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이게 뭐야.” 1986년 2월2일 오전 10시쯤 전북 익산 웅포면 입점리에 사는 고교 1년생 임모군이 마을 뒷산에서 칡뿌리를 캐다가 무덤 1기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무덤 안으로 들어간 임군은 금동제 관장식 등 깜짝 놀랄만한 유물을 수습했다. 임군은 4일후인 6일 익산시청 공보실에 신고했다. 이른바 입점리 고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 고교생의 신고 덕분이었다.
입점리에서 출토된 금동제 삼각형 장식에 표현된 이른바 봉황문 도안. 벼슬이 더듬이처럼 표현됐고 양쪽 날개 깃털은 4가닥, 꼬리는 3가닥, 2개의 다리, 3개의 발톱이 새겨져 있다. 학계일각에서는 상상의 새를 의미하는 ‘3족 봉황문’이라 했지만 ‘2족’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영범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제공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최초 발견자인 임성수 군이 금동대륜(관테)과 금동입식(관테 위에 세워진 꾸미개), 금동관모, 금동식리(장식신발) 등을 수습한 것이었다.
고고학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발굴조사팀이 투입되었을 땐 이미 석실내부가 심하게 훼손된 뒤였고, 많은 수의 금동제유물 편들의 정확한 출토위치를 알 수 없게 됐다. 다만 동판을 잘라 문양을 새긴 금동관모와 금동식리는 보존처리 후 접합을 통해 어느 정도 복원됐다. 그러나 여러 편으로 파손된채 수습된 다른 금동제 유물의 정체는 지금까지 알 수 없었다.
입점리 삼각형 장식에 표현된 이른바 봉황문 도안. 학계 일부에서 ‘다리’로 해석했던 것이 꼬리 쪽으로 한바퀴 돌아가게 표현된 깃털이었음이 밝혀졌다. |이영범학예사 제공
그런데 최근 이 입점리 고분에 금동관모 말고도, 최소한 2점 이상의 금동관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또 지금까지 금동제 유물에 선명하게 보였던 ‘봉황(새)문’의 다리가 3족이 아니라 2족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런 연구결과는 이영범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 학예사가 박물관이 발간하는 학술지 <박물관 보존과학> 제20집에 발표한 ‘익산 입점리 1호분 출토 금동관의 제작기법 연구’ 논문에서 밝혀졌다. 이영범 학예사는 “금동제 유물과 파편들을 현미경과 X선 촬영으로 조사한 결과 밝혀낸 분석자료”라고 말했다.
이영범 학예사는 우선 직사각형의 관테 유물에 주목했다. 관테는 동판 폭을 32~33㎜, 두께 0.38㎜ 내외로 재단해서 문양을 새겼다. 이 관테의 장식기법은 두가지 형식으로 관찰됐다. 물결무늬 안쪽과 바깥쪽에 1점씩 찍은 1형식과, 물결무늬 바깥쪽에 1점을 찍은 2형식 등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삼각형 형태로 절단된 관테의 끝부분은 1형식이 1개, 2형식이 2개가 확인됐다.
입점리에서 확인된 금동제 유물편. 금동관테와 금동 산모양 관식, 금동삼각형 원형 관장식, 금동입식 등 조합되지 않은 유물편들이 다수 수습됐다. 금동관이 2개 이상, 다수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영범 학예사 제공
다른 형식의 관테가 나왔다는 것은 관테가 2개 이상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영범 학예사는 “도굴되고 훼손된채 파편만 남았지만 관테의 형식이 2개 이상인 것으로 보아 이곳에 금동관 같은 금동제품이 2개체 이상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추정했다. 또 발견된 금동 산모양 관식과 금동 삼각형(3점) 및 원형 장식(1점) 등도 서로 조합될 수 없는 양식이다. 이영범 학예사는 “이밖에도 서로 다른 형식의 금동 관제꾸미개가 3점 확인됐다”면서 “이로써 2점 이상 혹은 다수의 금동관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금동관테의 2가지 형식. 물결무늬 안쪽과 바깥쪽에 1점씩 찍은 1형식과 물결무늬 바깥쪽에만 1점을 찍은 2형식이 있다. 다른 두가지 형식의 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2개 이상의 금동관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이영범 학예사 제공
또한 이번 분석결과 금동 삼각형 관장식에서 확인된 이른바 ‘봉황문’ 장식은 학계 일부에서 주장한 ‘3족 봉황’이 아니라 ‘2족 봉황’이었음이 드러났다. 모두 3점이 확인된 ‘봉황문’ 장식은 벼슬이 더듬이처럼 표현됐고 양쪽 날개 깃털은 4가닥, 꼬리는 3가닥, 몸통 중앙에는 2개의 구멍을 뚫어 영락(구슬을 꿰어 만든 장식)을 달았다. 이영범 학예사는 “꼬리 쪽으로 한바퀴 돌아가게 표현된 깃털을 일부 학계에서는 봉황의 발로 여겨 ‘삼족 봉황문’이라 했지만 이번 관찰결과 깃털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 학예사는 “기왕에 발표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보고서에서 ‘봉황’이라 표현했기 때문에 이번 논문에서도 ‘2족 봉황문’이라 했지만 이 새가 봉황인지는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3족이라면 상상의 새인 봉황으로 볼 수 있지만 2족이라면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밑동부터 줄기까지 1200km가 되는 복숭아 나무에 살면서 아침을 알리는 소리를 낸 신비의 닭인 천계를 그린 것일 수도 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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