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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야

사람제사가 성행했던 신라…경주 월성에서 속속 발견되는 인골의 증언

경주 월성은 아시다시피 신라 1000년 사직을 지킨 궁성인데요. 2016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장기조사를 벌이고 있는데요. 해마다 굵직굵직한 발굴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들어 성벽을 쌓을 때 사람을 죽여 제사 지낸 흔적들이 계속 확인되고 있다는데요. 지난 6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성벽 밑부분에서 1500년 전 신라인의 인골이 나왔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여 제사를 지냈다는 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봅니다.

경주 왕성인 월성 서성벽 발굴 조사 과정에서 추가로 발굴된 여성 인골. 얼굴 주변에 목걸이 장식과 팔쪽에서 팔찌가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사람제사를 지낸 흔적이 보였다구요?

 

=그렇습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월성의 서쪽성벽을 발굴하고 있는데요. 올해 조사 중에 성벽을 쌓을 때 제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여성 인골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여성의 곁에는 소와 말 같은 동물뼈가 함께 보였습니다. 동물들의 뼈는 갈비뼈 위주로 보였습니다.

 

2=사람이 소와 말처럼 제사의 희생물이 된건가요?

 

=그렇습니다. 이 여성 인골은 곡옥 모양의 유리구슬을 엮은 목걸이, 팔찌를 착용했구요. 키가 약 135cm 전후로 체격이 왜소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년기 20대 여성으로 추정됩니다.

이번에 발견된 20대 초반의 여성인골은 2017년 발굴된 남녀성인인골의 곁에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3=제사의 희생물이 아니라 그냥 묻힐 수도 있었던 것 아닐까요?

 

=만약 인골이 이번에 한 구만 나왔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겠죠. 그런데 사실은 4년 전(2017)에도 이번에 발견된 여성 바로 옆에서 50대로 추정된 남녀 성인 인골 2구가 발견된 적이 있었거든요. 키가 남성은 166cm, 여성은 154cm 정도로 측정됐습니다. 이 남녀는 아주 가지런히 나란히 누운채 확인되었거든요.

 

4=그럼 똑같은 지점에서 3명이나 나왔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발굴단에서 예전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놀랄만한 이야기가 숨어있었습니다. 3명의 인골이 발견된 지점이 지난 1985년하고 1990년에 시굴 발굴조사를 벌인 바로 그 곳이었는데 그때도 이번 인골발굴지점에서 10미터 떨어진 곳에서 정체불명의 인골 20여구가 우르르 발굴됐다는 겁니다.

2017년 발굴된 남녀인골의 모습. 얼굴 주변에서 나무껍질과 초본류(풀)로 덮은 흔적이 나타났다. 장례의식이 있었음을 웅변해주는 대목이다. 두 사람을 죽여서 성벽 바닥 부분 토층에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흔적이다.

5=아니 그렇게 인골이 20여구나 나왔으면 그때도 장안의 화제가 되었을텐데요?

 

=그러나 1980~90년대만 해도 인골은 중요한 연구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보고서를 쓸 때도 그냥 대수롭지않게 여긴거죠.

 

6=그렇다면 2017년과 이번에 확인된 인골 3구하고 예전에 확인된 20여 구하고는 같은 시기에 묻힌 건가요?

 

=글쎄요. 이번의 3구하고 예전의 20여 구는 거리로 따지면 10미터 떨어져 있고, 30여 년 전 발견된 20여구는 최근 3년 사이에 3구보다 약 1.5미터 밑부분에서 발견되었어요. 성벽을 쌓을 때 높이차를 두고 한꺼번에 묻은 건지, 아니면 문화층이 다르니까 다른 시기에 따로 묻은 것인지는 연구를 더 해봐야 한답니다.

지난 1985년과 1990년 발굴에서도 이번에 3명의 인골이 발견된 지점에서 10m 떨어진 곳에서 정체불명의 인골 20여구가 발굴된 적이 있다.

 

7문=사람제사를 지낸게 확실한가요?

 

=성벽 바닥에 아주 정연한 상태로 묻혀있었거든요. 흥미있는 것은 2017년 확인된 남녀 인골의 얼굴 주변에서 나무껍질과 초본류()로 덮은 흔적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장례의식이 있었음을 웅변해주는 대목이죠. 두 사람을 죽여서 성벽 바닥 부분 토층에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흔적이죠.

성벽이나 제방, 궁궐을 지을 때 땅의 기운을 다스리고 무사안전을 기원하려고 바친, 사람 제사를 지낸거죠. 그걸 우리는 인신공희(人身供羲) 혹은 인신공양(人身供養)이라고 합니다.

 

8=사람을 죽여 묻는 풍습 중에 순장도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순장(殉葬)은 무덤 주인공의 사후세계를 함께 할 사람을 죽여 묻는 일종의 장례의식이죠. 집이나 궁궐, 성을 쌓을 때 묻는 사람제사, 즉 인신공희와는 약간 다른 의미이죠. 그러나 생사람을 죽여 묻는 것은 똑같죠.

최근 3구의 인골이 확인된 지점과 1985년 및 1990년에 20여구의 인골이 발굴된 곳과는 높이차가 1.5m, 거리는 10m 가량 떨어져 있다.

9=순장이든 인신공희든 이런 잔인무도한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된거죠?

 

=사람을 제사 지내는 풍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행되었습니다. 페루·잉카·고대이집트·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이란·인도·그리스·로마·중국 등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대부분 인신공희가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서양에서도 기원전 97년 로마 원로원은 사람제사를 법률로 금지했을 정도였구요. 15세기인 1487년 멕시코 아즈텍 테노츠티틀란 보수공사 과정에서 나흘간 죄수와 노역자 8400명을 학살해서 묻은 기록도 있습니다. 건축물이나 성벽을 쌓을 때 그 구조물의 안정을 위한 이벤트였다는 겁니다.

 

10=지금은 반인간적인 행위지만 예전에는 보편적인 풍습이었네요? 동양에서는 언제 시작된겁니까?

 

=인신공희, 즉 사람제사의 원조는 중국 상나라(기원전 1600~기원전 1046)인데요. 상나라는 제정일치사회여서 신권이 극성을 부렸고, 마침 주변국을 정복해서 노예로 부리던 왕조였습니다.

 

11=누구를 제물로 바친 거죠? 노예인가요?

 

=그렇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늘신과 조상제사를 위해 잡힌 노예들을 제사 지냈습니다.

상나라 때 길흉을 점치고 그 점궤를 거북등껍질에 새겨넣은 것이 갑골문인데, 갑골문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조상에게 제사 지내려는데 강족 노예 100명과 양 100마리를 올릴까요?”라는 내용하고요, “오늘 제사를 지낼 텐데 피부가 하얀 강족을 바칠까요?”

사람제사의 희생물로 바쳐진 인골이 확인된 서성벽 지점. 성벽을 쌓거나 수축할 때 사람을 죽여 묻었다. 

12=강족이 어떤 사람들인지, 참 끔찍하네요?

 

=강족은 당시 중국 서북쪽에 살던 유목민인데요. 정복 전쟁에서 잡힌 노예였을 겁니다. 저는 상나라 말기의 도읍인 중국 안양(安陽)에 가본 적이 있는데요. 그곳의 유적 한곳에서는 21기의 건축물 기초에서 641명의 인간희생물이 301마리의 짐승 뼈와 함께 확인됐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동격의 희생물 취급을 받았던 셈이죠. 상나라 종묘로 추정되는 건축물의 기초에서도 사람과 동물들이 일부는 목이 잘린 채, 일부는 불에 탄 채 확인됐습니다.

 

13=그런 잔인무도한 풍습이 우리 역사에서도 있었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이번에 그 증거가 확인된거잖아요. 그런데 사람을 무덤에 묻는 순장 제도는 502, 즉 신라 지증왕(3) 때 폐지됐지만 인신공희, 사람 제사이야기는 16세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집니다. 예를 들면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신관 공사터의 9세기 통일신라 시대 우물에서 10살 가량의 어린아이 유골이 확인됐는데요. 유골은 거꾸로 박힌 형태였습니다.

 

14=어린아이니까 그냥 장난치다가 추락한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이 우물에는 제사음식이나 제사의 희생물로 사용된 동물뼈의 존재, 토기병의 입부문을 파손하고 던져놓은 제사행위의 흔적이 보였거든요. 때문에 이 어린아이도 나라의 큰 제사를 지낼 때 산채로 우물 속으로 던져진 희생물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어요. 민심이 흉흉했던 9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낼 때 이 가련한 아이가 희생됐을 가능성이 있는거죠.

 

15=그런데 그런 풍습이 16세기까지 이어진다구요?

 

=그렇답니다. 고려시대 때도 흉흉한 소문이 민간에 돌았어요. <고려사> ‘열전 최충헌전에 등장하는데요.

당시 무신정권의 실권자였던 최충헌(1149~1219)이 새로운 저택을 지을 때 흉흉한 소문이 돌았답니다. 최충헌이 땅기운을 제압하려고 비밀리에 동남동녀를 잡아 오색옷을 입혀서 공사중인 저택의 네 귀퉁이에 생매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6=집집마다 난리가 났겠네요?

 

=그랬답니다. 백성들은 자기 아이를 숨기느라 혈안이 됐구요. 어떤 이들은 아이를 업고 도망쳤답니다. 이 틈을 이용한 무뢰배들이 생겨나서 어린아이를 유괴한 뒤에 몸값을 빼앗고 돌려주는 일까지 생겼답니다.

 

17=세상이 하수상해서 그런 흉흉한 소문이 돈 걸까요?

 

=그런 점도 있는 것 같아요. 원나라 간섭기인 1343(충혜왕 4)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다름아닌 두 번이나 왕위에 올랐던 충혜왕(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이 주인공이었는데요. 충혜왕이 민가의 어린아이 수십명을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 묻는다는 소문이 돌았답니다. <고려사절요>에는 희생된 어린아이의 숫자를 50~60명이라 구체적으로 적시해놓았어요.

 

18=헛소문이겠죠? 사실이었다면 등골이 오싹해지네요?

 

=충혜왕은 주색에 빠진 방탕한 임금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꼭 어지러울 때만 그런 소문이 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 제사 이야기가 조선조까지 이어지는데요.

그것도 다름아닌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성종 때인 1494(성종 25) 5월이었는데요.

서울의 왕자 공주가 집을 지으면서 어린아이를 묻어서 재앙을 물리치는 제사를 지내려 한다. 그래서 지방의 어린아이들을 잡아 배에 싣고 간다는 소문이 황해도 해주까지 퍼졌다는 상소문이 올라왔습니다. 역시 이런 소문 때문에 어린아이를 가진 백성들이 산과 들로 피하느라 바쁘다는 것이었어요.

 

19=설마 왕자 공주가 어린아이를 묻었을까요? 완전 가짜 뉴스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도 성종 임금이 화들짝 놀라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들을 색출하라는 명을 내리는데요. 이 소식을 전하는 <성종실록>의 사관은 흥미로운 평가를 내립니다.

여러 왕자와 옹주가 해마다 집을 지어이런 소문이 퍼지니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경기·충청·황해 등 각 도의 백성들이 모두 아이를 안고 산에 올라가 피하느라 마을이 텅비었다.”고 씁니다

제물로 바쳐진 인골의 곁에서 확인된 토기. 제사를 지낼 때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20=황해도 뿐 아니라 경기·충청도까지 소문이 퍼진거네요?

 

=그러게요. 일파만파로 퍼졌데요. 결국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구전설화로 확대재생산되는데요.

옹주의 저택을 지었을 때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면 넘어지고, 다시 세우면 또 넘어졌다. 대책이 없었다. 하루는 지나가던 어떤 풍수쟁이가 한마디 툭 던졌다. ‘어린애를 주춧돌 밑에 묻으면 땅의 기운을 잡아주어 기둥이 튼튼해질 거요.’ 이 말을 들은 공사책임자들이 풍수쟁이 말대로 어린아이 한 명을 잡아 주춧돌에 묻었다. 그랬더니 기둥이 넘어지지 않았다. 집도 튼튼했다. 이 말이 퍼지자 경향 각지의 백성들이 아이를 업고 숨었다.”(<한국민간전설집>)는 내용입니다.

 

21=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나는 법인데 왜 이런 가짜뉴스가 퍼졌을까요?

 

=아까 읽은 실록에 답이 나와있습니다.

왕자와 옹주들이 해마다 저택을 지었다는 것은 팩트였거든요. 이 때문에 당시에 이 분들의 호화저택 공사를 당장 그만두라는 상소문이 빗발치는데요. 가뭄 때문에 곡식이 익지 않았고, 초가을인데도 우박은 물론 눈까지 내렸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곡식마저 큰 손상을 입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는데 왕자와 공주들은 호화저택은 물론이고, 한강변에 정자까지 조성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2=시중 여론이 엄청 좋지 않았겠네요?

 

=당시 홍문관 부제학인 성세명(1447~1510)의 상소문이 심금을 울립니다. “백성들의 신음이 영차하는 소리와 어우러집니다. 목불인견입니다. (쓸데없는 공사에) 쓸 돈을 돌려 기근 구제에 사용한다면 백성 1000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1000명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다면 (임금이) 백성의 부모라 할 수 있습니까.”(<성종실록> 1494825)

 

23=마냥 가짜뉴스는 아니었네요. 백성들의 원성이 가짜뉴스, 즉 유언비어로 표출된거네요?

 

=1554(명종 9) 상소가 올라옵니다. 당시 경복궁 화재로 불에 탄 사정전·흠경각·강령전 등을 중건하는 공사가 벌어지던 때였는데요. ‘2~3살 영아를 산 채로 대궐 주춧돌 밑에 묻으려 한다는 요망한 말이 퍼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소문은 지금 서울 시내가 그 때문에 난리 났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월성벽 조사구간.  신라 천년사직을 지킨 월성은 발굴결과 최초 축조 시기가 4세기 전·중엽~5세기 전후라는 분석 결과도 나왔다.

25=역시 대대적인 토목공사 때문에 민심이 좋지않게 흘러간거네요?

 

=그렇습니다. 그때 영경연사 상진(1493~1464)이라는 분이 민심이 악화되어서 이런 요망한 말이 떠돕니다. 임금이 백성을 어린 아이처럼 돌본다면 백성은 임금을 부모처럼 우러러 볼 겁니다. 민심이 안정되지 않으니까 이런 유언비어가 소문이 돕니다. 이렇게 민심이 흉흉한 때에 갑자기 호걸이 나와 교화를 막는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막겠습니까.”라고 합니다.

 

26=호걸이 갑자기 나타난다는 게 무슨 소리죠?

 

=역모를 꾸미는 자가 나타나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하냐는 것죠. <명종실록>을 쓴 사관의 논평도 당대 뒤숭숭한 세간의 민심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경복궁 중창 공사가 있었는데 어린 아이를 땅에 묻어야 한다는 시중에 떠들썩하게 돌았다. 백성들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어수선한 틈을 타 아이가 있는 백성들을 협박해서 뇌물을 챙기는 자까지 생겼습니다.”

 

27=사람제사 이야기는 신라 시대까지는 고고학적 조사로 확인되지만 고려 때부터는 일종의 가짜뉴스로 전해지네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런 잔인무도한 풍습이 조선조 중종 때까지 이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임금을 비롯한 권력층이 민심을 거스르는 정치를 펼칠 때마다 이와같은 해괴한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명종실록>을 쓴 사관의 한마디가 핵심을 찌릅니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면 유언비어가 아주 신나게 돌게 된다. 그러니 민심이 동요하기 쉽고, 이런 유언비어를 진압하기는 힘들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많았다.”

 

28=그나저나 월성벽을 발굴하면 사람제사의 흔적들이 더 밝혀지겠네요?

 

=1980~90년대 소홀히 여겼던 사람제사의 흔적들을 다시 소환해서 연구하는데요. 쉽지 않답니다. 앞으로는 인골에서 검출될 수 있는 DNA와 법의학적 분석 등을 통해 당대 사람들의 삶을 복원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