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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어전에서 방귀뀐 얘기까지…2억7420만자 실록·승정원일기의 X파일

저는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다가 포복절도할 기사를 보았습니다. 
<선조실록> 1601년(선조 34) 3월25일자인데요. 임금(선조)이 편전에서 왕세자(광해군)가 입시한 가운데 침을 맞았다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약방제조 김명원(1534~1602)·유근(1549~1627)·윤돈(1551~1612) 등이 있었구요. 
우리가 잘 아는 허준(1539~1615)과 이공기·김영국(생몰년 미상), 허임(1570~1647) 등 어의와 침의 등도 총출동 했죠. 아무래도 임금을 치료하는 자리이니만큼 무겁고도 심각한 분위기였겠죠.

<승정원일기> 1744년 8월20일자. 영조가 41살때와 51살 때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두고 신하들과 품평회를 열었다는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했다. 41세와 51세의 영조 초상화를 비교한 신하들은 “10년전에 비해 엄청 늙으셨다”는 등 ‘팩폭’을 가한다. 영조는 “아니 경들은 과인에게 하나도 늙지 않았다고 하더니 무슨 소리야”면서 41살 초상화를 가리키며 “저기도 수염이 있는데 뭘 그러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어전에서 감히 방귀를?
그런데 실록기사 중에 ‘유근’이라는 분의 이름 뒤에 작은 글씨로 쓰여진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유근(임금의 지척에서 감히 방귀를 뀌었으니 이는 위인이 경솔한 소치이다.(咫尺天威 敢發穢聲 蓋爲人輕率之致也)”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유근이 감히 임금이, 그것도 아파서 침을 맞고 계신 그 엄중한 자리에서 ‘방귀를 뀌었다(穢聲)’는 겁니다. 상상해보면 그 분위기가 얼마나 ‘갑뿐사’였겠으며, 방귀를 뀐 유근 본인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모두들 망극해서 어쩔줄 몰라하면서 짐짓 모른체 하느라 애를 썼겠죠. 몇몇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을 지도 모릅니다.

같은 날짜 <영조실록>은 “영조가 우의정 조현명 등을 접견하고 어진(임금 초상화) 2폭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내 40세 초상화인데 봉안처를 찾아야겠다”는 등의 간략한 내용만 담고 있다.

그래도 그런 일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 자리에 입시한 사관의 붓끝이 그걸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임금이 침을 맞고 있는데 방귀를 뀐 유근의 사람됨이 경솔하다’고 ‘디스’한거죠.
그 때문에 예조판서와 좌찬성 등을 지낸 유근은 ‘임금 앞에서 감히 방귀를 뀐 인물’로 역사서에 기록되고 말았습니다.
평소 유근이라는 분하고 어떤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건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별것 다 평가한 사관도 그렇고, 그걸 걸러내지 않고 그냥 실록에 실은 편수관들도 참 지독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덕분에 우리는 421년 전 어전에서 일어난 일을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상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 기록계의 쌍두마차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실록은 태조(1392년)부터 철종(1863년)까지 47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했다. 총 888책 4770만자이다. <승정원일기>는 국왕 비서실이 작성한 임금 일기이다. 1623년(인조 1)~1910년(융희 4)까지 288년 3245책 2억2650만자가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차이
저는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물인지를 소개하기 위해 ‘유근의 방귀’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유근의 방귀’ 이야기는 실록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TMI’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유근의 방귀를 비판하는’ 사관의 평가를 넣었어야 할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실록은 어디까지나 편집본이기 때문입니다. 
‘사초(史草)’가 있죠. 사관이 조정의 모든 행사 및 회의에 참석하여 임금과 신하들의 언동과 정사의 내용을 소개하고, 그 잘잘못 등을 기록한 것을 사초라 하죠. 여기에 관청의 공식문서 등을 모아 후대(조선의 경우 차기 국왕대)에 편집 정리해서 편찬하는 것이 바로 실록입니다. 

<영조실록> 1738년 1월21일과 같은 날짜 <승정원일기> 기술내용. 실록은 “영조가 창덕궁 양정합에 나가 동궁(사도세자)과 동궁의 스승인 이광좌 등을 보았다. 동궁은 임금의 명에 따라 큰 글자를 써서 스승인 이광좌 등에게 주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는 현장상황을 생생한 필치로 자세하게 묘사했다. 영조는 세자에게 “책을 읽겠느냐”고 묻고 세자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럼 글씨를 쓰겠느냐”고 물었다. 세자가 붓을 들어 글씨를 써내려가자 영조는 “글씨는 쓰려하는데, 책은 읽기 싫어하는가 보다”하며 웃었다.

지금 언론으로 치면 기자가 취재한 내용을 데스킹해서 보도하는 스트레이트, 해설, 논평, 사설 등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방송으로 치면 뉴스 및 다큐멘터리 편집본이겠죠. ‘유근의 방귀’와 같은 예외도 있지만 후대에 실록의 편집 과정에서 상당부분 걸러내기 때문에 ‘팩트’에 충실한, 다소 무미건조한 내용을 전하기 마련이죠. 
다만 ‘사관의 촌철살인 평가’가 실록의 가치를 한껏 높이는 요소가 됩니다.
그런 실록과 달리 승정원(대통령비서실) 소속 주서(7급) 2명이 임금의 일거수일투족과 신하들의 보고 등을 빠짐없이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어떨까요. 기자의 취재일지 혹은 영상촬영본을 일기형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일기이니만큼 매일매일의 날씨까지 기록해놓았죠. 그러니 그 생생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 어전의 모습을 생중계한 동영상 같은 느낌을 줍니다.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한번 비교해볼까요. 

■영조의 변덕 기질을 지적한 신하
<영조실록> 1738년 1월21일자를 보겠습니다.
“임금이 창덕궁 양정합에 나아가 영의정 이광좌 등을 만났는데, 동궁(사도세자)도 있었다. 임금이 동궁에게 글자를 써서 스승들(이광좌 등)에게 주라고 하자 동궁은 큰 글씨를 써서 주었다.”
어떻습니까. 무미건조하게 팩트만 전달한 신문의 스트레이트 기사 같죠. 
같은 날짜(1월21일) <승정원일기>에는 어떻게 다뤘을까요. 1738년이면 사도세자의 나이는 겨우 4살이었는데요. 
영조는 “오늘 동궁이 책을 읽고 싶어한다”고 운을 떼면서 “네가 읽겠느냐”고 사도세자에게 물었는데요. 
사도세자가 수줍은 듯 대답을 하지 못하자 영조는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답니다.

<승정원일기>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일화(1738년 1월21일)를 전하면서 “전하(영조)께서는 평소 감정조절을 잘못하시는 점이 많다”는 판중추부사 서명균(1680~1745)의 일침을 소개했다. 서명균은 혹 24년 뒤인 1762년 일어난 비극(임오화변·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예고한 것일까.

“그럼 글씨를 쓰겠느냐.”
내시가 종이 2장과 함께 붓과 벼루를 가져왔고, 사도세자가 붓을 잡고 글씨를 썼습니다.
“(웃음을 지으며) 글자 쓰는 것은 어려워 하지 않는데 글 읽는 건 몹시 싫증을 낸단 말이야. 글씨 쓴 종이를 네 스승(이광좌)에게 갖다주어라.”(영조)
신하들의 덕담이 이어졌는데요. 영의정 이광좌(1674~1740) 등은 “동궁이 온화한 모습과 슬기로운 지혜를 갖췄다”고 극찬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판중추부사 서명균(1680~1745)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집니다.
“전하(영조)의 솔선수범만이 동궁을 인도하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한데 전하께서는 평소 감정조절을 잘 못하시는 점이 많으니…. 우선 성상께서 더욱 힘써 돌이켜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서명균은 겉으로는 자애롭기 그지없는 아버지(영조)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서명균은 혹 24년 뒤인 1762년 일어난 비극(임오화변·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예고한 것일까요. 

<선조실록> 1601년 3월25일자. “약방제조 유근(1549~1627)이 선조 임금이 침을 맞는 자리에서 감히 방귀를 뀌었는데, 이는 위인이 경솔한 소치”라는 사관의 사족을 달았다. 이 때문에 예조판서와 좌찬성을 지낸 유근은 ‘임금 앞에서 방귀를 뀐 인물’로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전하 폭삭 늙으셨습니다”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비교사례를 더 들어볼까요. <영조실록> 1744년(영조 20) 8월 20일자를 보죠.
“영조가 우의정 조현명(1690~1752)과 예조판서 이종성(1692~1759)을 접견하고 어진(임금 초상화) 2폭을 보여주며 ‘이것이 나의 40세 때를 모사한 것인데, 이 어진의 봉안처를 찾아야겠다’고 말씀하셨다…”
팩트만 전달한 기사죠. 그런데 같은 날짜 <승정원일기>는 어떨까요.
51살이 된 영조가 41살 때 그린 당신의 초상화를 가져와 신하들과 품평회를 열었다는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백낙천(772~846)의 시에 ‘나이 많은 형이 어린 아우를 마주 대하듯 한다’고 했는데 그 표현이 맞습니다.”(조현명)
“10년 사이에 이렇게 달라졌으니…. 그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구나. 지금 보니 이 때만 해도 젊었구나!”(영조)
영조는 대신들에게 “가까이 와서 과인의 어진을 상세히 보라”고 했습니다. 영조는 특히 시력이 좋지않은 화가 장득만(1684~1764)에게 “안경을 쓰고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안경을 쓰고 임금의 두 어진을 살펴보던 장득만이 ‘돌직구’를 날립니다. 
“지금의 용안이 옛날 모습과 다릅니다.”
임금이 “진짜 다르냐”고 되묻자 우의정 조현명이 ‘확인사살’까지 한다.
“크게 다릅니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물론 성상의 안색도 옛날 어진의 모습과 다릅니다.”
임금이 웃으면서 “아니 경들은 늘 나보고 하나도 늙지 않았다고 하더니 지금은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냈습니다. 그러자 ‘눈치 0점’인 장득만이 임금의 말을 일축해버립니다.
“지금 용안은 수염이 하얗게 변했고, 인색도 많이 좋지않습니다. 전에는 홍조를 띠고 윤기가 있었는데….”
임금의 마지막 항변이 재미있다.
“저기(41살 때의 어진)에도 흰수염이 있구먼(彼猶有鬚白處矣). 뭘.”

<선조실록> 1598년 11월27일자는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 전과를 보고하는 대목에서 사관의 평론을 실어놓았다. 사관은 “기습작전 중 서거한 장군의 시신을 가려놓고 북을 치자 군사들이 장군이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진격하여 마침내 왜군이 대패했다”고 밝혔다.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死舜臣破生倭)고 했다”고 전했다.

신료들도 참 어지간하지 않습니까. 지존인 임금에게 웬만하면 “하나도 늙지 않으셨다”고 덕담을 해도 시원치않을텐데…. 임금의 면전에서 “어찌 그렇게 늙으셨냐”고 했으니 말입니다. 
또 <승정원일기>에는 1736년(영조 12) 12월25일 승정원 가주서(假注書·7급 임시직 기록관)인 남덕로를 비롯해 협시내관까지 징계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임금의 명을 받들고 나가던 남덕로가 문을 닫지않고 나갔다는 겁니다. 한겨울 강추위에 임금을 춥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문책받은 거죠. 
1727년(영조 3) 12월1일에는 살인사건 심리에 참석한 30여명의 신료들이 무시로 화장실을 드나들다가 영의정 이광좌의 지적으로 혼나는 장면도 기록됐는데요. 이광좌는 “연로중신과 재상들도 대소변을 볼 때는 아무리 급해도 허락을 얻은 뒤에야 출입하는데 오늘은 당하관(3품이하)까지 동시에 일어나 나가버려 텅비었다”고 화를 냅니다. 영조는 “그래. 사정이 있다면 혹 출입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번에는 동시에 많이 나가버려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이광좌의 지적에 손을 들어줍니다.
<승정원일기>에는 이밖에도 어전에서 임금이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한편에서 시끄럽게 떠든 신하들, 느린 걸음으로 신료들의 반열을 뚫고 들어온 내시, 자주 졸아서 꾸지람을 들은 신료, 술을 마시고 참석한 승지, 심지어는 임금이 앉아있는 어탑(御榻) 앞에서 코를 곤 내시 등 요절복통의 사건 X파일이 담겨있습니다.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
인용한 사례를 보면 <실록>이 <승정원일기>보다 딱딱하고 무미건조하다는 것을 느끼죠. 그러나 <실록>에는 <승정원일기>가 담아내지 못한 특장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자(사관)가 촌철살인으로 달아놓는 평론인데요.  
<선조실록> 1598년(선조 31) 11월27일자를 봅시다. 좌의정 이덕형(1561~1613)이 8일전(19일) 벌어진 이순신 장군(1545~1598)의 노량해전 전공을 선조(1567~1608)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실록의 사관이 사론을 달아 이순신 장군의 최후를 생생한 필치로 전합니다. 
“기습작전 중 몸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에 맞아 쓰러지니…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자 군사들이 당황했다…옷으로 시신을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했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死舜臣破生倭)고 했다.” 
사관의 평론 덕분에 이순신의 장렬한 최후를 공식자료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율곡 이이(1536~1584)의 혜안도 그렇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의 사관은 1584년 1월1일자에 이이의 부음기사(졸기)를 쓰면서 “나라에 난리의 조짐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는 늘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조정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면서 “임진란이 일어나니 이이가 평소 염려했던 것들이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이이가 주장한 ‘10만 양병설’을 일컫는 말이겠죠.

■중국 기록물은 새발의 피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차이를 이제 좀 느끼셨죠.
<실록>은 그래도 888책 4770만자가 오롯이 남아있는데요. 사고(史庫) 4~5곳에 분산 보관했고, 임진왜란 중 포의의 선비인 안의(1529~1696)·손홍록(1537~1600) 등이 목숨을 걸고 지킨 덕분이죠. 
반면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1592)과 이괄의 난(1624), 화재(1744·1888) 때문에 상당부분 소실됐습니다. 그래도 288년(1623년 인조 1~1910년 융희 4)의 기록(3245책 2억2650만자)이 남아있습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이십오사>(3996만자)와 <명실록>(1600만자)도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에 견주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입니다.
이런 엄청난 역사서를 <실록>의 경우 예문관 소속 봉교(7품) 2명·대교(8품) 2명·검열(9급) 4명 등 8명이, <승정원일기>의 경우 주서(7품) 2명이 불철주야 써내려간 기록을 토대로 편찬한 것입니다. 자신만의 노트인 초책과 붓을 들고 임금과 신하의 일거수일투족을 미주알고주알 기록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뿐이 아니죠. 지금의 국무회의 기록물이라 할 수 있는 <비변사등록>(1617~1892년·273책)도 있고, 정조(1776~1800)가 세손시절(1760·영조 36)부터 기록한 <일성록>(2379책)까지…. 기록에 한맺힌 사람들같죠.

조선왕조실록은 예문관 소속 7~9품(봉교·대교·검열) 관리들이, 승정원일기는 승정원 소속 7품(주서) 관리들이 불철주야 써내려간 기록물을 토대로 편찬됐다.

■인공지능 번역기를 돌려봤더니…
1993년 번역 작업을 끝낸 실록의 경우 데이터베이스(DB) 구축도 마쳐서 지금은 누구나 온라인에서 검색할 수 있는데요. 2021년말부터는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새롭게 번역된 <실록>이 나오기 시작했는데요. 
<승정원일기>의 경우엔 워낙 방대한 분량 때문에 완역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할 것 같군요. 제가 한국고전번역원 정영미 역사문헌번역실장과 통화했는데요. 요즘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2021년까지 전체 2395책 가운데 32%(774책) 번역했다고 하네요. 정영미 실장은 “요즘처럼 80여명이 투입되어 해마다 60책 정도 번역한다면 대략 2048년이면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지난해(2021년) 4월부터는 한국고전번역원 홈피에서 인공지능(AI)을 활용한 한문자동번역서비스를 시작했는데요. 
단어와 구문을 쪼개어 번역했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문장을 통째로 파악해 번역하는 최신 기술을 도입했답니다. 어순, 문맥의 의미와 차이 등을 반영할 수 있어 문장 맥락의 이해도와 정확도를 높였다는데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외에도 지금의 국무회의 기록물이라 할 수 있는 <비변사등록>(1617~1892년·273책)과 정조(1776~1800)가 세손시절(1760·영조 36)부터 기록한 <일성록>(2379책)도 있다. 기록에 한맺힌 사람들 같다.

지금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 가운데 <승정원일기>의 원문 중 필요한 부분을 따서 입력하면 자동으로 번역됩니다.
저는 지난 2017년 당시 한국고전번역원 등 관계기관이 발표한 자료를 바탕으로 전문번역과 인공지능 번역의 차이점을 기사로 다룬 적이 있었는데요. 당시엔 ‘육십(60)하고도 6살 더 먹은 나이(今六十有六矣)’라는 표현을, 인공지능 번역기는 ‘앞의 60(六十)만 읽고, 뒤의 육(有六)’은 그냥 넘겨 60살로 잘못 읽었습니다. 또 ‘거의’로 읽어야 할 단어(恰)을 ‘겨우’라 한 표현도 있구요. 
이밖에 ‘거의 쉬는 달도 없이(殆無虛月)’를 인공지능은 ‘거의 없는 달이 없어’로 잘못 표현했었는데요. 
또 ‘죽을 지경에 놓인 목숨을 연명하게 해주소서(비延濱死之喘)’라는 청유형 문장을 써야 하는데, ‘거의 죽게 된 목숨을 연장하게 해야 합니다’는 당위형 표현으로 잘못 번역했구요. ‘포청죄인호랑(捕廳罪人虎狼)’, 즉 ‘포도청의 죄인인 호랑(虎狼)’이 인공지능 번역기에서는 ‘호린(虎麟)’으로 오역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외에도 지금의 국무회의 기록물이라 할 수 있는 <비변사등록>(1617~1892년·273책)과 정조(1776~1800)가 세손시절(1760·영조 36)부터 기록한 <일성록>(2379책)도 있다. 기록에 한맺힌 사람들 같다.

그래도 인공지능 번역기가 ‘포청죄인호랑’을 ‘포청죄인인 호랑’, 즉 사람 이름으로 인식한 것은 칭찬할 만 한데요. 그러나 ‘호랑’이 당대 인물인 ‘박호랑’이라는 사실을 인공지능 번역기가 알지 못했던 겁니다. 여기에 인공지능 번역기가 사람 이름을 ‘호랑’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호린’으로 잘못 표기한 겁니다. 번역기가 버그를 내고도 시치미 뚝댄 거죠.
그런데 필자가 지난해 4월 서비스를 시작한 한국고전번역원의 자동번역기에 5년 전의 ‘승정원일기’ 기사를 입력해봤는데요.
5년 전에 비해 상당부분 진전됐더라구요. ‘60세’로 잘못 읽었던 것을 ‘66세’로, ‘목숨을 연장하게 해야 합니다’를 ‘목숨을 연장하게 하옵소서’로, ‘포도청 죄인 호린’을 ‘호도청 죄인 박호랑’이라고 정확히 고쳐 읽었더라구요. 
그러나 일반인이 보기에는 인공지능 번역이나 전문가의 번역에서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보면 어색하거나 틀린 번역이 제법 나옵니다.

2021년 4월 개통된 한국고전번역원의 자동번역기를 통해 번역한 <승정원일기>. ‘비천한 신의 나이’를 의미하는 ‘견마지치(犬馬之齒)’와 ‘육십(60)하고도 6살 더 먹은 나이(今六十有六矣)’를 66세로 제대로 번역했다. ‘호랑(虎狼)’을 사람이름인 ‘박호랑’으로 제대로 읽어내는 등 제법 능숙한 번역솜씨를 보였다 . 그러나 디테일에 들어가면 여전히 어색하고 잘못된 번역이 보인다.

고전번역은 디테일이 생명입니다. 원전번역이 틀리면 역사가 왜곡되는 것이기에 한치의 오류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정영미 실장은 “복잡한 맥락과 배경 사건 등은 인공지능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인공지능이 뜻을 정확하게 인지한 표현 중에는 ‘미천한 신의 나이’를 뜻하는 ‘견마지치(犬馬之齒)’와 승정원을 가리키는 ‘후설(喉舌)’ 등이 있는데요. 이런 자주 반복되는 표현들은 인공지능을 참고할 수 있지만 ‘디테일’까지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불과 몇년 전 인간이 인공지능 알파고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한 바둑을 보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경우의 수가 우주의 원자수보다 많고 인간이 5000년 이상 터득해온 바둑의 진리를 ‘알파고’가 이길 수 없다고 큰소리치다가 크게 망신 당했죠. 
그렇다면 인공지능 번역은 어떨까요. 저는 인공지능 번역기가 제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옛 사람의 붓 흔적과 체취를 찾아내고 맡을 수는 없으리라 믿습니다. 사람 냄새 나는 번역, 그것은 인공지능은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새삼 임금과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한치도 빼놓지 않으려 했던 젊은 사관들의 분투에 박수를 보냅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