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비행기 여행 중이던 영국의 배우·모델인 제인 버킨이 실수로 가방 속 물건을 다 쏟아버리고는 불평을 터뜨렸다.
“가죽으로 된 작은 여행가방을 찾을 수 없어!”
때마침 옆에 있던 에르메스의 회장 장 루이 뒤마가 “수납이 잘되는 가방을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가방 에르메스 버킨백이다.
그런데 2015년 7월 제인 버킨이 “제품명에서 내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다. 가방 하나를 만들기 위해 악어 2~3마리의 가죽을 산채로 벗기는 잔인한 관행이 부각되자 질색한 것이다.
그렇다고 에르메스를 향한 상류사회 여성의 허영이 진정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개당 1800만~2억원을 호가하는 버킨백을 구입하려면 4~5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단다.
최근 부패혐의로 조사를 받는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의 부인인 로스마 만소르(67)의 사치 생활이 부각되고 있다.
보석과 돈다발을 채워넣은 로스마의 명품 가방 중에는 최고 2억원이 넘는 버킨백이 색깔별로 구비돼 있었다.
1986년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가 쫓겨났을 때 부인 이멜다의 방을 가득 채운 악명높은 호화 구두 3000 켤레가 연상된다.
지난해 11월 쫓기듯 물러난 짐바브웨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의 부인 그레이스 역시 ‘구찌 그레이스’라는 악명을 얻었다.
셋다 남편의 권력을 이용해 사치와 악행을 일삼았으니 욕을 먹어도 싼 여인들이다.
그럼에도 “내 돈으로 샀는데 무슨 문제냐”(로스마) “탐욕도 자선이다”(이멜다)는 등의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무엇보다 한때는 ‘현명한 부인이자, 자애로운 어머니’의 환상이 무너지는 순간 대중의 배신감과 분노는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남편의 독재 및 실정’과 ‘부인의 사치’ 중 어느 것이 문제의 본질인가. 가만 보면 무능하기 짝이 없던 루이 16세보다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고급케이크)를 먹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더 한심한 인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1789년 프랑스 혁명 때 앙투아네트가 내뱉었다는 ‘빵이 없으면…’ 대사는 전형적인 가짜뉴스였다. 실은 장 자크 루소가 14년전인 1765년 자서전(<고백록>)을 쓰면서 ‘어느 왕비가 했다’고 운을 떼며 이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가짜뉴스가 루이 16세보다 앙투아네트를 손가락질 하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3000년 전 중국 주나라 무왕은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출사표를 던지고 은(상)나라 주왕을 정벌했다. 암탉이란 주왕의 부인(달기)을 일컫는다.
그러나 나라를 망친 장본인은 정사의 책임자인 남편(주왕)이었다. 그렇지만 주 무왕은 애꿎은 부인(달기)에게만 책임을 묻고 있다. 물론 도가 넘은 퍼스트레이디의 사치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부인의 사치가 그것이 남편의 독재와 실정을 가릴 수 없는 일이다.
“악행을 일삼는 퍼스트레이디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혹여 여성이기 때문에 더 미움받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공평하다”(BBC)는 지적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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