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적

조공외교의 허와 실

‘조공외교’가 시작된 것은 중국 주나라 때이다.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것을 조(朝), 알현할 때 바치는 물품을 공(貢)이라 했다.

 

100개가 넘는 주변국이 조공하면 천자국인 주나라가 ‘제후임을 허한다’는 책봉 이벤트로 진행됐다. 겉으로 볼 때의 조공은 굴욕외교 그 자체다.

조선의 송시열은 “소국(조선)이 대국(명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도리여서 군신의 의리를 정했다”고 천명했다.

 

명나라 사신으로 간 권근은 “산 넘고 바다 건너 중국에 들어와 늘 조공하옵고, 삼한(조선) 땅은 길이 제후국이 될 것입니다”라는 충성서약을 방불케하는 시를 중국황제에게 바쳤다.

 

매티스 미국 국무장관이 일본 방위상과 만나는 모습. 매티스는 중국이 '주변국들에게 조공외교를 강요하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세종은 ‘사대의 예가 지나친 것 아니냐’는 쑥덕공론에 “정성을 다해 섬기지 않으면 불경스럽고,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 논박했다.

 

나마 “제발 ‘뒷담화’ 만큼은 자제하고 내 면전에서 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이니까 그 정도나마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조공은 충성맹세만 강요하는 일방외교는 아니었다.

 

예를들어 명종 시대의 사헌부는 사대외교를 하는 이유를 “대국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자기 나라 백성을 잘 보호하는 것”이라 했다.

 

“대국을 섬겨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백성을 해롭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 ‘사대’한다는 이유로 조선이 얻은 실리는 자못 컸다.

 

국초부터 바닷길을 막는 해금(海禁) 정책을 폈던 명나라는 조공무역만을 허락했다. 사무역은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명나라는 조선을 ‘예의의 나라’로 특별대접했다.

 

명나라는 다른 주변국에게는 ‘3년 1공’, 즉 3년에 한번씩 조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조선에게는 ‘1년 3~4공’을 허용했다.

 

최혜국의 지위를 인정해준 것이다.

 

정조 연간의 우의정 채제공은 “청나라 황제가 조선을 우대한 것이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조공외교를 굴욕외교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유교 문명권의 동질성과 내부결속을 다지는 독특한 실리외교의 측면에서 파악해야 한다.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최근 “중국이 ‘일종의 조공 국가 접근법’으로 주변국을 압박하고 있다”고 잇달아 비판하고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한국배치를 둘러싼 중국의 전방위 보복조치 등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읽힌다.

 

아무리 불편해졌다지만 한·중 관계를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조공’으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좀 개운치않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