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꼭지에서는 매우 화요일 밤 11시30분부터 20분간 제가 출연하는 'KBS 시사야' 프로그램에서 방송했던 내용을 동영상과 함께 게재합니다. '시사야'는 시사평론가 김성완씨가 진행하는 정통 시사프로그램입니다.)
조선시대 임금을 말할 때 평소 드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조라 하고, 또 어떤 분은 종이라 하는데요. 왜 이렇게 달리 부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이번 주에 평소의 궁금증을 풀 기회가 되었군요. 조와 종 사이에도 어떤 법칙이 있다는데 이야기합니다.
1문=그렇지 않아도 궁금했어요. 왜 세종은 종자가 붙고, 세조는 조자가 붙는지?
답=그렇죠. 곧잘 받는 질문인데요. 그래서 예전에 한번 공부해봤거든요. 엄청 흥미롭더라구요. 조와 종을 붙이는 것을 묘호라 하는데요. 황제나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존호니까요. 생전의 이름은 아니구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만고의 성군인 세종이 원래는 문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뻔 했다는 거고, 영조와 정조 임금도 원래는 영종과 정종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영조, 정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문=대체 묘호가 뭐고, 조와 종의 차이가 뭔데 사연이 그렇게 많나요?
답=누구한테 조를 붙이고 누구한테 종을 붙이느냐. 효종 때 홍문관 관리인 심대부가 이렇게 정리합니다.
“예부터 조(祖)와 종(宗)의 칭호에 우열이 없었다. 창업군주한테만 ‘조’로 하고, 나머지 군왕들은 비록 큰 공덕이 있어도 ‘조’를 칭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심대부는 예법 관련 경전인 <예기>에서 “왕조의 시조는 조(祖)가 되고, 그 후예는 종(宗)이 된다”고 기록된 것을 인용한 겁니다. 이걸 종법의 원리라 합니다.
3문=그래서 태조 이성계가 된거죠?
답=그렇습니다. 중국 한국에서 나라를 세운 창업주는 ‘태’나 ‘고’를 써서 태조나 고조라 했죠. 중국 한나라와 당나라는 고조, 북위·송·명·청의 경우는 태조였구요. 고려를 세운 왕건과 조선의 창업주 이성계도 모두 태조였구요.
4문=그럼 깔끔하게 정리되네요. 창업주에게만 조, 그 후대 임금들에게는 모두 종자를 붙이면 되겠네요?
답=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 예기라는 경전에 이런 내용도 나옵니다. “공(功)이 있으면 조(祖)가 되고, 덕(德)이 있으면 종(宗)이 된다”고 했거든요. 이걸 또 ‘조공종덕’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논쟁이 생겼죠. 종법을 따르느냐, 조공종덕을 따르느냐는 그때 그때 달랐습니다. 임금의 선호도나 권력세력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치열한 논쟁이 벌이졌어요. 문제는 무슨 무슨 종보다 무슨 무슨 조 묘호를 선호했다는 겁니다.
5문=특별히 ‘종’보다 ‘조’를 좋아한 이유가 있나요?
답=아무래도 ‘덕이 있다’는 ‘종(宗)’보다는 ‘공이 있다’는 ‘조(祖)’를 더 좋아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종법의 질서’, 즉 창업주인 태조 이성계만 조 묘호를 받고 6대인 단종까지는 적통을 이어받아 별다른 문제없이 ‘~종’의 묘호를 받았는데 세조 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6문=아, 그러고보니 세조는 ‘조’자네요?
답=세조는 문종과 부자관계가 아니라 형제이고, 단종의 삼촌이잖아요. 여기서 종법질서가 무너진겁니다. 세조가 죽고 세조의 아들인 예종이 등극하면서 죽은 임금의 묘호를 논의한 다음에 3가지 묘호 후보가 올라왔는데요. 이때 올라온 3배수 후보 묘호가 ‘신종(神宗)’, ‘예종(睿宗 슬기롭다 총명하다는 뜻)’, ‘성종(聖宗)’이었어요.
7문=그런데 그도 저도 아닌 세조가 됐잖아요?
답=아들인 예종이 반대한겁니다. 예종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라를 다시 세운 대행대왕(승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묘호가 없는 왕)의 공덕을 기려 ‘세조’라 하는 게 좋겠다”고 고집한거야.
8문=세조가 나라를 다시 세웠다는 뜻이 뭐죠?
답=허약한 임금인 단종을 몰아내고 이징옥과 이시애의 난을 평정. 종사의 중흥을 도모했다는 겁니다. 세조의 아들인 예종으로서는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부왕(세조)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왕권을 다지려는 의도를 나타낸 겁니다.
9문=뭔가 억지춘향 같은데요?
답=그렇습니다. 창업주인 증조할아버지의 묘호에 ‘조’자가 붙었고, 게다가 아버지인 세종대왕의 묘호에 ‘세’자가 붙었는데, 두 글자를 합한 ‘세조’라 한다면 뭐가 되겠습니까. 불효죠. 그래서 정인지를 비롯한 대소신료들이 말도 안된다고 반대합니다. 그러나 예종은 ‘조공공덕’을 예로 들면서 ‘세조’를 고집해서 결국 관철시켰어요. 이것이 훗날 나쁜 선례가 되고 맙니다.
10문=이후에는 ‘조’자 임금이 많아졌네요? 그중에서 선조 인조는 왜 ‘조’가 된 겁니까. 무슨 큰 업적을 남겼다고?
답=좀 웃기는 일이죠. 임진왜란하고 병자호란을 자초한 임금들인데. 용서를 구해도 시원치않을 판에 무슨 공이 많다고 ‘조’자를 받는거냐는 소리를 들을만 하죠. 그런데 선조의 경우 죽은 뒤에 '조'나 '종'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입니다.
'조'를 주장하는 이들은 “돌아가신 임금은 임진왜란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시 세운 공이 있습니다. 조공종덕의 원리에 따라 마땅히 조(祖)라 해야 합니다.”는 논리를 폅니다. 반대측은 본래 창업주만 조라 했고 다른 사람들은 원래 종이라 하는 게 맞는 법도라고 주장합니다.
11문=결국 ‘조’를 주장한 자들이 논쟁에서 이겼네요?
답=아닙니다. 그때는 ‘종’파의 논리가 통해서 광해군도 하는 수 없이 인정하고 선종으로 낙착됐는데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대북파인 허균과 이이첨이 ‘조’를 다시 주장하면서 광해군이 얼씨구나 하고 ‘선조’로 바꿔버렸어요.
12문=아니 그렇게 ‘조’자 소리 붙이는게 좋았나보죠?
답=그러게 말입니다. 인조 역시 마찬가지죠. 다쓰러져가는 명나라 사대했다가 결국 병자호란을 자초한 장본인인데, 무슨 낯으로 인조가 된건지 참. 아들인 효종이 죽은 아버지가 “반정을 통해서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했다”고 해서 종보다는 조를 칭하는 것이 예법에 맞다고 해서 주장한겁니다.
13문=아니 반대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나요?
답=맨처음에 언급한 홍문관 관리 심대부를 비롯해서 대간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어요. 대간들은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묘호도 잘못된 거고,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 빠뜨린 선조의 묘호도 잘못됐다고 주장합니다. 대간들은 또 인조처럼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중종을 칭찬하는데요.
14문=그러네요. 중종도 인조처럼 반정으로 임금이 됐는데, 중조가 아니라 그냥 중종이잖아요?
답=그렇죠. 중종은 폭군 연산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지만 중조가 아니라 중종을 칭했잖아요. 사실 중종이 죽었을 때도 조종의 논쟁이 있었는데요. 아들인 인종이 ‘조’자를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신료들은 “세조가 조를 칭한 것은 아우(세조)가 형(문종)을 이었기 때문이지만, 대행대왕은 곧바로 성종의 계통을 이었기 때문에 조를 칭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고집해서 중종으로 낙착됐습니다. 효종 시대의 대간들은 중종의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효종은 반대목소리를 “망령된 의논”이라고 일축하면서 인조 묘호를 강행합니다.
15문=참 한심하군요. 선조 인조는 그렇다치고 영조와 정조, 순조는 왜 종이 아니라 조가 된겁니까?
답=영조의 원래 묘호는 영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승하한지 113년이나 흐른 1889년 ‘영조’가 됐는데요. 그 이유는 영종가 평소 백성을 사랑하고 근검절약했으며, 특히 1728년 일어난 이인좌의 난 등 초기에 일어난 각종 변란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한 거라는데요. 사실 좀 웃기는 얘기인데요.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갖가지 정치적 사건이 이어지고, 결국 전국적으로 20만명이 가담한 난이 일어난건데요. 그걸 진압한 것을 공이라고 한 것은 좀 지나치죠. 결국 영종은 영조가 됩니다.
16문=정조도 원래 정종이었다면서요?
답=역시 정조 승하 뒤 99년이 지난 뒤인데요. 1899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 한지 3년 만에 ‘정조’로 바꿨습니다. 이유없이 그런 건 아니었어요. 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증손이었는데요. 고종은 즉위하자마자 정조의 손자인 익종(효명세자 추존왕)의 양자로 들어갔어요. 정조의 직계임을 강조한 거죠. 고종은 결국 사도세자(장조)-정조-순조-효명세자 익종의 정통을 밟았다고 천명하면서 정종을 정조로 추존한겁니다.
17문=그렇다면 순조는 왜 순조가 된 거죠? 별 업적도 없는 거 같은데?
답=순조는 원래 순종이었는데요. 1857년(철종 8년), 서학(천주교)의 유포를 막고, 홍경래의 난을 진압했다는 등의 큰 공을 세웠다면서 ‘순조’로 바뀌었어요.
18문=아무리봐도 순조가 조라는 것은 좀 억지인 것 같아요?
답=선조, 인조는 안 그랬나요. 그 사람들이 순조보다 오히려 더 과분한 묘호를 받은거죠.
19문=하긴 그러네요. 아까 세종대왕의 묘호가 세종이 아닐뻔 했다고 했는데 그건 무슨 소리죠?
답=예. 세종은 원래 ‘문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뻔 했답니다.
세종이라는 묘호는 아들인 문종이 즉위하자마자 결정됐는데요. 이때 정인지와 허후 등이 다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역대로 세종이라고 일컬던 군주들은 나라를 중흥시킨 분들에게 내린 묘호다. 대행 대왕은 중흥이라기보다는 덕행을 이룬 분인데 세종은 맞지 않다. 문종이 어울린다고 반대의견을 냈어요.
말하자면 조공종덕의 원칙을 강조한거죠. 세종은 덕행을 쌓은 분이지 중흥이나 창업을 한 분이 아니라는 거고, 그래서 문종이 낫다고 한 겁니다.
20문=그러나 반대목소리가 작았나봐요?
답=공교롭게 세종의 뒤를 이은 분이 누굽니까. 나중에 문종의 묘호를 받게 되는 되는 분이잖아요. 그 문종이 이런 말을 합니다. “선왕의 덕행을 모르는 이가 없으며, 또한 4군 6진을 개척한 공로가 있으니 나라를 중흥시킨 셈이니 세종이 마땅하다”고 해서 세종이 됩니다. 만약 세종이 세조 이후의 임금이라면 아마도 조자를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의 묘호에도 사연이 있어요.
21문=어떤 사연이요?
답=태종은 세종이 임금이 된 후에도 4년 정도 상왕으로 군권을 휘두르면서 나라를 다스리는데요. 1422년 승하하자 아드님인 세종은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립니다. 그런데 사실 이 ‘태종’이라는 묘호가 약간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데요. 이 태종 묘호에 정치적인 이유가 담겨있었습니다.
22문=‘태종’ 묘호에 어떤 특별한 함의가 담겨있나요?
답=그렇습니다. 원래 ‘태종’이란 묘호는 나라를 창업할 때 창업주(태조)와 함께 가장 공덕이 큰 사람에 붙입니다. 보통은 창업주의 뒤를 이은 2대 황제 혹은 왕에게 붙여요. 그래서 중국 송나라-요나라-금나라-원나라가 2대 황제를 태종이라 했어요. 한마디로 ‘태종’은 태조의 적통인 제1대 종자(宗子)에게 올리는 묘호였던 겁니다.
23문=하지만 태종은 3대 임금이잖아요. 2대왕은 정종이잖아요.
답=그렇죠. 그런데 원래 태종이어야 조선 2대왕은 태종 대신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잖아요. 대신 3대왕인 정안군 이방원이 태종이 되고.
24문=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죠?
답=태종 이방원의 아들로 4대 임금이 된 세종이 큰아버지인 정종을 인정하지 않았던 겁니다. 세종이 생전이 이런 말을 했어요. “부왕(아버지)이 죽은 뒤에는 반드시 태종이 되실 것”이라고요.
25문=만고의 성군인 세종이 왜 큰아버지를 무시한거죠?
답=큰아버지는 적통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버지인 태종이 태조 이성계의 적통으로 왕위를 계승했다는 겁니다. 태종이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나라를 개국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거죠. 그러니까 조선의 적통은 태조-정종-태종이 아니라 태조-태종이라는 거구요. 사실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는 것도 262년이나 지난 숙종 때였어요. 그 전에는 묘호도 인정하지 않고 명나라가 내린 공정왕이라는 묘호만 인정했어요.
26문=세종 임금 너무 하셨네요?
답=임금의 묘호 이야기를 공부해보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고 묘호 역시 마찬가지죠. 한 시대를 풍미한 국왕의 한평생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중대사죠, 그러나 죽은 다음에 얻은 이름이 대체 뭡니까.
선조면 어떻고, 선종이면 어떠며, 인종이면 어떻고, 인조면 어떠리. 순종이면 어떻고 순조면 어떻습니까.
27문=그러네요. 중요한 것은 역사의 평가잖아요. 이름의 평가가 아니고요?
답=그렇죠. 선조하고 인조를 보십시오. 임금이 못나서 나라가 전란에 휩싸이고 백성들은 어육이 되고, 해골이 길바닥에 나뒹구는 신세가 됐잖아요. 인조의 경우 나중에 ‘차라리 광해군 시절이 훨씬 낫다’는 비판이 나오고, 결국 병자호란 후 “나 한사람의 죄로 모든 백성들이 해를 입었다”고 자아비판했잖습니까. 그런데 ‘종사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윤리와 기강을 회복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의 이름을 얻었잖아요. 역사서에 이름만 공이 많다고 ‘조’라 한다고 누가 알아줍니까. 조롱거리만 되든 거죠.
'시사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제사가 성행했던 신라…경주 월성에서 속속 발견되는 인골의 증언 (0) | 2021.09.09 |
---|---|
1000년 전 지독한 여혐 발언의 장본인은 다름아닌 김부식이었다 (0) | 2021.08.20 |
설탕, 그 달콤한 맛 속에 녹아있는 인간의 살 (0) | 2021.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