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방은 비좁기 그지 없었다.…다다미 3장 반 크기에 20여 명이…수인번호대로 열지어 앉아있었다.…왜놈말로 ‘기오츠케’(차렷)하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가 자기 수인번호를 부르면 ‘하이(예)’ 하고 머리를 든다.”
1911년 안명근 군자금 모금사건으로 투옥된 백범 김구 선생의 서대문형무소 시절의 이야기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빼앗기고 그저 일련번호로 호명되는 죄수의 대우를 받게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몇 안되는 저항시인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이육사 시인과 ’수인번호’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다.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손인 이육사(李陸史) 시인의 본명은 이원록이었다.
1926년부터는 ‘이활’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그러던 1927년 장진홍 의사의 대구조선은행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됐다.
투옥된 감옥에서 받은 수인번호가 바로 ‘264호’였다. 이원록(이활)은 1930년 10월 발간된 대중잡지인 <별건곤>에 ‘대구사회단체기관’이란 평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때의 필명이 두가지였다. 목차에는 ‘이활’로, 본문에는 ‘大邱 二六四(대구 264)’로 표기한 것이다. 이후부터 ‘이육사’란 필명을 애용했다.
1927~29년의 투옥생활 중 ‘수인번호 264번’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호명되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시인이 아니었던가.
아마도 일련번호로만 불려야 했던 무력한 조선인의 처지를 자조하면서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이육사’ 이름을 쓴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영원한 죄인’임을 자처한 것이 아닐까.
시인은 ‘264’ 필명을 한자로 옮길 때의 이름은 이육사(李陸史)가 아니었다. 이 또한 사연이 있다.
시인은 1931년 대구에서 벌어진 항일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다시 구속된다. 6개월간 고초를 겪다가 풀려난 이육사 시인은 집안 아저씨인 이영우의 집에서 요양한다.
그때 매화 그림을 한 폭 그리면서 쓴 이름은 ‘육사(戮史)’였다. 무슨 뜻인가. ‘역사를 죽여버린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 모습을 지켜본 이영우는 화들짝 놀랐다. “혁명을 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냐. 너무 노골적이다. 그냥 육사(陸史)라 하자.”
저항시인 이육사(李陸史) 이름의 탄생비화다. 이육사라는 이름 속에는 그야말로 육사(戮史), 즉 역사를 뒤집는 항일혁명을 꿈꾼 시인의 의지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뇌물죄 등의 혐의로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인번호 ‘503호’를 부여받았다.
수인번호란 법 앞에는 귀천이 있을 수 없다는 이른바 법불아귀(法不阿貴)의 정신이 담겨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범 김구, 이육사, 그리고 유관순(371번)·안창호(1724번)·한용운(11306번) 선생 등과, 전두환(3124번)·노태우(1042번)의 수인번호는 같을 수가 없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김희곤, <새로 쓰는 이육사 평전>, 도서출판 지영사, 2000
김구, <백범일지>, 배경식 풀고보탬, 너머북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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