 틀림없다. 조사결과 함안·김해는 모두 일본부 소재지라고 추정할만 하나, 그 자취는 이미 사라져서 이것을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게 유감이다.”
구로이타는 가야지역에서 임나일본부의 흔적을 찾으려 그토록 발버둥쳤지만 그 증거를 끝내 찾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겉가속신’의 고분
양산 부부총도 마찬가지였다. 구릉의 능선을 따라 18기의 무덤이 이어진 모습이 고령의 지산동 대가야 고분과 흡사했다. 그러나 막상 파보니 속은 신라유물로 가득찼다. 겉은 가야인데, 속은 신라였으니 시쳇말로 ‘겉가속신’이라 할까.
그런저런 이유 때문일까. 양산 부부총 유물은 수난을 당하기 시작한다. 1938년 부부총에서 출토된 489점 유물이 몽땅 일본 도쿄(東京)제실박물관(현 도교국립박물관)으로 반출된다. 반출 경위는 확실하게 밝혀진바 없다. 그해 신관을 건립한 도교제실박물관의 요청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내준 것이 아니냐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그후 27년이 지난 1965년 6월22일 체결된 한·일 협정의 부속조약 중 하나로 ‘한일문화재 협정’이 포함됐다.
그 협정에 따라 합계 1432점의 유물이 반환됐다. 도자기·고고자료·석조미술품 438점, 도서 852책, 체신자료 36점, 경남 창녕 교동출토품 106점 등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창녕 교동 출토품은 1958년 이미 일본측이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해 반환한 것이었다.
어찌 된 일일까. 1952년부터 계속되던 한일 회담은 1953년 “일본의 한국통치가 한국인에게 유익했다”는 일본측 수석대표(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망언 때문에 3차에서 결렬된 바 있다. 이후 한·일 회담은 4년 여의 공백기를 겪는다.
일본측은 1957년 말 한·일 회담 재개를 위해 이른바 ‘구보타 망언’을 철회하고 문화재 일부를 반환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국내에서는 “반환원칙과 품목 등의 협의없이 일본측의 일방적인 반환은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황수영 미술사가)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측은 1958년 4월 경남 창녕에서 출토된 유물 106점을 주일한국대사관을 통해 일방적으로 ‘인도’했다.
■한일협정 반환목록에 들어있었지만…
그러면서 일본측은 별도로 유물 489점의 목록을 보냈다. 이 489점이 바로 국립도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양산 부부총 유물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이 이 부부총 유물의 반환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부부총 유물 489점은 이후 한국측이 작성한 반환청구 문화재 4479점 중에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1965년 최종 반환된 유물 가운데 양산 부부총 출토품 489점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일까. 1965년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작성한 ‘한일회담 문화재 관계 참고집’을 보면 그 이유가 기막히다.
즉 “부부총 유물을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내 한국실에 진열하겠다”는 일본측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포기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런데 앞뒤에 구구절절 써놓은 해명을 한번 보라.
“일본에 양보한 양산 부부총 유물은 489점이지만 그 중 작은 구슬류가 250점이라 점수에 연연해서는 안될 것임.”
“일본측의 강력한 희망과 우리나라에 이보다 우수한 유품(금관총·서봉총·금령총)이 서울·경주 등에 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사실을 고려했음.”
“부부총 출토품을 보류하는 대신 ‘경주 황오리 16호분 출토품’과 ‘창녕 교동 고분 출토품’ 등에서 품목을 추가했음.”
이게 대체 어느 나라 정부의 해명인가. 대한민국 정부인가, 일본정부인가, 헷갈릴 정도다.
누가 점수에 연연했다는 말인가. 또 금관이 아니라 금동관이라 내줘도 괜찮다는 말인가. 금관총보다 1년이나 앞서 금동관 등 고분유물의 풀세트가 나온 고고학적 맥락은 어찌하라는 것인가. 게다가 부부총 출토품을 양보하는 대신 창녕고분 출토품을 추가했다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창녕 고분출토품이라면 1958년에 이미 받은 유물이 아닌가. 무엇을 추가했다는 말인가. 경주 황오리 16호분 출토품도 원래 한국정부가 제시한 반환목록에 있었다. 양보의 조건으로 주고받을 유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반환이 아니라 기증’을 고집한 일본
물론 부부총 유물 만이 아니다. 한국정부가 원래 청구한 유물(4479점) 중 돌아온 문화재는 32%(1432점)에 불과하다. 그 중 가치가 낮은 체신관계유물 36점과, 이미 1958년 받은 경남 창녕 고분 출토품(106점)을 빼면 30%를 밑돈다. 국립기관이 소유한 한국문화재는 돌려줄 수 있지만 개인소유 문화재의 반환을 강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식민지 조선에서 닥치는대로 쓸어모아 일본으로 반출한 ‘오구라 유물’도 빠졌다. 오구라가 일본으로 야금야금 빼돌린 유물 가운데 금동관모와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등 8건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견갑형 동기와 고운무늬거울(정문경) 등 31건은 일본 중요미술품으로 각각 지정됐다.
따라서 오구라 유물의 반환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국측은 오구라 유물 가운데 일본의 지정문화재가 된 유물 등 80점을 반환목록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개인유물은 반환대상이 안된다는 이유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또하나 일본은 한·일 협정에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해놓고도 평양 정백리·석암리·남정리 고분과 왕우묘 출토품 등 도쿄대 박물관 소장품도 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본측은 한국측에 문화재를 돌려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반환’이 아니라 ‘기증’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일본측은 “한국측이 청구하는 문화재를 국제법상으로 돌려줄 의무가 없다”고 전제하면서 “그렇지만 일본은 한일간 국교정상화를 위해 한국과 문화협력을 한다는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기증할 뜻은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한일간 타협된 용어는 ‘반환’도 ‘기증’도 아닌 ‘인도’였다.
그렇지만 ‘반환’이 아니라 ‘인도’면 어떤가. 그래도 1432점은 수십년간의 타향살이 끝에 귀환하지 않았던가.
현재 해외에 흩어져있는 문화재수(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집계)는 20만 4693점에 달한다. 그중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는 절반에 가까운 43.7%(8만9498점)에 이른다. 그렇게 따지만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의 0.016%만이 돌아왔을 뿐이다.
그중 1920년 양산에서 1500년 만에 홀연히 나타난 부부는 그 분들이 차고, 신고, 들고, 끼고 있던 모든 장신구를 일본에 빼앗겨버린 셈이 됐다. 그러다 드디어 그 유품을 찾게 될 찰나에 정치적 흥정의 희생물이 되어 버림받고 말았다.
다름아닌 대한민국 정부가 양보의 변명으로 ‘별 것 아닌 유물’로 폄훼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할까.(이 기사를 쓰는데 신용철 양신시립박물관장·이한상 대전대 교수·정인성 영남대 교수·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활용부장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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