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고고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유적과 유물이 출토된지 50년과 100년 되는 해다. 먼저 1971년 공주 송산리에서 “내가 무령왕이요”하고 손들고 나타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되는 해다. 이 무령왕릉 50주년 관련 행사는 비교적 다채롭게 펼쳐졌다. 여기에 국립공주박물관이 특별전(~2022년 3월20일)까지 열고 있으니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발굴 100주년을 맞았는데도 별다른 행사없이 지나치는 유적과 유물이 있다. 1921년 경주에서 최초로 발굴된 금관총 금관이다. 상식적으로 금관 같은 중요 유물이 발굴된 지 100주년이 되었다면 기념식을 연다, 학술대회를 연다, 특별전을 연다 하고 떠들썩했을텐데 그렇지 않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무령왕릉의 경우도 하룻밤 사이에 유물을 쓸어담았고, 그래서 도굴이나 다름없는 졸속발굴이라 손가락질 받았다. 그러나 어떻든간에 대한민국 연구자들이 지지고볶은 발굴이 아닌가. 뼈저린 반성이 있었고, 지속적인 연구가 뒤따랐다.
하지만 금관총은 어떤가. 일제강점기인 1921년 9월 주막집 확장공사 도중 우연히 노출된지 불과 3~4일 사이에 긴급 발굴됐다. 게다가 발굴을 주도한 자가 대서소 주인 출신의 아마추어(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그것도 비전문가가 졸속 발굴한 유적과 유물이므로 100주년 기념 이벤트를 벌이기는 썩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 아랍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알 이드리시(1099~1166)는 “신라에서는 황금이 너무 흔해서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까지도 황금으로 만든다”(<천애갈망자의 산책>)고 했지 않은가. 또 아랍의 사학자인 알 마크디시(946?~1000?) 역시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황금그릇을 사용한다”(<창세와 역사서>)고 했다. <일본서기>도 “일본의 진을 향한 나라(신라)에는 눈부신 금은채색이 많다”고 기록했다.
■금관의 부위별 금 순도는?
이렇게 ‘신라=황금의 나라’임을 상징하는 금관이 출토된지 100년이라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필자가 금관과 관련된 참신한 기삿거리가 뭐 없나 하고 찾다가 한가지 퍼뜩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명색이 금관이라 한다면 금함유량은 얼마나 될까. 과연 99%(24K)에 달하는 순금관일까.
마침 신용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 학예연구사의 따끈따끈한 박사논문(‘신라 금제품의 화학조성과 누금기술’·공주대학원·2021)이 눈에 띄었다. 이 논문은 경주 금관 6점(출토품 5점+도굴압수품 1점)을 포함, 신라 13개 유적에서 출토된 금제품 65건(115점)을 대상으로 성분 분석한 결과를 총정리했다. 분석에는 X선 형광분석기 등 첨단과학이 동원됐다.
신라 황금유물 전체의 금함유량을 과학적으로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연구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신라 금관의 경우 금함유량은 부위별로 달랐다. 그러나 어떤 부위도 순금(24K), 즉 99%는 아니었다. 일정량의 은이 함유되어 있었다.
금관의 세움장식 순도를 기준으로 보면 금관 6점의 금 함유량은 80~89% 선이었다. 교동(89.2%)-황남대총 북분(86.2%)-금관총(85.4%)-천마총(83.5%)-금령총(82.8%)-서봉총(80.3%) 순으로 낮아졌다. 순도는 21.1K(교동)~19.3K(서봉총)이었다. 은 함유량은 10.9(교동)~18.8%(서봉총) 사이였다.
관테(둥근 밑동)의 금함유량 역시 차이가 있었다. 88.1(교동)~81.4%(서봉총)였다. 달개(영락)은 88.2(교동)~79.3%(서봉총), 금실은 85.8(황남대총)~77.9%(서봉총) 사이였다. 6점의 금관이 금관별, 부위별로 금항유량(순도)가 다르지만 대체로 90%를 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금관과 함께 출토된 관장식(새날개형)의 경우 82.9(천마총)~87.1%(금관총)였다.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의 경우 대략 75~85%의 금함유량을 보였으며, 목걸이 역시 71.4~98.3%까지 다양했다.
■금관에 은을 섞었다
이 연구결과를 두고 두가지 착안점이 생긴다. 우선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교동 금관(5세기 초)의 금함유량이 가장 높다는 점이다. 교동금관보다 늦게 제작된 황남대총 북분-금관총-천마총-금령총-서봉총 등은 금함유량이 떨어진다.
게다가 6세기 전반(523~529년) 제작된 백제 무령왕릉 출토 금제 관장식의 함유량이 99% 순금인데 반해 신라고분의 관장식(새날기형)은 대부분 80%대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시간이 흐를수록 순도 높은 금을 써서 가치를 높여야 하는데 인지상징인데, 왜 거꾸로 갔을까.
신용비 학예사의 논문은 ‘부드러운 금의 성질’에서 해답을 찾는다. 순금만 사용했을 경우 연성이 강해서 굽어지거나 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은을 합금해서 강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신라의 장인들이 처음에는 순금에 가까운 금관제작을 추구했다가 금관의 강도를 유지하려고 은을 섞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붉은 빛을 띠는 순금도 좋지만 은을 섞으면 반짝거리는 광택이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순금을 고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강하고, 더 반짝거리는 금관을 위해 은을 섞었다는 얘기다.
물론 100% 확언할 수 없다. 신라금관은 은을 적게 섞었든, 많이 섞었든 무척 약하다. 관테도 2개의 금못으로만 고정하고 있으니, 조금만 움직여도 세움장식이 꺾여 내려앉는다. 그래서 단순히 강도를 높이려고 은을 섞은 것으로 볼 수 없다는 해석도 있다.
혹은 소비량이 급증한 금을 그만큼 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은 아닐까. 금관을 비롯한 신라의 황금유물은 5세기 초부터 6세기 초반까지 약 100여 년 유행했다. 그 사이 “신라 눌지마립간(417~458)이 백제 비유왕(427~455)에게 황금과 야광구슬을 예물로 보냈다”는 기록(<삼국사기>)이 보인다. 신라에 황금문화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황금에 열광할수록 금소비량이 급증했을 것이고, 갈수록 금을 구하기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점차 금 확보가 쉽지 않게 되자 금관의 금함유량을 줄여간 것일 수도 있다.
■금을 어디서 구했을까
새삼 금관의 크기와 무게가 궁금했다. 교동 50.4g, 금령총 356.4g, 금관총 692g, 서봉총 803.3g, 황남대총 북분 1062g, 천마총 1262.6g 등이다. 물론 관에 장식된 곡옥을 빼면 무게는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금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또한 금관 뿐이 아니라 다채로운 금장신구가 무덤 한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단적인 예로 천마총에서는 금관(1262.6g·곡옥 포함) 외에도 금제관모(398g), 금제관식(244.8g), 금제관식(나비모양·138.6g), 금허리띠 1382.3g(곡옥 2개 포함) 등 합계 3426.2g의 금제유물이 출토됐다. 곡옥을 뺀 황금의 무게만 약 2,800g(746돈쭝)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그 많은 금을 어떻게 구했을까. 아무리 찾아봐도 ‘황금의 나라=신라’를 뒷받침할 금광산이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최근 신라인들이 사금을 채취해서 금을 조달했을 가능성이 짙다는 실증적인 연구결과가 나왔다.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은 발품을 팔아 경주 남천을 비롯, 인근 지역 10곳에서 미량이지만 손수 사금을 채취한 결과를 학계에 보고했다. 박 관장이 채취한 사금의 금함유량은 65~80% 정도였는데, 제련과정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면 85% 이상을 나타낼 것으로 예측했다.
박관장은 조선시대 자료(1469년·예종 때 편찬)인 <경상도속찬지리지>에 기록된 금산출지에 주목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경상도 지역에서 금을 세금으로 바치는 6곳이 있는데, 그 지명에 모두 ‘탄(灘·여울)’과 ‘천(川·개울)’이 붙어있다. 안동대도호부의 물야탄과 요촌탄, 예안현의 손량천, 봉화현의 매토부국 남천, 합천군 가조천 등이다.
사금은 풍화된 금광맥에서 금알갱이가 떨어져 나온 뒤 빗물을 타고 수로에 유입된 것이다. 조선 초 자료에서 개울이나 여울을 뜻하는 ‘~천’이나 ‘탄’이 사금의 산지로 표기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광산은 없었을까. 박관장은 다이나이트 같은 폭파화약 등이 발명·보급되지 못했던 신라 때 금맥을 찾아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관장은 따라서 사금이야말로 ‘황금의 나라=신라’를 만든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699년(효소왕 8) 미짐이라는 백성이 무게가 100푼이나 되는 황금을 주워 임금에게 바쳤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사금의 존재를 알려주는 자료라는 것이다.
하지만 강이나 개울, 여울에서 채취하는 사금 만으로 그 엄청난 무게와 양의 금제유물을 제작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견해도 있다. 역시 금광산에서 캐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금광제련법> 등을 제시하면서 경북 상주를 비롯해 봉화·성주·의성·김천·칠곡 등 소백산맥에 가까운 내륙을 금광지역으로 꼽고 있다.
금맥이 꼭 땅속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은 아니며 지표면에 노출된 금맥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표면에 노출된 금맥과 개울 및 여울에서 채취한 사금을 양수겸장으로 활용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왕과 왕족을 위한 황금유물을 만들기 위해 광산 혹은 강·천변에 나가 금맥을 파고, 혹은 채취했을 1500년 전 신라 백성들의 노고를 떠올려본다. 하기야 그런 고초가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과 같은 황금유물이 전해져 내려왔겠냐는 생각도 든다.
■금관의 기원은 어디?
신라의 황금문화는 어느 순간 홀연히 나타났다. <삼국지> ‘동이전·한조’는 “삼한에서는 구슬을 중하게 여기되 금은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아닌게 아니라 3세기까지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진한 지역에서는 금은 대신 수정·마노·유리구슬만 잔뜩 보일뿐 금은은 출토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3세기 중엽~4세기 후반까지 약 100년간 신라의 정세가 급변한다.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왕의 칭호도 ‘니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뀐다. 금관을 비롯한 황금유물은 5~6세기 약 100년 동안 눌지~지증마립간 연간(417~503년)에 집중 출토된다. 과연 금관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예전에는 북방의 유목민족에서 그 연원을 찾았다.
마립간 시대의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을 스키타이(기원전 8~기원전 3세기)의 쿠르간(봉분)과 연결지어 ‘마립간 시대’ 기마민족의 신라왕족 교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전에 조성된 이와같은 유적과 유물은 신라 금관(5~6세기)과의 시공간차가 너무 난다. 직접적인 관계를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어떨까. 중국 집안(지안·集安)에서 출토된 고구려 관식은 신라금관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신라의 황금문화는 북방 유목민족의 것이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신라로 뚝 떨어졌다기 보다는 고구려를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확실한 설은 없다.
■금관의 주인공은 누구?
금관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지금까지의 고고학조사 결과 금관의 주인공이 국왕이 아닐 수도, 남성의 전유물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중 교동 금관은 도굴·압수품이라 그 주인공을 짐작할 수조차 없다. 다만 함께 압수된 유물 중에 큰칼(大刀)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남성으로 추정할 뿐이다.
천마총의 경우 주인공이 봉황 장식을 한 큰칼(대도)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인 남성으로 추정된다. 피장자는 왕으로 짐작된다. 금관총은 주인공이 차고 있던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에서 ‘이사지왕(이斯智王)’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사지왕’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사서는 물론이고, 어떤 금석문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사지왕은 마립간이 아닌 왕족일 가능성도 있다. 신라에서는 ‘갈문왕’처럼 왕(마립간)이 아닌 왕족에게도 왕의 칭호를 붙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한상 교수의 분석대로 ‘이사지왕’의 ‘이(이)’자가 사전의 의미대로 ‘그(其)’나 ‘이(此)’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사지왕’은 ‘그 분이나 혹은 이 분’인 ‘사지왕’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경우 ‘사지왕’은 ‘소지왕’일 수도 있다.
금령총은 출토유물의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다. 때문에 금령총의 주인공은 15세 이하의 소년으로 추정된다.
서봉총에서는 남성을 상징하는 큰 칼이 나오지 않고, 여성 무덤에서 주로 보이는 굵은 고리 귀고리가 출토됐다. 따라서 여성 무덤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다만 서봉총과 잇대어 조성된 데이비드총(서봉총의 남편 무덤으로 추정)의 부장품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점으로 미뤄보면 여성의 신분이 왕비급은 아니고, 왕족 여성 무덤으로 짐작된다.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도 여성으로 판단된다. 고분에서 ‘부인대(夫人帶)’ 명문이 새겨진 허리띠 끝장식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신분도 왕비급일 것이다. 이유가 있다. 황남대총은 표주박 모양으로 2개의 무덤이 붙어있는 부부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동서 지름이 80m, 남북 지름 120m나 되고, 무덤의 높이가 22(남분)~23m(북분)나 되는 신라 최대의 봉토분이다.
그렇게 큰 규모로 무덤을 조성한 고분이라 황남대총 남·북분의 주인공은 ‘마립간(왕) 부부’로 추정되는 것이다.
■왕비 무덤엔 금관, 왕 무덤엔 금동관
흥미로운 착안점이 있다. 황남대총에서 왕비의 무덤이라는 북분에서 금관이 발견됐지만, 왕의 무덤이라는 남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남분에서는 금동관만 6점 쏟아져 나왔다. 이상하지 않은가. 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면서 왜 왕의 무덤(남분)에는 금동관만 잔뜩 묻어주고, 왕비의 무덤(북분)에만 화려한 금관을 넣어주었을까. 왕비의 신분이 오히려 왕을 능가했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해석이 있다. 이 남분엔 주인공 남성(왕)이 재위 중 썼던 금동관 5점을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6점 중 남은 1점의 금동관은 무엇인가. 이 1점이 남분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곡옥 달린 금동관’이다.
이 ‘곡옥 달린 금동관’은 남분에서 발견된 금동관 6점 가운데 가장 늦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남성)이 죽은 후에 장례용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황남대총 남분의 조성시기(5세기 2/4분기)는 황남대총 북분(5세기 3/4분기)은 물론 금관총·서봉총(5세기 4/4분기), 천마총·금령총(6세기 1/4분기)보다 빠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한상 교수는 “신라의 장인들은 가장 빠른 시기에 조성된 황남대총 남분의 장례용으로 제작한 ‘곡옥달린 금동관’을 모델로 화려한 금관으로 발전시켰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황남대총 금동관이 금관의 원조라는 것이다.
■실수로 뚫은 금관 구멍
금관은 실용관인가 장례용인가. 물론 국왕이 평소에 썼을 수도, 제사 혹은 특별한 의식에서만 사용했을 수도 있다.
혹은 금관은 장례용이고, 금동관이 실용이었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시사점이 있다.
바로 금관총 금관의 서툰 마무리이다. 이 금관의 관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구멍들이 상하 2줄로 촘촘히 뚫려있다. 이 2줄 구멍은 무언가. 원래는 달개나 곡옥 등을 매달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금관 제작자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단순실수인지는 몰라도 미리 만든 2줄 구멍에 장식을 매달지 않고 새롭게 3줄 구멍을 뚫어 곡옥과 달개를 달았다. 관테를 만드는 데는 하루면 충분한데 왜 다시 만들지 않고, 실수한 부분을 그냥 둔 채 3줄 구멍을 다시 뚫었을까. 만약 왕이 생전에 사용한 것이라면 이런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다시 새 재료를 썼을 것이다.
죽은 사람을 위한 장례용이기에 약간의 실수에도 그냥 넘어간 것일 수 있지 않은가. 아무리 임금이라도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약간의 실수에도 그냥 넘어간 게 아닐까. 발굴 100주년을 맞이한 금관은 아직까지도 수수께끼 투성이로 남아있다. 그러나 뭐 어떤가. 오히려 갈수록 신비감을 풍기니 더욱 더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 아닐까.
(이 기사를 위해 신용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와 이한상 대전대 교수,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 김대환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도움말 및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역사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신용비, ‘신라 금제품의 화학조성과 누금기술’, 공주대학원 박사논문, 2021
신용비·유혜선·윤은영, ‘신라금관의 성분 조성 분석’, <박물관보존과학> 제16집, 2015
이한상, <황금의 나라 신라>, 김영사, 2004
박홍국·이상형, <신라왕경 및 인근 지역 황금 산지 실태조사보고서>, 경주시·화랑문화재연구원, 2015
박홍국, ‘신라 황금에 대한 소고-경주 및 인근지역에서 채취한 사금을 중심으로’, <위덕대박물관총서> 제5책, 위덕대박물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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