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와중에 양궁 대표팀 안산 선수의 숏컷을 두고 페미니시트라고 공격하는 등 젠더 논쟁을 부추기는 현상이 있었는데요. 참 쓸데없는 논쟁이 아닌가 여겨져요. 그냥 무시해도 좋을 이야기를 굳이 기사로 다뤄서 논쟁을 부추겨서 방문자수 장사하는 황색 저널리즘도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 주는 역사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 읽어보면 참으로 기막힌 여혐발언을 한 김부식의 사례를 들어 역사속 젠더논쟁(주로 여혐발언)을 살펴봅니다.
문=안산 선수 이야기는 외국언론에서도 크게 다뤘다죠?
답=3관왕을 차지한 안산 선수의 선전 모습을 다룬게 아니라 숏컷머리를 했다고 해서 온라인 상에서 페미니스트라고 공격받고 있는 안산 선수를 다룬 거죠.
2문=역사적으로 젠더 논쟁을 부추긴 사례가 있다면서 어떤 사례입니까?
답=<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1075~1151)의 이야기입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여성으로서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재위 632~647) 관련 기사를 한마디로 평가하면서 이렇게 공격합니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어찌 아녀자가 안방에서 나와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왕으로 세웠으니 참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 했어요. 김부식은 그래도 고려 시대 사람으로 평론을 단 거지만 선덕여왕 시대에 반란(647년)을 일으킨 상대등 비담(?~647) 등은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면서 거병을 했거든요.
3문=반란을 일으킨 비담이나 삼국사기 편찬한 김부식의 ‘여성 임금’ 운운은 지금으로 치면 엄청난 여혐발언이네요?
답=그렇죠. 김부식과 같은 유학자들의 유교적 여성관, 즉 남존여비 사상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김부식이 ‘아녀자 때문에 나라가 망할 지경’이라고 말하면서 한가지 유명한 고사성어를 인용하죠. 그것이 바로 ‘암탉은 새벽에 운다’는 뜻인 ‘빈계지신(牝鷄之晨)’입니다.
4문=‘암탉’ 고사를 김부식도 인용할 정도였다면 엄청 오래된 고사인가봐요?
답=그렇습니다. ‘빈계지신’은 매우 오래된 고사성어입니다.
기원전 1046년 무렵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 상나라 마지막 군주인 주왕을 정벌하면 이른바 출사표를 던지는 데요.
“옛말에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이 망한다’고 했소이다.(牝鷄之晨 惟家之索) 상나라 왕은 부인의 말만 듣고 선조에게 드리는 제사를 그만두고 나라를 어지럽혔소.”
5문=부인의 말만 들었다는 게 무슨 얘기죠?
답=상나라 주왕의 부인은 ‘달기’라는 여인인데요. 그런데 주왕이 달기를 위해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어 벌거벗은 남녀들을 풀어놓았구요. 또 불 위에 기름기둥을 걸어놓고는 죄수들에게 걷게 했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미끌어져 떨어지는 모습을 즐긴 거죠.
6문=다 부인을 위해 그런 일을 저질렀다구요?
답=그래서 역사서에서는 달기를 희대의 요부라 하는데요. 그러나 그것은 남성 중심 사회의 대표적인 핑계죠. 왜냐면 나라를 나라를 망친 장본인은 바로 임금인 주왕이거든요. 사마천의 <사기>에 분명히 그 이유가 나와 있어요. 당시 상나라는 제정일치 사회의 분위기가 이어져서 임금이 하늘제사 조상제사를 게을리 하면 안되었는데, 그런 제사를 소홀히 했던 겁니다.
7문=그게 아니라도 부인 때문에 주지육림 빠졌다는건 비겁한 면명 같군요. 임금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되는건데...
답=그런데도 상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주나라 무왕은 모든 책임을 여성인 달기에게 책임을 물어 ‘암탉 운운’하면서 꾸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왕의 출사표를 보면 재미있는 구절이 보입니다. 암탉 고사를 인용할 때 ‘옛말에 암탉이 새벽에 울지 않는다’고 했다고 ‘옛말’이라 한겁니다.
8문=아니 그때도 3000년 전인데, 그때를 기준으로 ‘옛말’이라고 했다면 과연 언제라는 건가요?
답=상나라 때는 모든 국사를 처리할 때 점을 친 뒤에 그 점궤를 보고 처리했죠. 거북 껍질에 불을 대서 갈리지는 틈의 모양을 보고 길흉을 판단했는데요. 그렇게 얻은 점궤를 거북등에 새긴게 갑골문이잖아요.
그 갑골문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부호(왕비)가 아이를 낳으려 합니다. 과연 아들일까요?(婦好娩 嘉)”라고 묻는 내용하고 “정해진 날짜에 아이를 낳지 않아서 불길했다. 과연 딸이었다.(不吉 女)” 뭐 이런 내용입니다.
9문=딸을 나서 불길했다는 내용이네요?
답=그렇습니다. 그때는 상나라 중흥군주인 무정이 다스리던 때였는데요. 기원전 12~11세기죠. 무정의 두 번째 왕비인 부호라는 여인이 출산이 임박하자 아들인지, 딸인지 물어보는 점을 쳤는데 낳으라는 출산 날짜에 낳지못해서 결국 딸을 낳아서 재수없고, 불길했다는 내용이죠.
10문=남아선호, 남녀차별의 뿌리는 그렇게 뿌리깊네요? 원래 인간은 모계사회 아니었나요?
답=원래는 모계사회였죠. 그런데 신석기에 이어 청동기 사회에 접어들어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면서 빈부격차와 계급이 생기죠. 강력한 신권과 왕권이 공존하는 제정일치 사회가 탄생했고, 아들이 왕위를 세습하게 됐는데요.
그렇게 탄생한 나라가 상나라입니다. 상나라는 이웃 부족을 전쟁으로 공격해서 노예로 만드는 노예국가였거든요. 이때부터 남녀차별의 풍조가 퍼졌을 겁니다.
11문=딸을 재수없다. 불길하다고 여겼다면 이건 남녀차별이 아니라 여혐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
답=그렇습니다. 전국시대 사상가인 한비자(기원전 280?∼233)는 “아들을 낳으면 서로 축하하고. 딸을 낳으면 죽였다”고 증언했습니다. 차별단계가 아니라 아예 여자아니는 죽여버렸다는 거잖아요. 성인이라는 공자(기원전 551~479)도 “여자와 소인은 길들이기 힘들다.(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고 했답니다.
12문=아니 공자님은 왜 그런 발언을 했을까요?
답=이유가 기막힙니다. “여자는 가까이 하면 버릇없이 굴고 멀리하면 원망하기 때문이다.(近之則不遜 遠之則怨)”(<논어> ‘양화’)라 했어요. 그래서 중국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魯迅·1881~1936)은 이렇게 공자를 비아냥 댑니다. “공자가 말한 여자 속에는 공자의 어머니도 있을까”하고요. 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고사성어 들어보셨죠?
13문=엄청난 미인이라는 소리가 아닌가요?
답=그렇죠. ‘여성의 빼어난 미모가 나라를 기울게 한다”는 겁니다. 2000년 전인 한나라 무제(기원전 141~87) 때 나온 고사인데요. 당대의 음악가인 이연년이 황제 앞에서 춤을 추며 노래했는데, “북방의 아름다운 여인, 그 미모가 단연 빼어나네. 눈길 한 번에 성이 기울고 눈길 두 번에 나라가 기운다(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한서>·‘이부인전’>)고 했어요.
이후 중국 역사서는 걸핏하면 역대 왕조가 망한 까닭을 이 ‘경국지색’의 탓이라고 돌렸습니다.
14문=아까 상나라 마지막 임금도 부인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고 했잖아요?
답=또 그런 예가 있습니다. 주나라 유왕(782~771) 때의 일인데요. 유왕이 총애한 여인 중에 포사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여인은 생전 웃지 않았답니다. 유왕은 여자를 웃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봉화를 올리고 북을 쳐서 제후들을 불러모았는데, 결국 적군이 오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헐레벌떡 달려온 제후들이 투덜거리며 돌아갔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죠. 포사라는 여인이 그 모습을 보고 깔깔 웃더랍니다. 유왕이 그걸 보고 이거다 싶었답니다.
15문=그럼 왕이 총애하던 여자를 웃기려고 계속 봉화 올리고 북을 쳤겠네요?
답=그렇죠. 포사라는 여인을 웃기려고 그 다음부터 날이면 날마다 거짓 봉화를 올렸답니다. 한 두 번 달려오던 제후들도 나중엔 화가 나서 오지 않았는데, 기원전 771년 진짜 오랑캐(견융)를 끌어들인 반란이 일어났답니다. 왕이 이번엔 진짜로 봉화를 올렸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답니다. 주나라는 이때부터 급속도로 쇠락하게 됐죠. 서주 시대가 마감하고 동주 시대가 되는겁니다.
16문=부인의 취향도 참 독특했지만 그렇다고 거짓으로 봉화를 올린 것도 참 한심하네요?
답=그런데도 역사에서는 여자의 ‘경국지색’을 망국의 책임으로 돌리는 예가 많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부차(기원전 514~496)가 월나라 구천(기원전 496~645)이 바친 서시(西施)라는 여인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고 하구요. 당나라 현종(712~756)도 양귀비(719~756) 때문에 현혹되어 나라를 누란의 위기로 빠뜨렸다고 합니다. 뭐 서양에서도 이런 말이 있죠.
블레이즈 파스칼(1623~1662)이 말했다고 하죠.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치만 낮았어도 세계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말은 상식이 되었죠.
17문=그럼 검증해봐야겠네요. 여성들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도 있잖아요? 그땐 어땠죠?
답=김부식이 아녀자 정치 때문에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다는 선덕여왕의 경우를 보죠. 선덕여왕의 3가지 지혜는 유명하잖아요. 당나라가 보낸 나비 없는 족자를 보고 모란에 향기가 없을 것을 예측한 것. 두 번째 연못에 개구리가 우는 것을 보고 여근곡에 매복한 백제군을 알아낸 것. 셋째,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예측한 것이잖아요.
사실 선덕여왕 재위 때 백제의 계속된 공격을 받고 있었어요. 신라가 진흥왕(540~576) 때인 553년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을 복수하려고 그런거죠. 그러나 선덕여왕은 김유신(595~673) 김춘추(604∼661, 재위 654~661) 등을 기용해서 위기를 극복하고 불교의 힘으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고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구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첨성대를 만들었구요.
18문=그렇다면 김부식의 발언은 심했네요?
답=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선덕여왕을 비판하면서 예를 든 두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중국 한나라 때 천하를 쥐고 흔든 여태후(기원전 241~180)라는 여인하고요. 당나라 때 아예 새로운 왕조를 건국해서 15년산 다스린 무측천(측천무후·624~705, 재위 690~705) 두 사람인데요. 김부식은 두 여인을 두고 “늙은 두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정사를 휘둘렀다”고 비난합니다.
19문=김부식의 말대로 이 두 여인 때문에 나라가 휘청거렸나요?
답=여태후라는 분은 한나라 고조 유방(기원전 206~195)의 정실부인인데요. 고조가 죽자 어린 아들(천자·기원전 195~188)을 대신해서 정권을 잡았습니다. 물론 정권을 잡기까지 온갖 악행을 저지르죠. 생전에 남편이 총애했던 다른 부인(척부인)의 손발을 절단내고, 눈과 귀를 파내 돼지우리에 살게 하면서 ‘사람돼지(人체)’라 불렀다고 합니다,
20문=너무 잔인했는데요?
답=물론 그런 점에서 비판받지만 여태후의 시대는 한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태평한 시대로 꼽힙니다. 역사가 사마천(기원전 145?~86?)은 여태후의 비정한 정치와 정권욕을 맹비난하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요.
“모든 정치가 안방에서 이뤄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백성들이 농삿일에 힘쓰니 의식이 나날이 풍족해졌다”고 했습니다. 사마천은 황제로 즉위하지도 않은 여태후를 역대 황제들의 기록인 <사기> '본기'에 포함시킵니다. '여태후 본기'라 합니다.
21문=사마천이 여태후를 황제 대접을 해준거네요?
답=그렇습니다. 당나라 때 무측천, 즉 측천무후의 경우도 비슷했는데요. 이 분은 온갖 간계를 써서 황후가 됐고, 황후가 된 이후에는 남편(고종)의 건강을 핑계 삼아 독재권력을 휘둘러서 수많은 대신들을 고문하고 죽였는데요. 급기야 690년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죠. 중국 사상 유일한 여황제(女帝)로 15년간 천하를 지배했습니다. 치세 내내 악랄한 책략으로 잔인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22문=그래서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가 좋지는 않죠?
답=그러나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죽어나간 것은 궁정에서의 일이구요. 업적도 많았습니다. 과거제의 인원수를 늘려 과거체제의 위상을 높였구요. 토지-상업자본-학식이 결합된 지배층의 기반이 과거제를 통해 확립됐습니다.
23문=흙수저도 출세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준거네요?
답=그렇습니다. 획기적인 인재선발 정책으로 일반인도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를 불어넣어준거죠.
또 농업발전에도 힘썼구요. 당근과 채찍으로 이민족을 다스려서 변방의 안정을 도모했다는 평을 받습니다.
24문=한마디로 권력기반을 갖추는 과정에서는 잔인했지만 백성들을 위한 정치는 잘했다는 평을 받았던 거네요?
답=그렇습니다. 아까 한나라 여태후를 두고 사마천이 ‘정치 잘했다. 천하가 태평해졌다’고 호평했지 않습니까.
사마천과 함께 후대의 위대한 역사가로 꼽히는 사마광(1019~1086)은 무측천을 두고 이렇게 칭찬합니다. “무측천은 상벌을 평행하면서 천하를 다스려 유능한 인재가 쓰였다”구요.
결국 역사서에서 ‘여자 핑계’를 대는 것은 그야말로 ‘비겁한 변명’이었을 뿐이죠.
25문=요즘은 그래도 많이 달라졌죠. 여성총리 여성 대통령이 계속 배출되잖아요.
답=60개국 이상에서 여성총리와 대통령을 배출했다고 하죠. 그러나 아직도 여성 지도자를 보는 시각이 좀 이상하긴 해요. 단적인 예를 영국 총리를 지낸 마가렛 대처(1925~2013)를 두고 철의 여인이라고 했는데, 이후 별의별 여인들이 생겼죠. 티타늄 여인(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 콘크리트 여인(폴린 마로아 전 퀘벡주 총리), 구리 여인(마누엘라 레이테 전 포르투갈 사민당 대표)까지 줄줄이요. ‘강인한’이라는 뜻도 분명 들어있지만 왠지 ‘여자답지 않은 고집센 여자가~’라는 냉소적인 냄새가 풍기는 수식어들이죠.
26문=여성이라서, 남성이라서가 아니라 한사람의 지도자로서, 아니면 한사람의 직장인으로서, 한사람의 운동선수로서 평가해야겠네요?
답=사마천 사마광 같은 두 역사가는 남자가 어떠니 여자가 어떠니 하는 ‘못난 평가’를 내린게 아니잖아요. 오로지 백성의 삶에만 초점을 맞춘 평가를 내린 거죠. 앞으로도 '여성 때문에', '남성 때문에' 뭐 이런 못난 이야기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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