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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로 뽑혀 원나라로 끌려가는 날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자도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원나라의 간섭이 극에 달했던 1335년이었습니다. 이곡(李穀·1298~1351)이 상소문을 올려 원나라가 강제로 뽑아가는 공녀(貢女)들의 피맺힌 사연을 호소했습니다. 말 그대로 ‘공물(貢物)’로 끌려가는 여인이었으니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끌려간 소녀들의 상당수는 고된 노동과 성적인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1333년 14살의 나이로 끌려간 기씨 소녀가 바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소녀의 첫 직책은 원 황제 순제(재위 1333~1372)의 차와 음료를 주관하는 궁녀였습니다. 소녀는 단번에 황제의 넋을 빼앗았습니다. 원나라 문헌은 “기황후는 은행나무 빛 얼굴에 복숭아 같은 두 볼, 버들가지 처럼 한들한들한 허리로 궁중을 하늘하늘 걸었다.”고 했습니다. 또 “기씨가 지극히 영민하고 총명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씨가 황제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제2황후의 자리에 오른 그녀의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1353년) 기황후는 마침내 대원제국의 안방마님이 됐습니다. 기황후의 드라마틱한 출세기에 이어 원나라에 고려열풍이 붑니다. 원나라 조정에는 고려풍의 옷, 즉 고려 패션이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고려여인들로 구성된 여악이 춤과 노래로 원나라 백성들을 매혹시켰습니다. 원나라 시를 보면 “보초 서는 병사들은 고려언어를 배우네. 어깨동무 하며 낮게 노래 부르니 우물가에 배가 익어가네.(衛兵學得高麗語 連臂低歌井卽梨)”(연하곡서·輦下曲序)라는 대목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소녀시대>가 전세계에 K팝 열풍을 이끌 듯이…. 하기야 K팝의 K가 코리아, 즉 고려 아닙니까. 그러고보면 기황후는 고려판 한류의 원조였던 셈입니다. 기황후가 키운 걸그룹들이 세계를 호령했던 몽골제국(원나라) 백성들을 매혹시켰으니 말입니다. 지금도 경기 연천군 연천읍 상리에는 심상치 않은 마을이름과 무덤이 있습니다. 재궁동(齋宮洞)과 황후총(皇后塚)입니다. 원나라의 멸망기에 행방이 묘연해졌던 기황후가 죽은 뒤 고향에 묻혔다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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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연천읍 상리라는 곳에는 심상치 않은 동리이름과 무덤이 있다.
바로 재궁동(齋宮洞)과 황후총(皇后塚)이다. 재궁이란 능이나 종묘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이 아닌가. 그리고 황후총이란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황후이며, 그 황후는 다름 아닌 원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ㆍ몽골명 토곤-테무르칸)의 부인인「기(奇)황후」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명색이 황후가 묻혀있는 곳이라는「문제의 무덤」은 찾기도 힘들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설명판이 없다면 무덤의 흔적을 확인하기도 어렵게 무너진 상태다.
그야말로 무덤은 초토화 상태이다. 무덤을 두른 돌무더기의 흔적이 어렴풋 남아있고, 석물이 하나 누워 있다고 하지만 수풀이 무성한 지금 그 모습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몇 그루의 잡목을 두고 온통 수풀이 덮어 싼 형국이니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포기하고 내려올 수밖에 없다. 거기에『이곳이 황후총이요.』하고 쓴 설명판이 머쓱해질 판이다.
하기야 일제강점기에 두 번이나 도굴을 당했다니 그 흔적조차 제대로 남아날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1995년 연천문화원 지표조사 때 황후총 주변에 무덤의 바로 앞에서 속절없이 나뒹구는 석물(石物) 2기가 수습됐고, 연못지도 확인됐다. 그리고 청자편과 토기편도 수습됐다.
『석물 2기 중 하나는 목이 잘렸지만 나머지 1기는 온전하게 보존돼있었다. 석물의 모양이나 크기가 재미있는데, 꼭 12지신상의 하나인 원숭이 같기도 하고 동자상 같기도 하고….』(장장식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온전하게 남은 이 석물은 연천문화원 전시실로 옮겨졌다. 지금은 이것이 석물인지도 가물가물한 나머지 1기만이 처연하게 무덤을 지키고 있을 뿐. 이 모습도 수풀이 사라진 겨울 한철이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다만 무덤이 조성된 이곳 주변에 허다한 무덤들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곳이 만만치 않은 명당임을 웅변해주고 있다.
그리고 생뚱맞게 서있는 무덤의 안내판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기황후(奇皇后)」, 즉 고려 말 대제국 원나라를 쥐락펴락한 천하의 여걸임을 알려주고 있다.
대원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의 황후였으며, 말년에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ㆍ재위 1368∼1398년)에 쫓겨 행방이 묘연했던 기황후가 왜 이곳에 묻혔다는 것인가.
『동국여지지』「연천조」를 보자.
『속전에 따르면 연천현 동북쪽 15리에 원나라 순제 기황후의 묘가 있고, 석인ㆍ석양ㆍ석물이 있으나 지금은 밭을 갈고 소를 기르는 곳이 되었다.』
1899년 간행된『연천현읍지』를 보면 이곳에 묏자리를 쓴 이유가 간단하게 나온다.
『(연천현) 동쪽 20리 재궁동엔 원나라 기황후의 묘가 있는데, 자신이 죽으면 고국에 묻히기를 원했다.』
-성의 노리개가 된 공녀의 비참한 신세
기황후.
그는 누구인가. 30여 년 간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을 쥐락펴락했던 여걸이다.
그는 행주(幸州) 기(奇)씨의 후손인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때는 바야흐로 끊임없는 몽골의 침략(1231~1258년)으로 무릎을 꿇었던 비참한 시대. 당대 고려 여성들은 이른바 공녀(貢女)라는 이름으로 몽골로 끌려갔다.
공녀란 말 그대로 공물로 바치는 여자라는 뜻이니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 어떤 경우에는 집단혼인을 위한 대량구녀(大量求女)까지도 충당해야 했다.
원나라는 1274년(원종 15년) 귀순한 남송(南宋)의 군사들에게 처를 얻어준다는 구실로 고려에 공녀 140명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최초의 공녀였다.
고려에서는 이 일을 위해「결혼도감(結婚都監)」또는「과부처녀(寡婦處女) 추고별감(推考別監)」을 설치했다. 원나라에 바치는 공녀는 1년에 두 번, 적게는 2년에 한번 꼴로「모집」됐다. 이렇게 끌려간 공녀들은 운이 좋으면 원나라 황족이나 황태자, 혹은 귀족의 배우자가 되기도 했다. 이 글의 주인공인 기황후를 비롯해 원나라 인종(仁宗ㆍ아요르-바리바드)의 편비(偏妃)였다가 1328년(충숙왕 15년) 황후로 책봉된 김심(金深)의 딸 다마시리-카톤(달마실리ㆍ達麻實利)는 가장 출세한 경우다.몽골이름은 박원길씨의『조선과 몽골- 최덕중, 박지원, 서호수의 여행기에 나타난 몽골인식-』(소나무ㆍ 2009년)에서 참고했다.
이외에도 원나라 권신인 엘테무르(燕帖木兒)의 후처로 들어간 보얀테니(不顔帖稱) 등도 처지는 좋았다.
오죽했으면 원나라 황실의 안방이 모두 고려여성들이 독차지 했을까.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 이곡(李穀ㆍ1298~1351년)은『고려 부녀자들이 황후나 황비의 지위에 있고, 왕과 제후의 배우자가 되었으니 공경(公卿) 대신 등의 고관대작들이 고려의 외손에서 많이 나왔다.』(『고려사』「열전」‘이곡전’)고 했다.
무덤 옆에서 확인된 추정 석수(石獸).
하지만 이들은 축복받은 케이스.
대부분은 이역만리 타향에서 고된 노동과 성적인 학대에 시달리면서 평생 살아야 했다. 때로는 인신매매 시장에 끌려가 성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대부분의 규수들은 공녀로 선발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공녀선발 때는 왕의 호위부대가 전국의 민가를 이 잡듯 뒤졌으며, 민가에서는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 딸을 시집보내는 조혼풍습까지 성행했다. 때로는 위장결혼까지 서슴지 않았다.
조정은『양갓집 처녀는 관청에 신고한 이후에 혼인하라.』(1287년),『16세 이하 13세 이상의 여인은 마음대로 혼인할 수 없도록 하라.』(1307년)는 왕명을 내리기까지 했다.
공녀의 자격은 원래 평민 이상의 양갓집 규수였으며, 일단 공녀로 선발되면 왕족이라도 빠져나오기 불가능했다.
왕족인 서원후(西原侯) 왕영(王瑛)의 딸이 대표적이다. 왕영은 고려 20대왕인 신종(재위 1197~1204년)의 증손. 그런데 원나라 여인으로 충렬왕비가 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모국을 방문하기 위해 공녀를 차출했는데, 그 안에 왕영의 딸이 포함됐다.
이 왕영의 딸은 충렬왕-제국대장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세자(충선왕)가 일찌감치 세자빈으로 점찍어 두었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세자로서도 서슬 퍼런 어머니의 결정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원나라로 가던 도중, 온천에 잠깐 머물렀던 세자의 안색이 매우 좋지 않자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그 연유를 물었다. 세자는 부들부들 떨며 겨우 대답했다.
『실은 공녀로 뽑힌 여자 가운데 제가 세자빈으로 점찍어놓은 여인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제서야 어머니 제국대장공주는 왕영의 딸을 풀어주었다.결국 세자(충선왕)는 2년 뒤인 1289년 동성(同姓)인 서원후의 딸과 혼인했는데, 이 여인이 바로 충선왕의 부인인 정비(靜妃) 왕(王)씨(?~1345년)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제아무리 세자의 신분(충선왕)이었어도 저승사자와도 같은 어머니에게 대로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황제의 넋 뺀 14살의 어린 고려 공녀
눈물 속에 가마를 원나라 행 가마를 탔을 어린 소녀들의 심정을 잘 표현한 시가 있다.
『집안 깊숙한 곳에 숨어 조심했는데, 선발하는 저 많은 눈길 어찌 감당할까나.(중략) 부모의 나라가 멀어지니 혼(魂)이 바로 끊어지고, 황제의 궁성이 가까워지니 눈물이 비 오듯 하는구나.』(김찬ㆍ金贊의『동녀시(童女詩)』)
비참한 상황을 보다 못한 이곡은 충렬왕 복위 4년(1335년) 구구절절한 상소문을 올린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친족이 모여 밤낮으로 곡을 하며 웁니다. 공녀가 가는 날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너무 비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자도 있습니다.』
이곡이 피를 토하는 상소문을 올리기 2년 전인 1333년.
기자오의 딸 기씨도 14세의 꽃다운 나이에 원나라로「끌려갔을」것이다. 어린 기씨 소녀를 원나라 궁녀로 소개한 이는 고려인 출신인 환관 고룡보(高龍普ㆍ몽골명 투멘델)였다고 한다. 기씨 소녀의 첫 직책은 원나라 황제 순제(재위 1333~1372년)의 차와 음료를 주관했던 궁녀였다. 하지만 우리네 여인네답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다. 총명한 데다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기씨는 황제의 넋을 뺀다.
『원궁사(元宮祠』원나라 궁정내부의 비사를 칠언절구로 읊은 것이다.
에 나온 기씨 소녀의 미모.
『기황후는 은행나무 빛 얼굴에 복숭아 같은 두 볼, 그리고 버들같이 한들한들한 허리로 궁중을 하늘하늘 걸었다.』
게다가『원사』「후비열전」에는 기씨가「영할)」,즉 지극히「영민하고 총명하다」고 표현돼있다.
덧붙여 황제인 순제(順帝)의 기구한 사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숙부인 문종(文宗ㆍ재위 1328~1329년, 1330~1332년)의 칙명으로 고려의 궁벽한 섬 대청도에서 1년간 유배당한 적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기구한 운명이었던 것이다.
황제에 오른 순제의 정실황후는 원나라 명문 귀족 엘테무르(燕帖木兒)의 딸인 타나시리(答納失里)였다. 하지만 순제는 전형적인 몽골여인이자 권신(權臣)의 딸인 타나시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기야 춥고 건조한 초원지대에서 사느라 성격이 드세고 피부가 거친 몽골 여인과 뚜렷한 사계절 속에서 금이야 옥이야 하며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살았던 고려 여인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가문의 권세를 배경으로 뻣뻣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황후가 고울 리 없었을 것이다.『경신외사(庚申外史)』명나라 초 권형(權衡)이 쓴 원나라 시대 야사.
는『타나시리는 권신의 딸이라는 점을 뽐내며 어린 황제를 가벼이 여겼다.』고 기록해 둘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어린 순제의 마음은 아름답고 영특한 기씨에게 향할 수밖에…. 그러자 질투심에 불탄 타나시리 황후는 기씨를 가만 두지 않았다. 여러 차례 채찍으로 기황후를 때렸으며(『원사』「후비열전」), 야사에 따르면 심지어는 인두로 지지기까지 했다.
재궁동과 황후총의 기록을 남긴 마을과 기황후 무덤 원경. 현재 마을엔 인삼농장과 장어양식장이 있다./심현철씨 촬영
하지만 기씨는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여느 고려여인처럼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순제가 황위에 오른 지 불과 2년만인 1335년 원나라에 정변이 일어난다. 순제의 또 다른 권신인 바얀(伯顔)이『타나시리 황후 가문이 반역을 일으켰다.』면서 일족을 주살한 것이다. 이것이「순제모역사건(順帝謀逆事件)」이다.
황후 타나시리는 바엔이 이끄는 군사에 쫓겨 도망 온 친동생 타라카이(塔刺海)를 어좌(御座)밑에 숨기고 어의(御衣)로 감쌌다. 황후는 황제에게『동생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동생을 감싼 어의는 끝내 피로 물들었다. 황제는 황후의 애원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너의 형제들이 반역했는데, 너는 어찌하여 그들을 감싸려 하는가.』
이 역모사건으로 쫓겨난 타나시리 황후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러자 순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토록 총애해온 기씨 소녀를 황후로 세우려 한다.
『원사』「기황후전(완자홀도)」을 보면『황제가 타나시리가 죽자 기씨를 (황후로) 세울 뜻을 품었다.』고 돼있다.
-세계제국의 안방마님이 되다
몽골건국 790주년을 맞아 그린 기황후의 남편 순제의 표준영정.
정변을 일으킨 바얀 가문 역시 옹기라트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니 순제와 기씨의 염원은 일단 일장춘몽으로 끝난 것이다. 바얀을 선두로 한 신료들의 극력 반대 속에 정후의 자리는 바얀의 딸인 바얀코톡토(伯顔忽都)에게 돌아갔다.
정변으로 실권을 잡은 바얀은 몰락한 타나시리 가문을 능가하는 탐욕가이자 야심가였다.『철경록(輟耕錄)』원나라 말기 도종의(陶宗儀)가 1366년에 쓴 수필은『바얀은 직함만 해도 무려 246자에 이를 만큼 대권세가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니 어린 황제의 사랑 외에는 배경이 없었던 기씨로서는 어쩌면 자중자애 하는 것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1339년 기씨가 순제의 아들(황태자) 아요르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을 낳으면서 사태가 반전된다.
상첨화로 나라를 쥐락펴락했던 바얀이 1340년 2월『국정을 농단하는 등 전횡을 일삼고 황제의 윤허도 없이 황족을 죽였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축출되고 만다.
일거에 바얀을 축출한 황제가 한 달 만에 한 일이 기씨를「제2황후」로 책봉하는 일이었다.
눈물을 뿌리며 고국을 떠난 14살 소녀가 21살의 나이로 세계를 호령하는 원 제국의 실질적인「안방마님」이 된 것이다. 그는 황후로서 교양과 기품을 갖추는데 최선을 다했다.
『황후는 틈만 나면 여효경(女孝經ㆍ여성의 도리를 강조한 경전)과 사서(史書)를 탐독했다. 그는 역대 황후의 덕행을 공부했다. 전국각지에서 먹을거리 진상품이 올라오면 반드시 칭기즈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제사를 올린 뒤에야 비로소 먹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시키려는 작업을 착수한다. 남편 순제의 즉위 때부터 황위 계승자로 지명돼있던 황제의 사촌동생 엘터구스(燕帖古思)와 그 어머니인 보다시리(不答失里)를 살해했다. 아들이 드디어 황태자로 책봉되고(1353년), 2년 뒤인 1355년 성대한 책봉식을 거행한다.
-세계경영을 꿈꾼 여인
하지만 그는 안방마님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원나라를 직접 다스릴, 그야말로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유생들의 강독을 듣고, 아들에게는 유교의 도를 배우라고 강권했다. 보다 못한 제사(帝師)가『태자는 모름지기 불법을 배워야 하는데 무슨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라고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자 기황후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지금 천하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공자의 도를 배워야 하고 다른 것을 취하면 이단이라 들었소이다. 불법도 물론 좋지만 주된 것은 아니고, 천하를 다스릴 수 없는데, 어찌 태자에게 책을 읽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불법을 강조하려던 제사는 얼굴을 붉히고 돌아갔다.
바야흐로 원 제국이 몰락의 길로 접어든 때. 하지만 제국의 주인이자 남편인 순제는 무능했으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남편 기황후는 기울어져가는 원 제국을 일으키려면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1358년 연경(燕京ㆍ베이징)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는 관청에 명령을 해서 죽을 쑤어주고, 금은 포백 및 곡식 등을 내어 십 여 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餓死者)들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민심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휘정원(徽政院)을 자신의 재정을 관리하는 황후직속기관인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하고 조정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자정원이 대상(隊商)이나 귀족 계급이 장악해서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던 실크로드와 국제해상무역의 이권을 직접 관리토록 했다. 세
력을 얻은 기황후는 남편인 순제를 폐위시키려 부단히 싸운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고비를 맞았으나 미모의 고려여인으로 미인계를 쓰는 등 갖가지 계책으로 위기를 넘긴다.
기황후는 1365년 바얀코톡토가 죽자 드디어 제1황후에 오른다.
몽골학자 에르데니 바타르 네이멍구(內蒙古)대 몽골사연구소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기황후는 제1황후가 된 기념으로 황제로부터「솔랑가스(숙량합ㆍ肅良哈)」이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기황후는 이미 1359년 지금의 오르도스 지방에 식읍을 받은 바 있다.
에르데니 바타르는『지금도 오르도스(鄂爾多斯) 지방에는 솔랑가스, 즉 솔랑가스(肅良哈思)라는 성을 가진 몽골인들이 많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기황후가 제1황후 등극을 자축하고 있을 무렵, 원나라는 이미 손을 쑬 수 없을 지경으로 몰락해갔다.
1351년 발생한 홍건적의 난으로 촉발된 천하대란의 소용돌이에서 세력을 확장한 주원장(朱元璋)은 1366년 원나라의 대도 연경을 함락시켰다. 기황후의 야심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원나라 조정은 몽골초원으로 쫓겨 간다. 남편인 순제는 1년 6개월간의 도피 끝에 죽고, 기황후의 아들 아요르시리다라는 북원(北元)의 황제가 된다. 그가 소종(昭宗)이다.
-「친인척 관리」의 실패
하지만 이상스럽게도 기황후의 최후에 대해서는 기록된 바가 없다.
그리고 기황후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도 각박하기 이를 때 없다. 원나라에서도『황후가 교활하고 스스로 꾸미기를 잘한다.』(『신원사(新元史)』)는 모진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추악한 황위계승 싸움을 벌임으로써 원제국의 몰락을 부채질 했다는 악평도 받는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기황후의 권세를 업고 고려조정을 마음껏 주물렀던 황후의 오빠 기철(奇轍)의 전횡도 기황후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심어주었다. 이른바 친인척 관리에 실패했다고나 할까.
기황후가 원나라에서 출세하자 고려에 있던 기씨 일족은 그 권세를 믿고 발호한다. 기자오의 막내딸인 기황후의 오빠는 식(軾)ㆍ철(轍)ㆍ원(轅)ㆍ주ㆍ윤(輪) 등이었다.
이들은 백성들의 토지와 농민을 빼앗고, 관리의 선발임명권을 독차지했으며, 법령을 제멋대로 변경했다. 기씨 형제들은 왕(공민왕ㆍ재위 1351~1374년)마저도 친구 대하듯 했다. 공민왕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면서 말을 걸어와 기겁한 공민왕이 호위병을 불러 내치기까지 했다. 고려조정은 기황후의 어머니, 즉 영안왕대부인을 위해 이른바 보올자르(황실단합을 위해 친인척에게 베푸는 연회)을 열었다.
그런데 이 연회를 위해 만든 꽃에 5000여 필의 포백(布帛ㆍ면직물과 견직물) 등 엄청난 비용을 들였다. 이 때문에 고려의 물가가 폭등할 정도였다니….
심지어는 기철의 매부인 염돈소(廉敦紹)의 노비까지도「왕의 명령」이라며 속이고 남의 집 유부녀를 빼앗는 패악을 저질렀다고 한다.
보다 못한 기황후가 나서『절대 다른 사람의 토지와 농민들 강탈하지 마라. 이를 위반하면 반드시 처벌을 내릴 것』이라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지만 기씨 일가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기씨 형제를 중심으로 한 친원파(親元派)는 1356년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일거에 몰락한다.『고려사』「열전」‘기철(奇轍)’에 따르면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그 화가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을 걱정하여 반역을 꾀했다고 한다.
홍건적의 난(1351년) 등으로 원나라의 몰락이 눈앞에 왔음을 간파한 공민왕은 1356년 5월 대신들을 위한 연회를 베푼다면서 기철 일파를 대궐로 불러들였다.
공민왕은 대궐로 들어서는 기철 일파를 철퇴로 내려쳐 죽였다. 기씨 가문은 일시에 멸족됐다. 분개한 기황후는 1363년 황태자에게『너는 이미 장성했는데, 어찌하여 어미를 위해 복수하지 않느냐.』고 독려했다.
몰락 직전인 상황에서도 원나라는 기황후의 복수를 위해 군사 1만 명으로 공격을 단행했지만, 최영(崔塋) 장군에게 대파 당했다. 1만 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자가 단 17명이었으니 그야말로 참패였으며, 기황후의 복수극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랬으니 기황후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 없었던 것이다.
-여성비하 풍조의 희생양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유교정치의 관점에서 여성이 천하를 주물렀다는 것은 그야말로 몹쓸 이야기였을 게다. 역사 이래로 여성의 정치참여는『암탉이 새벽에 우는 격』이며『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몹쓸 표현으로 폄훼됐으니 말이다.
이는 BC 1046년 무렵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을 치러 가면서 던진 출사표의 내용이다. 그가 무왕이 일컫는 암탉은 상나라 주왕을 쥐락펴락했던 달기(妲己)를 뜻한다. 그런데 비장한 각오로 토해낸 무왕의 사자후(獅子吼)는 3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회자되는 여성비하 발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발언이 무왕의 당대 창작품이 아니라, 그 역시「옛말」을 인용한 것이니, 얼마나 뿌리 깊은 여성비하의 변인가. 이「새벽에 우는 암탉」은 후대에 와서는 이른바 나라를 기울게 할만한「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곁말로도 발전된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삼국사기』를 쓴 김부식(金富軾)은 신라시대 위대한 여왕으로 추앙받는 선덕여왕(재위 632~647년)마저 각박하게 평했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거늘, 어찌 늙은 할멈이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삼국사기』「신라본기」‘선덕왕조’)
이런 판국이었던 데다 고국의 식구들이「반역의 무리」로 멸족되는 상황이었으니 기황후에 대한 평가가 합리적일리가 없었을 것이다. 과연 기황후가 마냥「나쁜 여자」였을까.
-기황후를 위한 변명
그는 어떻든 훗날 공녀제도를 폐지했고 고려를 원나라의 지방성(省)으로 삼으려는 정책을 반대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리 역사에서 그만한 여걸이 또 있을까.
14살의 나이로 피눈물을 흘리며 공녀로 끌려갔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숱한 역경을 딛고 당대 세계를 주름잡은 제국의 안방마님이 된 바로 그 고려 여인. 아니 그저 안방마님으로 머문 게 아니라 스스로 제국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그 여인을 우리는 너무 홀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반도 중부 연천의 시골에 쓰러져 방치된 초라한 무덤을 보며 오만가지 감상에 젖어본다.
물론 이 무너져버린 이 무덤이 기황후의 무덤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동국여지지』와『연천읍지』에 보이는 내용은 후대의 기록일 뿐이니까.
하지만 천하를 호령했던 여인은 혹시『연천읍지』의 기록대로 고향에 묻히고픈 마지막 유언 때문에 고향땅에 묻힌 것은 아닐까.
장장식씨의 말마따나 칭기즈칸 군대가 서역을 공략했을 때 전사자가 생기면 반드시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보냈다는데 기황후도 그런 예를 따른 것이 아닐까. 아니면 유골이라도? 기황후는 아니더라도 혹시 기황후 어머니를 비롯한 직계존속의 무덤은 아닐까.
몽골에서 판매되는 김치
-기황후가 뿌린 고려판 한류
기황후는 몽골에 고려판 한류를 심은 공신이기도 했다.
『연경의 원나라 고관대작들이라면 고려여인을 얻은 뒤에야 비로소「명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고려여자들은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며 남편을 잘 섬겨 사랑을 독차지했다. 순제 이후로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려여자였으며 조정의 의복과 신발, 물건이 모두 고려풍이었다.』
원말 명초에 살았던 권형(權衡)은『경신외사(庚申外史)』에서 원나라의 대도(大都) 연경에 불었던 뜨거운「한류열풍」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다.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에 연지곤지, 족두리, 변발 등 몽골풍이 유행했다지만 원나라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고려열풍이 거세게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공녀의 몸으로 끌려가 제국을 호령한 기황후가 일으킨 「열풍」이었다. 지금으로 치면「고려판 한류열풍」이라고 할까. 초창기만 해도 공녀는 일종의「정신대」노릇을 했다지만 기황후의 출세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예컨대 원나라에서는『어젯밤에 들어온 고려 아가씨, 대부분이 기씨의 친족이라 이야기하네.』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 원나라 말의 시인인 장욱(張昱)은『궁중사(宮中詞)』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궁중에서 가장 유행하는 옷은 고려풍 옷이네. 정방형 목선과 짧은 허리, 반소매…. 궁중여인들이 다투어 고려 여인의 옷을 구경하러 가네. 고려여인이 황제 앞에서 입는 옷이라네.』
궁중의 급사사령(給事使令)을 모두 고려여인들이 맡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복식(服飾) 뿐 아니라 음식도「고려풍」이 대세를 이뤘다. 고려병(餠), 고려다식, 고려조청, 상추 등등…. 궁정에서는「고려여악(高麗女樂)」이 울려 퍼졌다.
「고려여악」은 특출 난 외모와 재주를 지닌 여성들을 뽑아 화장시키고 꾸며서 가무를 배우게 한 것이다. 이 고려여인들은 요즘으로 치면 고려의 대중문화를 원 제국에 퍼뜨린「한류스타」였던 셈이다. 장욱의 시를 보면 재미있다.
『보초를 서는 병사들 고려 언어 배우네. 어깨동무 하며 낮게 노래 부르니 우물가에 배가 익어가네.(衛兵學得高麗語 連臂低歌井卽梨)』(『연하곡서(輦下曲序)』)
고려음악이 원나라 병사들에게까지 대유행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모든 것이 기황후가 퍼뜨린「고려판 한류」인 셈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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