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박명’. 강원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제 101호)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미인’이란 국내 부도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뜻이고, ‘박명’은 그만큼 탑의 팔자가 기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1911년 원주에서 반출되어 서울 명동으로 옮겨졌을 때의 지광국사 탑. 이 탑은 오사카로 팔려갔다가 다시 돌아왔다지만 경복궁으로 이전됐다.
문화재청은 건축문화재분과 문화재위원회의 검토 결과 현재 해체·복원 작업중인 지광국사탑을 원래 있던 곳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의 법천사지로 이전을 결정했다고 최근 밝혔다. 그러나 지광국사 탑과 탑비를 원래의 위치에 보호각을 세워 복원할지, 아니면 사지내 건립을 추진 중인 전시관 내부에 탑을 이전 전시하게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어떤 경우든 지광국사탑의 실제 이전 시점은 2021년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희웅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장은 “전시관을 짓거나 보호각을 설치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만큼 지광국사탑이 실제로 이전되는 것은 여건이 마련되는 2021년 정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현재 법천사지에는 옛 탑 자리가 그대로 남아있고, 당시 함께 조성된 지광국사 탑비(국보 제59호)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박희웅 과장은 “탑의 정확한 이전 위치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존환경이 석탑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추가적인 검토와 관계전문가 논의 등을 거쳐 최종 결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광국사 현묘탑은 고려시대의 국사 해린(984~1070)의 승탑이다.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장식 등으로 역대 고승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부도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그런데 이 탑은 1911년 일본으로 반출된 뒤 10여차례 이전을 거듭하고, 한국전쟁 때는 폭격이라는 우여곡절까지 겪는다.
사적 제466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은 1911년 서울을 거쳐 일본으로 반출된 이후 돌아오지 않았고, 지금은 탑비만 남아있다.|문화재청 제공
1911년 9월 일본인 모리(森)라는 자가 원주 부론면의 정주섭 소유지 폐사에 서 있던 현묘탑을 사들여 서울에 거주하던 사업가 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에게 팔았다. 와다는 일본 오사카의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에게 당싯돈으로 3140원에 넘겼다.
1912년 5월 이 탑은 대한해협을 건넌다. 그러나 당시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穀·1852~1919)가 “국유지에 있던 현묘탑을 개인 간에 매매한 것은 엄연한 불법”이라면서 “당장 조선총독부로 반환하라”고 촉구하고 현묘탑 매매에 연루된 모리와 와다 등을 구류에 처하고 소환하는 등 본격수사에 나선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1만2000조각으로 산산조각난 지광국사탑. |문화재청 제공
데라우치의 서슬에 놀란 와다는 눈물을 머금고 후지다에게 팔았던 현묘탑을 되산 뒤 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데라우치가 일본으로 건너간 탑의 반환을 요구한 이유는 ‘조선 문화재가 예뻐서’가 아니었다. 조선이 천년만년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여긴 데라우치로서는 자신이 총독으로 있는 한 조선의 문화재는 자신이 다스리는 조선에 있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912~15년 사이 돌아온 탑은 경복궁 안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세워졌다. 하지만 6·25전쟁 때 그만 유탄을 맞아 무려 1만2000조각으로 박살나는 비운을 맞는다.
다른 문화재는 말짱했는데 현묘탑만 박살났다. 그만 재수 없이 유탄을 맞은 것이다. 박살난 탑은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당시에는 문화재위원회 같은 기구도 없었으니 공식적으로 나설 사람과 기관도 없었다. 그러다 1958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방한한 고딘디엠 월남 대통령과 경회루 산책에 나섰다가 이 산산조각난 탑을 보고 “대체 저게 어찌 된 것이냐”고 화를 벌컥 내면서 부랴부랴 복원에 나섰다.
법천사지. 탑과 함께 탑비(국보 제59호)가 남아있는 모습이다.|문화재청 제공
하지만 산산조각 난데다 폭격 맞은 지 오래됐던 탓에 부서진 부재들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복원 팀은 강화도와 익산 등지에서 모자란 돌을 조달해서 일일이 빻아 겨우 복원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렇게 복원되어 경복궁 경내에 서있던 탑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2005년과 2010년 시행된 정기조사와 2014년 문화재 특별 종합점검, 2015년 시행한 정밀안전진단 등에서 다수의 균열과 모르타르(mortar·시멘트와 모래를 물로 반죽한 것) 복원 부위 탈락 등이 확인됐다. 모르타르로 복원된 옥개석(屋蓋石, 지붕돌)과 상륜부는 구조적 불안정까지 더해져 석탑의 추가적인 훼손이 우려됐다. 결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16년 5월부터 전면해체·복원작업을 벌였고, 올해까지 보존처리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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