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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태종 이방원이 충성서약에 목맨 이유

 “우리들 일을 같이 한 사람들은 임금을 섬기고, 친구를 신의로 사귀고, 부귀와 이익을 다투지 말며, 다른 자의 이간을 듣고 의심을 품지 말며, 과실은 바로잡고, 환란이 있으면 서로 구원해 줄 것입니다.”
 왕씨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1392년 7월 17일)한 지 두 달이 지난 뒤인 9월 28일, 정도전과 배극렴 등 개국 공신들이 총출동했다.
 태조 이성계를 향한 충성서약식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개국 공신들은 “처음과 끝이 같도록 충성을 바치겠다”면서 “자손 대대로 이 맹약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신(神)이 벌을 내릴 것”이라 재차 다짐했다.

 

조선시대 공신들의 충성서약을 받던 회맹터. 지금의 청와대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배신자는 대대로 복수할 것이다”
 그러나 “공신 간 절대 반목하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는 금방 무효가 되고 말았다. 충성 서약식 때 마신 ‘회맹의 피’가 입에서 흐르지도 않았는데, 왕자들 간, 개국공신 간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이 1398년과 1400년 벌어진 제1, 2차 왕자의 난이다.
 이런 일련의 정변으로 형제 간, 개국공신 간 피아가 구별되지 않은 혈전이 벌어졌고, 최후의 승리자는 태종 이방원이었다
 이복동생과 친형(방간) 등 피를 나눈 형제들은 물론 정도전과 남은 등 개국공신을 제거하고 꿈에 그리던 옥좌에 오른 태종. 그러나 피로 일어섰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개국공신·정사공신·좌명공신 등 삼공신이 일찍이 충성서약을 하지 않았다. 임금은 삼공신이 화합하지 못할까 염려했다.”
 1404년(태종 4년) 11월 16일 태종의 이같은 우려를 불식시키려고 개국·정사·좌명공신 등 삼공신 66명이 회맹(會盟)했다. 이 자리에는 각 도의 감사와 변진(邊鎭)·주(州)·목(牧)의 지방관(分憂者)들도 열외 1명 없이 참석했다. 
 “권간(權奸)이 사심을 품고 맹세를 져버리고 유얼(幼孼)을 끼고 적통을 빼앗고…. 그 이후에는 다시 간사한 이가 집안끼리 싸우게 하여 거병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것을 모두 평정했고…. 맹세를 어기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앞으로는 명세를 배신하는 자는 자손에게까지 그 죄가 미칠 것입니다.”(<태종실록>)
 삼공신은 개국공신(1392년 개국 때 공을 세운 이들)과 정사공신(定社功臣·1398년 1차 왕자의 난 공신), 좌명공신(佐命功臣·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공신)을 뜻한다. 이 날의 회맹문에서 언급한 이야기는 분명하다. ‘권간’은 제1차 왕자의 난 대 제거된 정도전 일파를 뜻한다. ‘유얼’은 서자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세자가 됐다가 역시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방석을 의미한다. 또한 ‘간사한 이 때문에 집안끼리 싸웠다’는 것은 박포의 이간질 때문에 형제간에 정권다툼(이방원과 이방간의 골육상쟁)을 벌였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태종은 늘 좌불안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태종은 집권 17년이 지난 1417년(태종 17년) 4월 11일에도 공신회맹을 감행한다.
 “만약 이 맹세를 지키지 못할 때는 귀신이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배신하면 화가 자신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후손에게도 미칠 것이다. 절대 배신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이 날의 회맹은 삼공신 뿐 아니라 공신의 자녀들까지 총동원됐다는 것이다. 
 태종 뿐이 아니었다.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1625년(인조 3년) 4월 17일에도 회맹제가 열렸다. 인조반정에 큰 공을 세운 공신과 그들의 적장자 391명이 참석했다. 그 맹서문을 담은 <십칠공신회맹록>과 <인조실록>을 보자.
 “임금이 신무문의 회맹제단에 행차했다. 우리 동맹인들은 지금 맹세하노니~, 배신하는 일도 없이 억만년토록 유지하고자 한다.”
 맹서문은 인조반정에 나선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혼탁한 시대를 만나 모후(母后)는 금고 당하고, 형제는 혹독한 형벌에 걸렸으니~ 다행히 우리 구신(舊臣)들과 덕을 함께 한 선비들의 힘을 얻어~”(<인조실록>)
 광해군 때문에 인목대비가 유폐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한 것을 지칭한 것이다. 이로써 사직이 위태로워졌는데, 나라를 끔찍하게 여긴 신하들과 손잡고 반정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한양도성도>에 표시된 홰맹터.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밖 위쪽에 회맹단이 보인다.(점 선안) 공신들이 임금을 향해 충성을 서약한 곳이다

■피를 바르는 의식
 사실 ‘회맹(會盟)’의 의식은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의 산물이었다.
 천자국인 주나라가 힘을 잃은 뒤부터 시작됐다. 강대한 제후국 군주는 이름 뿐인 주나라왕을 대신하여 천하를 주물렀다.
 ‘회(會)’는 일정한 의제와 장소, 시간을 정해 제후국 군주들이 모이는 것을 이른다. ‘맹(盟)’은 회맹에 참여한 제후들이 차례로 제물의 피를 입술에 바르는 의식을 말한다. 이를 ‘삽혈(삽血)’이라 한다.
 회맹을 주도한 제후가 가장 먼저 삽혈했다. 이 제후는 패자(覇者)로 추대됐다. 의제 합의가 이뤄졌을 때는 맹서문을 작성했다. 맹주(패자)는 제물인 소의 왼쪽 귀를 절단해서 그 피로 조약문을 작성했다. 조약문은 ‘배신하는 자는 공동토벌로 응징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맹서(盟誓)’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회맹은 강화조약과 군사동맹, 우호증진 합의 등을 다루는 일종의 외교행위였다. 회맹을 통해 상호우호조약을 맺고 전쟁을 방지하기도 했다. 반면 연합전선으로 불의를 행하는 제후들을 응징했다. 때로는 사직이 끊어진 나라를 회복시켜주기도 했다. <춘추좌전>은 “외국의 환난을 구제하고 재해를 분담하며 허물있는 자를 토벌하는 것”이라 했다.
 예컨대 ‘춘추 5패’ 가운데 첫번째 주자인 제나라 환공(기원전 685~643)은 연합군을 결성하여 북적(北狄·오랑캐)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형나라를 구했다.
 그런 뒤 형나라의 사당을 지어주고, 소와 말, 곡식을 원조했다. 이를 ‘존망계절(存亡繼節)’, 즉 패망한 제후국을 다시 세우는 것이라 했다. 제 환공을 패자로 이끈 명신 관중은 이렇게 패자의 임무를 설파했다.
 “안으로는 현인을 찾는다. 동시에 백성을 자애롭게 돌보고 밖으로는 망한 나라를 존속시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한다. 죽은 왕의 자손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관자> ‘중광’)
 제 환공에 이어 ‘춘추5패’에 이름 석자를 기록한 이들은 ‘진(晋) 문공(기원전 636~628)-초 장왕(기원전 614~591)-오왕 부차(기원전 496~473)-월왕 구천(기원전 496∼465)’ 등이다.  

 

 ■취리산 맹약사건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삽혈’의 의식이 기록돼 있다.
 665년(신라 문무왕), 문무왕과 당나라 칙사 유인궤, 웅진도독 부여륭 등 3인이 웅진 취리산에서 맹약을 맺었다. 
 무슨 맹약이었던가. 부여 륭은 의자왕의 아들이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뒤 부여 륭을 웅진도독으로 내세웠다.
 그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백제 고토를 영원히 지배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신라는 만만치 않았다. 백제 유민들도 쉼없이 항거의 기치를 들었다. 그러자 당나라는 유인궤를 앞세워 ‘회맹의식’을 벌인 것이다. 유인궤는 다음과 같은 맹서문을 남긴다.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고 영영토록 친목하여 재앙을 서로 나누고 서로 도와 은의(恩誼)를 형제처럼 해야 할 것이다. 맹세를 어겨 군사를 일으키면 귀신의 재앙을 받으리라. 제사가 끊겨 후손이 없도록 할 것이다.”
 희생의 피를 마신 3자는 희생과 예물을 제단의 북쪽 땅에 묻고 맹서문을 신라 종묘에 간직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회맹’은 외교현안을 풀기 위한 다자간 혹은 양국간 정상회담의 성격이 강했다.

 

 ■회맹이 혈맹일 수밖에 없는 이유
 하지만 조선시대의 ‘공신회맹’은 달랐다. 그야말로 공신들이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충성서약의 장’이었다.
 그리고 그 무대였던 회맹단이 바로 지금의 청와대 본관 자리에 있었다.
 1770년(영조 46년)에 제작된 지도(‘한양도성’)를 보자. 신무문의 북쪽, 연호궁의 동쪽에 회맹단이 표시돼있다.
 이곳에서 벌어진 ‘공신회맹’은 아주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렀다. 왕과 왕세자가 직접 참석했다. 회맹에 참석하는 이들은 7일 전부터 재계했다. 제사와 삽혈을 위해 피를 제공할 희생물은 소, 양, 닭, 돼지 등이 애용됐다.
 왕과 공신들은 제단 앞에서 4번의 절을 올렸다. 천지신명의 신주 앞에 향불을 태웠다. 그런 뒤 삽혈동맹을 펼쳤다. 피를 입에 바르는 의식이었다.
 뒤를 이어 맹서문을 읽었다. 이들은 ‘혈맹’이 됐다. 의식에는 공신들은 물론 때에 따라서는 공신의 자식들까지 동원됐다. 이들은 대대손손 임금을 배신한다면 천지신명의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것을 맹서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바늘을 훔친 이는 주살되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문에 인의가 있다(竊鉤者誅 竊國者侯 侯之門仁義存).”(<사기> ‘유협전’)
 가까이는 5·6공 신군부세력을 처벌할 수 없었던, 즉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이 있지 않던가.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대역죄일 수밖에 없는 것. 생사를 넘나든 정변을 성공으로 이끈 이들이 모여 샴페인을 터뜨리고 주군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의식을 치른 곳…. 그곳이 바로 지금의 청와대 터였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