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주의 차, 촉의 비단, 정요(定窯·송나라 때 정주에서 만든 자기)의 백자, 절강의 칠기, 고려 비색(청자). 오의 종이, 낙양의 꽃은 천하제일이다.”(洛陽花建州茶 高麗秘色此天下第一). 남송(1127~1279)의 인물인 태평노인은 <수중금>에서 고려청자의 신비로운 빛깔(비색)을 당대 으뜸으로 꼽았다.
1123년(인종 원년) 200여년의 사절단을 이끌고 고려를 방문한 서긍(1091~1153) 역시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들어 제작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고려도경>)고 극찬했다.
‘순화4년명’ 항아리.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한 선대 임금들의 제사를 위해 건립한 태묘(太廟)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왕실 제기(祭器)였다.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이렇듯 고려청자를 포함한 고려의 도자기들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최고 명품이었다. 그러나 청자는 물론이고 백자와 흑자, 토기 등 고려시대 도자기들의 제작연도나 제작자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런데 1910년 무렵 공개된 뒤 일본인 소장가들을 거쳐 1957년 이화여대가 사들인 도자기가 1점 있으니 그것이 바로 ‘청자 순화 4년명 항아리’이다. 이 항아리의 굽 안에는 ‘순화4년계사태묘제일실향기장최길회조(淳化四年癸巳太墓第一室享器匠崔吉會造)’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순화’는 북송의 연호로 ‘4년(四年) 계사(癸巳)’는 993년을 가리킨다.
또 ‘태묘(太墓)’는 고려 시대 왕실의 재실(齋室)로서 ‘제1실’은 태조 왕건을 모시는 곳이다. ‘향기(享器)’란 제사용 그릇이며 ‘장인(匠人) 최길회(崔吉會)’가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문화재청은 최근 고려시대에 제작된 자기 중에 제작연대, 목적, 용도, 제작자가 유일하게 기록된 ‘순화 4년명’ 자기를 보물(제237호)에서 국보로 승격예고했다. 특히 이 청자가 무덤에서 출토된 다른 고려자기와 달리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한 선대 임금들의 제사를 위해 건립한 태묘(太廟)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왕실 제기(祭器)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문화재청은 이 유물을 국보로 승격예고하면서 ‘고려청자의 기원(起源)’이라 수식했다.
하지만 이 자기는 전통적인 청자와는 사뭇 다른 색깔을 갖고 있다. 하얗지는 않지만 색도가 밝고 노르스름하다. 전문용어로 담녹조의 황갈색계로 올리브색에 가깝다. 게다가 앞면에 미세한 유빙렬(釉氷裂)이 있다. 태토는 회백색에 가까우며, 굽다리에는 얇은 내화토 받침 자국이 여러 군데 나 있다. 따라서 고려자기의 초기 양상을 보여 준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자기가 청자가 아닌 백자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전문가들도 있다.
그런데 1989년~90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사 황해남도 배천군 원산리 2호 가마터에서 이화여대 소장 ‘순화4년명~’ 자기를 연상시키는 ‘순화3년명’ 고배(다리붙은 접시)와 ‘순화4년명’ 청자편들이 10여점 출토됐다. 특히 ‘순화3년명’ 고배의 굽 안바닥에는 ‘순화3년(992) 임진년에 태묘 제4실 향기로서 장인 왕공탁이 만들었다(淳化三年 壬辰 太廟第四室 亨器 匠王公托 造)’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순화4년명’ 항아리 바닥. ‘순화4년계사태묘제일실향기장최길회조(淳化四年癸巳太墓第一室享器匠崔吉會造)’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순화’는 북송의 연호로 ‘4년(四年) 계사(癸巳)’는 993년을 가리킨다. 또 ‘태묘(太墓)’는 고려 시대 왕실의 재실(齋室)로서 ‘제1실’은 태조 왕건을 모시는 곳이다. ‘향기(享器)’란 제사용 그릇이며 ‘장인(匠人) 최길회(崔吉會)’가 만들었다는 기록이다.|이화여대 박물관 제공
특히 북한 발굴팀은 “이들 유물은 모두 청자”라면서 “순화 3,4년, 즉 992~993년보다 앞선 시기(10세기 중기)의 퇴적층과 가마터가 발견됐다”고 보고했다. 이런 발굴결과를 통해 이화여대 소장 ‘순화 4년명’ 자기 역시 청자이며, 이런 청자가 최소한 10세기 중반 이후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됐다. 또하나 중요한 착안점은 북한 발굴팀이 조사한 황해남도 원산리 가마터가 다름아닌 고려초 태묘에서 사용한 왕실제기의 제작지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 ‘순화4년명 ’자기를 ‘고려청자의 기원’이라 단정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청자가 아닌 백자라는 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다 또 청자의 기원을 두고도 9세기 전반~10세기 말까지 나름대로 타당한 논리를 지닌 다양한 학설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청자의 기원과 관련된 여러 학설의 기준점이 되는 유물인 것은 분명하다.
장남원 이화여대 박물관장은 “전형적인 청자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순화4년명’ 항아리는 그 존재만으로도 국보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장 관장은 “제작지와 제작연대, 제작목적이 분명히 새겨진 명문자기”라면서 “특히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왕조가 선대 임금들의 제사를 위해 제작한 태묘의 제기라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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