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격전이 한창일 때 F-80 제트전투 폭격기 편대가 나타나 공산군 진지에 네이팜탄을 쏟아부었다. 활활 타오느는 화염, 그리고 푸른 하늘 높이 뭉클 솟아오르는 소형 원자운 같은 버섯형 흑연. 유엔군은 공산군 진지 아래 병사들이 전부 불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전멸했어야 할 공산군 진지에서 박격포가 날아왔다.”
1952년 불모고지 전투를 취재한 일본기자가 본국에 타전한 기사내용이다. 일본기자는 미군 장교의 말을 인용하면서 “산의 정상에서 20미터 쯤 내려온 공산군의 지하진지를 네이팜 탄이 완전히 불태울 수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대체 공산군 진지에 어떤 장치가 있었기에 이토록 철옹성이었을까. 아니면 이 지역에 만리장성이라도 구축했단 말인가.
그랬다. 정말로 중국군은 이른바 ‘지하만리장성’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그 역사를 살펴보자.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
전쟁이 교착전 양상으로 전개되던 1951년 8월쯤부터였다. 이때부터 중국은 방어진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2차대전의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방벽을 능가하는 견고한 진지였다.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려 고지의 후사면을 이용, 땅굴과 참호를 파고 전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요새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쌍방이 협상을 통해 전쟁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서 전선이 교착화 한 데 따른 것이다.
중공 중앙은 이미 1951년 “현재의 전선을 고수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종식시켜야 한다.”고 지시했다.
당시 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은 신생국이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으니까…. 중국으로선 경제발전과 한국전쟁을 동시에 치를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중국으로서는 전쟁을 확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으로선 1952년이 경제건설준비공작을 진행하는 마지막 해였다. 그 때문에 경제건설에 더욱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1951년 중국의 재정예산은 50년에 비해 60%나 증가됐으나 총예산의 32%를 한국전쟁에 투입해야 했다. 중공 중앙은 51년 10월 전국적인 증산 절약운동을 펼쳐 부대를 재편하고, 지출 절약운동을 펼쳤다. 이른바 ‘항미 원조 전쟁’을 지원하면서도 경제건설이라는 두 가지 모순된 정책을 실현해야 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바로 확전 대신 지금의 전선을 유지하는 국지전의 전략이었다. 중공 중앙은 “조선 전장에서 지원군은 병력과 물자를 절약하여 지속적으로 적극방어작전의 방침을 적용해서 현재의 전선을 견고하게 방어하고 적군을 대량으로 소모시켜 전쟁의 최후승리를 쟁취하여야 한다.”고 지시했다.
특히나 4개월 동안 끌어온 휴전협상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쌍방이 대치 중인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한다”고 합의함으로써 전선이 고착화한다.
쌍방은 문산 서측 11킬로미터 떨어진 임진강 어귀에서 판문점 서방~삭녕 북방~철원 서북방~김화 북방~금성 남방~어운리~문등리~고성 동남방 6킬로미터 지점에 이르는 전장 237㎞의 전선에서 대치했다.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과 포병 탱크 등을 내세워 1개진지에 수 만 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장비가 낙후돼있는 상황에서 전선수호는 중국군의 최고덕목이 되었다.
■동굴작전의 전개
1951년 6월 중순 중국군 제47군단 제140사단은 유엔군의 맹포격을 방어할 ‘고양이 귀’ 모양의 동굴을 대량으로 만든다.
즉 교통호 내부에 각기 한 명 당 두개씩 0.8~1m 넓이 지상에서의 깊이 2~3미터의 동굴을 만든 것이다. 1개 중대 혹은 1대 대대의 진지는 유엔군 1000~2000발 포탄포격과 미군기 10대의 소형폭탄의 폭격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동굴의 효용성이 알려지자 중국군 사령부는 “거점은 반드시 갱도식으로 확보라고 적의 유탄포와 포탄의 공격을 견디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동굴 전법은 연천 마량산과 216.8고지에서 빛났다. 51년 10월 4일~7일 사이 영연방 사단은 매일 1만~2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지만 진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영국군 21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고 모두 700여명의 적을 살상했으며….”
고무된 중국군은 51년 10월 21일 “주요진지는 반드시 갱도식으로 하되 깊이는 5미터 이상으로 하라”고 지시한다. 이로써 서부전선 예성강 하구에서 북한강 동쪽의 양구 문등리까지 전 전선에 걸쳐 8개 중국군 군단과 북한군 3개 군단을 투입, 이른바 갱도식 방어진지 구축작전을 펼친다.
“석탄이 없으면 나무를 땠고, 흙을 운반할 도구가 없으면 손수레를 만들었다. 비밀유지를 위해 낮에는 흙을 동굴입구 운반했고, 야간에 산기슭으로 옮겨 동이 틀 때까지 위장하면서 공사를 계속했다. 쇠로 된 통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타는 숯을 넣은 탄등(炭燈)까지 만들었다.”
공산군은 1952년 말까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250㎞ 길이의 모든 전선에 종으로 20~30킬로미터의 두꺼운 방어선을 갖추고 땅굴을 거점으로 한 거점식 진지방어체계, 즉 지하갱도가 구축됐다.
■땅굴의 원조
그들의 표현대로 ‘난공불락의 지하만리장성’이 건설된 것이다.
250㎞의 전선에 중국군이 판 갱도는 7789통로, 길이 198.7㎞, 엄체호 75만2900개, 노천 및 엄폐식 참호길이 3420㎞, 북한군이 판 갱도는 1,730통로, 길이 88.3㎞, 각종 엄체호 3만1700개, 참호길이 263㎞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군과 북한군이 구축한 지하만리장성의 제원을 계산하면 총 갱도수 9519개, 갱도길이 287㎞, 엄체호 78만4600개, 엄체호 총 길이 3683㎞, 그리고 각종 시설물 10만1500개. 지하장성의 총연장만 해도 4000㎞에 육박하는 철옹성인 것이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구축한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방벽을 능가할 만큼의 진지를 지상이 아닌 지하에 건설한 셈이 된다. 공산군의 방어진지는 공중 및 야포공격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매우 견고하게 설계되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창고가 있었으며, 강당도 있어 생활은 대단히 좋았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공산군이 구축한 지하요새는 고지 정상으로부터 깊이가 2m나 되는 여러 갈래의 교통호가 반사면을 따라 보급소나 취사장으로 보이는 동굴로 통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보면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전 전선에 걸쳐 폭 20~30㎞의 커다란 개미집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마오쩌둥은 1952년 8월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해답은 굴을 파는 것이다, 2층으로 굴을 파면 상대가 공격해올 경우 우린 1층으로 지하도로 들어간다. 상대가 위층을 점령해도 아래층은 우리에게 속해있다”고 자랑했다.
예컨대 국군 5사단이 가칠봉을 점령했을 때는 공산군이 진지 내에서 1개 소대가 동시에 집결하여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식당까지 마련돼 있었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갱도공사가 마무리됨으로써 거점방어체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중국군이 수행한 이 지하만리장성의 개념은 전쟁 후 북한군에게 고스란히 전수됐고, 이후 북한군 전투교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북한군 역시 이 갱도작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남한을 공포로 몰아넣은 땅굴 작전 역시 이 갱도작전의 하나라는 것이다.
■상감령 전투의 승패
중국은 이 지하만리장성이 가장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바로 ‘상감령 전역(戰役ㆍ삼각고지+저격능선 전투)’였다.
유엔군은 중국군의 갱도작전 와해를 위해 갱도 위쪽에 구멍을 파고 폭약을 이용, 폭파를 시도했다. 갱도입구에 폭탄, 폭약통, 수류탄, 유황탄, 가스탄을 투척하거나 화염발사기를 사용했다. 갱도 내부의 공기가 극도로 오염됐으며, 초연, 독가스, 피비린내, 대소변 냄새, 땀 냄새 등이 가득해 호흡이 극도로 곤란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군의 갱도작전은 지독했다.
중국군 전사는 “갱도를 핵심으로 견고한 방어 전략을 펼쳐 1만1000여명의 희생으로 유엔군 2만5000여명을 살상시켰고, 항공기 274대를 격추시켰다”고 자화자찬했다. 마오쩌둥은 정전 직후인 1953년 9월 “아군의 사상자 수는 지하호를 파고 나서 줄었다. 금년 여름에는 이미 21킬로미터에 걸친 적의 정면 진지를 1시간 안에 쳐부술 수 있었고, 수 십 만 발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어 18m나 들어갈 수 있었다”고 자랑했다.
이른바 ‘상감령 전역’의 전황은 종군기자들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중국 대륙에 전해졌다. 중국인들은 ‘지원군의 승전소식’에 열광했다.
중국 위문단은 상감령 전역의 갱도를 찾아 대륙에서 보낸 대량의 위문품과 위문편지를 중국군에게 전달했다.
또한 중국대륙엔 1950년대엔 바로 이 ‘상감령 정신’이 대륙을 풍미했다고 한다. ‘상감령 정신’이란 곧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불요불굴의 의지, 그리고 일치단결로 용감하고 완강하게 전투에 임해 끝까지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정신을 뜻했다.
■‘나의 조국’이 풍미한 중국대륙
1956년에는 영화 ‘상감령’이 중국 내에서 개봉됐으며,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 ‘나의 조국(我的祖國)’은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때 가장 먼저 울려 퍼진 곡이 바로 상감령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이었다고 한다.
2011년 1월 19일 백악관에서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 주석을 위한 국빈 만찬이 열렸다. 이 때 중국의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郞朗·28)의 손끝에서 웅장한 서사시가 연주됐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하지만 이 곡의 정체를 알았다면 만찬장 분위기는 싸늘했을 것이다. 1956년 중국에서 개봉된 영화 <상감령(上甘嶺)>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我的祖國)’이었으니 말이다.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오면(若是那豺狼來了),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영화 <상감령>은 바로 한국전쟁 당시 오성산 일대에서 벌어진 상감령 전투에서 중국군의 승리를 그린 영화이다. 가사에 나오는 ‘승냥이와 이리(豺狼)’는 곧 미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미국은 과연 랑랑의 연주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았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도 비무장지대 일대에는 중국군 등이 구축한 지하만리장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상감령 전투가 벌어졌던 오상산 일대에는 6만명의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지하만리장성이 있다고 한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흔적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판다 외교와 코끼리 외교 (2) | 2014.07.06 |
---|---|
고지쟁탈전에 흘린 젊은 넋들의 피 (0) | 2014.06.27 |
이승만과 김일성의 '합작 다리'를 아시나요 (1) | 2014.06.12 |
태종 이방원이 충성서약에 목맨 이유 (0) | 2014.06.11 |
억울한 여인을 죽인 세종의 잘못된 판결 (2) | 2014.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