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30일 오전 11시.
기관사 한준기씨가 수색 차량기지를 출발했다. 개성역까지 가서 군수물자가 실린 화차를 달고 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러나 개성역에 도착하자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북한 기관차를 인계받고는 다시 평양까지 올라가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31일 오전 1시. 열차가 황해도 평산 한포역에 도착하자 다시 급박한 소식이 들렸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가 불가피해지자 “다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한준기 기관사는 후진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후진으로 개성역에서 간 한씨는 다시 화차 25량을 끌고 파주 장단역에 닿았다. 31일 밤 10시쯤이었다.
“기차를 멈추고, 기관차 승무원은 기차에서 내려 대기하라.”
남과 북이 시차를 두고 건설한 승일교. 북의 김일성이 시작하고 남의 이승만이 완공했다 해서 승일교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임진각 주변의 근대유산
미군의 지시였다. 한씨가 내리자 미군 20여 명이 기차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당시엔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나중에 보니까 기차가 인민군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해서 내린 조치였다.
기관총과 소총세례를 받은 열차는 그대로 멈춰 섰다. 한준기씨가 회고했다.
“총 세례를 받았을 때는 그래도 열차가 레일 위에 있었는데, 나중에 가보니 궤도를 이탈해 있었습니다. 북한이 열차를 끌어가지 못하도록 폭파시킨 것이겠지. 그리고 당시에는 기관차와 탄수차(석탄과 물을 실은 화차), 그리고 화물차 20량이 있었는데 궤도를 이탈한 기관차 말고는 북한이 모두 끌어간 것 같아요.”
총탄세례에다 폭파까지 당해 탈선한 기관차는 파주 장단면 동장리 현장에 그대로 멈춰 섰다. 이 기관차를 모델로 한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구호는 전쟁ㆍ분단의 아픔은 물론 교류와 통일의 염원까지를 담아낸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 기관차는 선로사정이 좋지 않은 산악지대에서도 운행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거리 화물용 증기기관차였다. 해방 전 북한지방에서 주로 운행됐다.
기관차(등록문화재 78호)는 2004년 2월 6일, 파주 구 장단면사무소(제76호)ㆍ장단역 터(제77호ㆍ이상 장단면 동장리)ㆍ죽음의 다리(제79호ㆍ장단면 도라산리) 등과 함께 등록문화재가 됐다. 녹이 심하게 슨 증기기관차는 2006년 11월부터 보존처리가 이뤄져 2009년 6월25일부터 말끔히 복원된 모습으로 임진각 주변, 독개다리 초입 부근에 이전 전시되고 있다.
등록문화재 79호로 등록된 ‘죽음의 다리’(장단면 도라산리)는 현재 ‘희망의 다리’, ‘생명의 다리’라는 아주 상반된 이름으로도 일컬어진다. 다리 주변에서 미군들이 북한군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해서 ‘죽음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경의선 복구 관계자들이 ‘죽음’대신 ‘생명’ 혹은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출렁교. 보초 서는 군인들이 남대천을 건너기 위해 만든 다리. 지금은 종잇조각처럼 아슬아슬 걸려있다.
■끊겨진 금강산 철도
‘철의 삼각지대’로 발길을 돌려본다.
철원 근북면 유곡리와 김화읍 도창리에 걸쳐 있는 ‘금강산 전기철도교량’(등록문화재 제112호)이 눈에 밟힌다.
민통선을 지나 민북 마을인 정연리를 거쳐 가는 길. 드넓은 철원평야 사이로 쭉 뻗은 이 464번 도로엔 이 따끔 등장하는 군부대 차량 이외엔 오가는 차량을 볼 수 없다. 세상의 온갖 시름을 훌훌 던져버리고, 뻥 뚫린 도로를 달리다 보면 뼛속까지 상쾌해진다.
이 철도는 원래 일제가 강원도 창도에서 생산되는 유화철(硫化鐵)을 함경도 흥남 제련소를 경유,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부설했다.(1926년) 금강산 관광객들도 이용했는데, 철원역~내금강까지 116.6킬로미터를 하루 8회 운행했으며 4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요금은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인 7원56원이었고, 1936년 한해에 15만4천명이 이용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이 남침 준비를 위한 군수물자 수송에 활용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거의 폐허화 했고, 일부는 현재 농로로 이용되고 있다.
필자가 처음 이 교량을 찾은 것은 2007년 여름이었다. 당시 교량은 녹이 심하게 슨 철제 난간에, 바닥엔 철로가 사라지고 없고, 빛바랜 침목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갈 수 없는 다리 입구는 철조망이 막고 있었다.
철조망을 바로 앞에 두고 길게 뻗어간 다리를 바라보면 과연 일제의 수탈과, 전쟁, 그리고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절절이 가슴 속으로 파고 든다. 여기에 다리 밑에 내려가면 언제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한탄강 수직단애가 고색창연한 교각 사이로 펼쳐져 있었으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린 지 1년 후인 2008년. 그 때의 그 기분을 상상하며 다시 찾아왔지만…. 눈을 의심했다.
처음 보았던 철조망과 빛바랜 침목열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다리는 새빨간 철제 난간에, 바닥은 정교하게 다듬은 새 나무를 깔아놓았다. 갈 수 없는 다리가 갈 수 있는 새로운 다리로 탈바꿈 한 것이다. 옛 것을 복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옛 것에 담겨 있는 역사적 상징성이라는 무형의 가치까지 없애가며 하는 복원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정월대보름 답교놀이로 유명했던 김화 암정교. 저격능선 전투 땐 생과 사를 넘나든 피란민들로 가득찼다고 한다.
■암정교 답교놀이
찜찜한 기분으로 발길을 돌려 한탄강 지류인 남대천 줄기에 놓여있는 ‘암정교’를 찾아본다.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백골부대의 관할 민통선 이북에 놓인 암정교는 1930년대 건립됐다. 평강과 김화를 연결해준 다리다.
폭 4미터 높이 7미터의 다리인데 한국전쟁 때 포탄세례를 맞아서인지 다리 곳곳에 녹슨 철골이 드러난 앙상한 모습이다.
일제시대 때만 해도 정월대보름 답교놀이가 행해지기도 했단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저격능선 전투가 벌어졌을 때 생과 사를 넘나드는 처절한 다리가 됐다. 피아간 후퇴와 진격을 거듭하는 다리였던 것이다.
피란민들이 남부여대하면서 건너던 다리이기도 하다. 암정교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만국기가 강풍에 흩날리듯 아슬아슬 걸려있는 다리가 보인다. ‘출렁다리’라고 일컫는 이 다리는 보초를 서기 위해 남대천을 건너는 군인들을 위해 만든 다리였다.
이제는 효용가치를 잃고 이리저리 찢긴 채 종이조각처럼 위태롭게 걸려있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다.
철원읍 월정리에는 월정리역이 으로 가본다. 경원선(서울~원산)이 쉬어가던 월정리역은 남방한계선 철책 바로 앞에 있는 최북단 종착역이다.
역내에는 한국전쟁 당시 마지막 여객열차의 잔해와 유엔군 폭격으로 부숴 진 북한군 화물열차가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 채 전시되고 있다.
■급수탑에 담긴 슬픈 사연
이밖에도 ‘철의 삼각지대’엔 숱한 한국전쟁과 분단의 유산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유명한 ‘노동당사’(제22호ㆍ철원읍 관전리)는 이른바 안보유적지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북한은 주민들로부터 1개 리(里)에 백미 200가마씩을 성금명목으로 거둬들여 연건평 570여 평(지상 3층)의 공산당사를 지었다. 북한은 내부공사 때는 보안을 위해 열성당원 이외에는 일반인들의 작업을 철저히 금지했다고 한다. 북한은 이 당사에서 중앙당으로부터 내려오는 극비사업과 철원ㆍ김화ㆍ평강ㆍ포천ㆍ연천지역 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했고, 대남공작을 주도했다고 한다.
철원읍 율이리에 있는 ‘수도국지내 급수탑’(제160호)은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다.
이 급수탑은 철원읍 주민들의 식수 공급을 위해 1936년 건립됐다.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 북한은 노동당사와 내무서 등에 감금된 반공인사들을 분류하여 이곳에 이송했다. 그런데 1950년 10월 유엔군이 북진하자 다급해진 북한은 이곳에 감금돼있던 300여 명을 총살하거나 물탱크 속에 생매장 하고 후퇴했단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의 주인공인 장단역 증기기관차. 최근 말끔히 복원돼 임진각 독개다리 옆에 전시되었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만남
동송읍 장흥리~갈말읍 문혜리를 잇는 ‘승일교’(제26호)의 사연도 복잡하고도 재미있다.
훗날 한국판 ‘콰이강의 다리’라는 별명이 붙은 이 다리의 공사는 1948년 8월부터 철원 및 김화 지역 주민들이 5일 교대제의 노력공작대라는 명목아래 총동원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공사는 다리의 북쪽 부분만 완성한 것으로 중단됐다. 전쟁 후 적치하였던 철원지역을 확보한 한국정부가 공사를 재개해 1958년 완성했다. 다리는 커다란 두 개의 아치 위의 상판을 받치는 작은 아치의 모습이 다른데 이것은 바로 남북이 시차를 두고 각기 다른 공법으로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남북합작의 구조물’인 것이다. 문제는 ‘승일교’라는 명칭과 관련된 논란이다. 김일성(金日成) 시절에 착공해서 이승만(李承晩) 시절에 완성했다고 해서 이승만의 ‘승(承)’자와 김일성의 ‘일(日)’자를 따서 지었다는 설과, 한국전쟁 때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던 중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박승일(朴昇日) 대령의 이름을 땄다는 설 등이 팽팽하게 맞섰다.
하지만 지금 다리 곁에 조성된 공식 안내표지에는 전자의 설을 따르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전쟁 때 기독교반공청년들의 활동장소였다는 ‘감리교회’(제23호ㆍ철원읍 관전리),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뼈대만 남은 ‘얼음창고’(제24호ㆍ철원읍 외촌리), 공산치하의 검찰청이었던 농산물검사소(제25호ㆍ철원읍 외촌리), 전쟁으로 사라진 도시(철원)의 모습을 증언해주는 ‘구 철원 제2금융조합건물지’(제137호ㆍ외촌리) 등도 문화재의 반열에 오른 철원의 전쟁유산들이다.
화천 상서면 다목리에는 ‘인민군 사령부 막사’(제27호)가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현재 우리 군 부대 안에 있는 모습이 이채로운데, 당시 북한군의 내무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국제적인 전쟁유산으로 각광받을 수 있는 근대문화유산은 파주 적성 마지리에 있는 ‘영국군 설마리 전투비’(제408호)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전투비는 1951년 적성 칠중성(캐슬고지)과 이곳 설마리에서 중국군 3개 사단과 싸웠던 영국군을 기리는 참전기념비이다.
비록 영국군은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궤멸 당했지만, 만 3일을 이곳에서 버틴 덕분에 서울의 재함락을 막았다. 특히 이 전투비는 훗날 세계적인 건축가가 된 아널드 슈워츠만이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분단-전쟁-냉전의 흔적들
전쟁유산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앞서 언급한 전쟁과 분단의 흔적들이 문화재의 반열에 올랐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비무장지대 일원에는 지구상 ‘최후의 화약고’라는 오명에 걸맞게 분단-전쟁-냉전을 상징하는 각종 흔적들이 집중돼있다.
한국전쟁을 종식시킨 정전협정에 따라 한반도 중부는 임진강 변에서 동해안까지 248킬로미터에 걸쳐 이른바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군사분계선은 용어대로 선(線)이 아니다.
임진강변에 세워진 군사분계선(MDL) 표지물 제0001호부터 동해안의 제1292호까지 모두 1292개의 표지물이 200미터 간격으로 세워진 점(點)의 개념이다. 표지판 가운데 696개는 유엔군의 관리책임이고, 596개는 북한과 중국의 관리책임이다.
최전방에 가서 그 군사분계선을 관측하려 한다면 그것은 낭패다. 정전 이후 60년이 지금 군사분계선 표지물은 대부분 녹슬었거나 비바람 등으로 크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비록 이렇게 녹슬고, 훼손되었다지만 동서냉전의 상징이자, 민족의 분단을 규정한 군사분계선 1292개 자체가 ‘전쟁 및 분단 유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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