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방, 삼방, 사방, 아니 십수방을 봐도 눈물이 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미스터 션샤인’인데요.
그 중 기억에 남는 대사가 몇 줄 있습니다. 그중 유진 초이(이병헌)가 의병인 고애신(김태리)과 나누는 대화가 있죠.
“…(당신은) 수나 놓으며 꽃으로만 살 수 있을텐데…조선 사대부 여인들은 그렇게 살던데….”(유진 초이)
“나도…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불꽃이오.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 지려하오.”(고애신)
고애신이 일본군의 무차별 구타에 위험에 빠진 조선 여성을 구하려고 “총을 빌려달라”고 하자 유진초이가 말리는 장면은 또 어떻구요. “저 여인 하나 구한다고 조선이 구해지는 것이 아니오.”(유진 초이)
“구해야 하오. 저 여인이 언젠가 내가 될 수도 있으니까….”(고애신)
■61살 할머니 독립투사
그러나 드라마 뿐이 아니죠. 실제로도 ‘고애신’처럼 ‘꽃으로, 불꽃으로’ 살았던 여성 독립투사들이 있습니다.
1933년 2월 29일 오후 3시45분, 하얼빈 교외 정양가 거리에서 거지 차림의 여인이 일제경찰에게 붙들렸습니다. 여인의 품에는 권총과 비수, 폭탄도 나왔습니다. 붙잡힌 여인은 당시 61살의 독립투사 남자현 선생(1872~1933)이었습니다.
여인의 몸은 죽은 남편이 생전에 입고 있던 옷을 감고 있었습니다.(일설에는 의병전쟁에서 전사한 남편의 피묻은 적삼이라든가, 혼인당시 입었던 옷이라든가 여러 설이 있다)
선생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 설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만주국 전권대사(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1868~1933)를 암살하려고 중국거지로 변장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 밀정(이종영)의 밀고로 수포로 돌아갑니다. 선생은 혹독한 고문 속에 9일간 단식투쟁으로 버텼습니다. 그러다 옥중 순국을 두려워한 일제가 급히 병보석으로 풀어줬지만 5일 만에 서거했습니다. 남자현 선생은 만주에서 ‘독립군의 어머니’, ‘만주 투쟁의 여걸’, ‘여자 안중근’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요.
일제 강점기 언론을 검색하다보면 여성인 남자현 선생과 관련된 기사가 이례적이라 할만큼 눈에 띄더라구요. 그 분이 그만큼 독립운동사에서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강철 투사가 되었을까요.
1891년 19살의 나이에 혼인(남편 김영주·1871~1896)한 남자현 선생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있었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선포’ 이후 의병전쟁에 참전한 남편(김영주)이 전사한 겁니다.(1896년)
이후 유복자(김성삼)와 시어머니를 부양하던 남자현 선생은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독립운동에 발벗고 나섭니다.
■손가락 끊어 쓴 혈서
남자현 선생은 1919년 3월 서울에서 독립선언 격문을 돌리며 3·1운동을 펼친 뒤 만주로 떠납니다. 그 때 나이가 ‘무려’ 47살이었습니다. 선생은 ‘무지와 몽매도 적’이라며 조선여자교육회를 10여 곳이나 만들어 여성의 항일투쟁 의식을 북돋았습니다.
무장투쟁에도 나섰답니다. 1934년 조소앙(1887~1958)이 쓴 <여협 남자현전>은 “남자현 선생이 남녀 한인 600명을 조직해서 맹렬한 항전을 벌였다”고 소개했습니다. 1920년대 서간도 일대에는 90여개 독립운동단체가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동분서주하며 동지들간 불화를 불식시키는데 적극 노력했습니다.
어떤 자료는 “남자현 선생이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글을 써서 책임자들을 소집함으로써 화합이 성립됐다.”(‘독립운동의 홍일점-여걸 남자현’, <부흥> ‘1948년 12월호’)고 소개했는데요. 그러나 단지 혈서가 팩트인지는 확인할 수 없더군요.
선생은 의열활동에도 나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3·5대총독, 1919~1927, 1929~1931)의 암살미수사건을 주도했습니다.
“남자현은 박청산·김문거·이청수 등과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로 모의했다. 1927년 4월 권총 한자루와 탄환 8발을 지니고 몰래 들어와 총독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주로 돌아갔다.”(<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26일)
만주사변을 일으킨(1931년) 일제가 괴뢰국(만주국·1932년)을 세우자 국제연맹은 하얼빈(哈爾濱)에 조사단(리턴조사단)을 파견합니다. 선생은 이때야말로 조선의 상황을 알릴 기회라고 여깁니다. 선생은 왼쪽 가운데 손가락을 끊어 무명천에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게 보내려 합니다. 삼엄한 경비를 뚫지 못하자 인력거꾼에게 돈을 주고 리턴조사단에 전달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마저 실패로 돌아갑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은 선생이 이듬해(1933년) 만주국 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려다가 역시 무위에 그칩니다.
전 남자현 선생에게서 안중근 의사의 얼굴이 중첩됩니다. 남자현 선생(1872년)이 안중근 의사(1879~1910)보다 7살 위거든요. 그분의 기개와 행동이 어쩌면 그렇게 안중근 의사와 닮았는지 모릅니다. 남자현 선생의 유언이 심금을 울립니다.
“내가 갖고 있는 249원 80전 중 200원은 조선 독립의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쳐라. 그리고 손자(김시련)를 대학까지 공부시켜 내 뜻을 알게 해라. 이 49원 80전으로 반은 손자 공부에 쓰고, 반은 친정의 종손에게 주어라.”
철혈 독립투사였지만, 한편으로는 한 가정의 평범한 어머니와 할머니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죠. 또는 독립정신의 근간인 교육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로도 읽힙니다.
1933년 8월 23일 30여명의 동지가 모인 가운데 장례식을 치른 남자현 선생의 유해는 하얼빈의 외국인 공동묘지에 묻혔는데요. 이때 아들인 김성삼이 어머니의 부고 400장을 돌리다가 일제경찰에 의해 압수당했습니다. 선생을 기리는 시를 한편 소개하려 합니다. “…동포여, 무엇이 그리 바쁘뇨/황망한 발길을 잠시 멈추시고/만주벌에 떠도는 남자현이 혼백 앞에/자유세상 밝히는 분향을 올리시라…아낙의 혈서와 무명지를 보게 되리라.”(시인 고정희의 ‘남자현의 무명지’)
■‘안사람 의병대’를 아시나요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이 활약한 그 시대, 그 무렵에 불꽃처럼 산, 최초의 여성의병장이 계십니다. 바로 ‘안사람 의병가’를 지은 윤희순 선생(1860~1935)인데요.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없이 소용있냐.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가정 일만 전담했던 당대 여성들의 구국운동을 일깨우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쉬운 단어의 반복과 강조를 동원한 감성적인 설득으로 선동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윤희순 선생이 의병운동에 투신한 계기는 역시 1895년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별령 선포 등이었는데요. 이때 시아버지 유홍석(1841~1913)을 비롯한 가문 전체가 의병활동에 뛰어듭니다. 당시 35살이던 윤희순 선생은 시아버지의 만류로 나갈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의병활동의 일익을 담당합니다.
이때 선생은 ‘안사람 의병가’는 물론, ‘애달픈 소리’, ‘방어장’, ‘병정노래’, ‘의병군가 1·2’, ‘오랑캐들아 경고한다’, ‘왜놈앞잡이들은’, ‘금수들아 받아보거라’, ‘병정노래’ 등 다수의 격문과 의병가를 지어 민간에 퍼뜨립니다.
“우리 조선사람 농락하며 안사람들 농락하며 민비를 살해하니 우리인들 살 수 있나. 빨리나와 의병하세.”(‘방어장’)
“…좀벌레 같은 놈들아…오랑캐가 좋단 말인가…죽더라도 서러워 마라. 우리 의병은 금수를 잡는 것이다…”(‘병정노래’)
또 ‘나라없이 살 수 없네. 나라 살려 살아보세…조상 없이 살 수 없네, 조상 살려 살아보세…’(‘의병군가’)
‘원수 같은 왜놈들아. 느이 놈들 잡아다가 살을 갈고 뼈를 갈아 조상님께 분을 푸세.’(‘병정가’)
‘오랑캐들아 경고한다’는 격문 또한 흥미로운데요.
“…우리 안사람들도…의병을 할 것이다…이 마적떼 오랑캐야. 좋은 말로 할 때 용서를 빌고 가거라. 이 오랑캐야. 대장놈들아.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
선생은 “조선의 안사람들이 의병을 뒷바라지하는 것이 곧 나라찾기이고 왜놈들 잡는 것”이라면서 “이 가사를 자주 읽고 외우라”고 신신당부하는 글귀를 붙이기도 했습니다.
윤희순 선생이 얼마나 이런 노래를 불러댔는지 친척 한 분이 걱정을 태산같이 하는 편지를 선생의 시댁에 보냅니다.
“밤낮없이 부르는 소리가 왜놈들이 들으면 죽을 소리만 하니 걱정이로소이다. 실성한 것 같은데…이젠 아이들까지 그러하고 젊은 청년들까지 부르니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그만큼 선생의 의병가가 저잣거리에 퍼졌다는 것을 반증하죠. 자신의 안위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은 겁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정미 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다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죠. 이때 선생은 30여명으로 구성된 이른바 ‘안사람 의병단’를 조직합니다.
‘안사람 의병단’는 남자 의병들의 뒷바라지에 만족하지 않고 강원 춘천 여우내 골짜기에서 실전훈련까지 받았는데요. 심지어 화약 만드는 일까지 뒷바라지 했고, 군자금까지 거두었습니다. 선생은 국권침탈 이후인 1911년 다른 의병 가족 수십 가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선생의 나이 52살 때였는데요.
1912년 노학당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학교는 1915년 폐교될 때까지 50여 명의 항일투사를 키워냈습니다. 불행한 일도 겹쳤습니다. 시아버지(1913년)와 시동생(유재열·1914년), 남편(유제원·1915년)까지 잃었습니다.
선생은 이후 아들인 유돈상(1894~1935)과 함께 3대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때 윤희순 선생은 여러 독립투사의 친인척 20여명으로 조선독립단을 결성해서 통신업락업무와 모금활동, 정보수집, 군사훈련 등의 활동을 이어나갑니다.
그러나 선생도 독립운동을 펼치던 아들(유돈상)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자(1935년 7월19일) 무너지고 맙니다.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윤희순 선생도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한사람의 어머니였던 겁니다. 윤선생은 아들이 순국한지 불과 11일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선생의 안타까운 외침이 가슴을 저밉니다.
“내 몸도 슬프련만 우리 의병 불쌍하다…왜놈들 득세하니 배고픈들 먹을 수 있나 춥다한들 춥다고 할 수 있나. 내 땅 없는 설움이란 이렇게 서러울까…불쌍하다 불쌍하다…방울방울 눈물이라. 맺히나니 한이로다.”
■3.2%에 불과한 여성독립운동가
어떻습니까.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처럼 불꽃같은 삶을 산 분이 어디 남자현·윤희순 선생 뿐이겠습니까.
통계를 보니 2022년 2월말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여성독립유공자는 544명이더군요.
제가 이 두 분과 함께 몇 분을 더 소개해드릴까 했는데요. 한 분 한 분의 ‘불꽃 삶’을 고작 원고지 몇장으로 정리할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부해서 심도있게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 수가 1만7066명입니다. 544명이라면 적지않아 보이지만 ‘1만7066분의 544’라면 어떻습니까. 3.2%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부장적인 유교사회 속에 있던 19세기~일제강점기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무자르듯 많다 적다라고 재단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남녀 독립운동가의 서훈 기준이 같다면 여성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들은 남편이 독립운동가일 경우 자식과 시부모를 부양하고, 가정의 대소사를 도맡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여성들도 독립유공자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여론도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동지이자 어머니이고, 가족으로서 뒷바라지한 여성들이니까요.(이 기사를 위해 강윤정 안동대 교수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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