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 가운데 이곤(1462~1524년)이라는 인물이 있다.
중종은 반정에 참여한 이곤을 연성군에 봉했다. 그의 무덤은 경기 성남시 판교에 자리잡고 있다. 묘비는 그의 사후 35년 뒤인 1559년 손자인 이숙이 조성했다. 그런데 묘비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문양을 발견할 수 있다. 비석의 머리(비두)에 새겨진 ‘삼족오(三足烏)’의 문양이다. 비두는 구름 문양과 수평선의 파도문양에 바다가 보이는 일출광경을 그렸다. 해의 안에는 바로 그 삼족오가 요즘 말로 아주 ‘깔쌈’하게 새겨져 있다.
■태양 10개가 한꺼번에 뜨다
대체 무슨 일인가. ‘고구려의 기상과 정신을 표현한다’는 상징물이 왜 유교이념이 골수에 박힌 조선의 사대부 묘비에 새겨진 것일까.
하기야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 때도 그랬다. 심지어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삼보명자수가사(三寶名刺繡袈裟)>에도 삼족오를 수놓았으니 말이다. 이 뿐이 아니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1085)의 상단에도 삼족오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리고 보면 나라가 바뀌고 사상이 바뀌고 통치이념이 바뀌어도 삼족오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연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복숭아’ 얘기로 삼족오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보자. 좀 생뚱 맞지만 삼족오와 복숭아는 과연 무슨 관계인가. <산해경>, <회남자>, <초사> 등 중국문헌에 나온 이야기를 종합한 재미있는 전설이야기 하나.
“태평성대의 시절이라는 요임금 때의 일이다. 산동지방으로부터 바다 동쪽, 태양이 솟는 곳에 양곡(暘谷)이 있었다. 이곳을 지배한 이는 동방의 천제 제준(帝俊)이었다. 부인은 태양의 여신 희화(羲和)였다, 둘은 모두 10명의 아들, 즉 10개의 태양을 낳았다.
이들은 열흘을 주기로 하루에 하나씩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태양엔 모두 세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매일매일 반복되는 운행주기에 10개의 태양들은 싫증
을 느꼈다. 어느 날 장난기가 발동한 태양들이 부모 몰래 일제히 떠올랐다.
‘우리는 재밌게 한번 놀아보고…. 인간들에게는 또 열배의 이익을 안겨주면 되고…. 그러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세상은 정반대로 돌아갔다. 10개의 태양이 쏟아내는 땡볕에 만물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요임금의 호소를 듣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부모가 말렸지만 아들(태양)들은 듣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명궁 ‘예’를 파견했다. 예는 태양을 차례차례 쏘아 맞추기 시작했다. 빛을 잃고 떨어지는 태양을 보니 그것은 심장에 화살이 박힌 삼족오였다. 예가 10개 중 9개의 태양을 떨어뜨리자 요 임금의 걱정이 하늘을 찔렀다. 10개 모두가 떨어지면 암흑천지가 되어 종말이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 임금은 화살 하나를 감추었다. 이로써 한 개의 태양만이 남게 됐다.
■복숭아를 제삿상에 올리지 않는 이유
그러나 예는 고국(천제의 나라)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귀한 아들 9명이나 잃은 천제(제준)가 예의 지나친 징벌에 화를 낸 것이다. 할 수 없이 지상을 떠돌던 예는 물의 신인 하백의 아내와 불륜에 빠졌다. 예의 본부인인 항아(姮娥)는 남편의 일탈에 분노했다. 항아는 남편이 얻어온 불사약을 혼자 마시고는 달로 올라가 버렸다. 뒤늦게 남편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빠진 항아는 두꺼비로 변신했다.”
한편 지상에 남아야 했던 예는 제자들에게 활을 가르치면서 시름을 달랬다. 그런데 제자 가운데 봉몽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아무리 활을 잘 쏜다해도 스승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여겼다. 질투에 사로잡힌 봉몽은 스승을 죽이려 마음 먹었다. 봉몽은 길목에 숨어 있다가 복숭아 방망이로 사냥을 바치고 돌아오는 스승(예)을 때려 죽였다. 10개의 태양으로부터 세상을 지킨 예는 이렇게 허무한 종말을 맞는다. 예는 이때부터 귀신의 우두머리가 됐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네 제삿상에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귀신의 우두머리인 예도 싫어하는 복숭아를 조상귀신들이 더더군다나 좋아할 리 없기 때문이다. 복숭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예’의 전설은 동이의 전설이 분명하다. 중국의 신화학자들도 ‘예’를 동이계 종족의 신일 것으로 추정한다.
“까마귀가 태양을 운행시키는 것이다. 결국 새를 토템으로 하는 종족과 태양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바로 이 삼족오 신앙이다.”
중국 신화학자 쑨쭤윈(孫作雲)은 “새와 해를 토템으로 한 종족은 바로 동이족”이라고 단정지었다. ‘예’의 신화를 보면 동이의 냄새가 가득하다. 중국 산동반도도 결국 동이계의 터전인 발해연안에 속해 있다. 또한 신화내용 중 산동지방으로부터 바다 건너 동쪽은 어디를 뜻하겠는가. 또 활쏘기의 명수인 예와 봉몽은 고구려 신화의 명궁인 주몽을 연상시킨다. 고구려와 부여 신화에 나오는 물의 신 하백이 예의 신화에 등장하는 것도 심상찮은 대목이다.
하기야 가장 오래된 삼족오의 문양은 역시 동이의 일파로 중원을 석권한 (은)상나라 시대 때 처음 보인다. 즉 은(상)의 수도인 인쉬(殷墟) 허우자좡(侯家莊) 1004호 묘에서 발굴된 청동제 사각형 솥의 문양은 가장 이른 시기의 삼족오 형상이다.
한 때 삼족오는 한나라 시대의 고분벽화나 화상석, 기물장식 등에도 일부 전해졌다. 그렇다면 동이만의 전유물은 아닐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물론 맞을 수 있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대부분의 삼족오 문양은 동이계의 전통인 돌무덤에서 확인된다, 돌무덤은 고구려와 백제 등으로 이어지는 동이계의 전통 장례 방식이다. 이형구 교수는 “한나라 시대든, 어느 시대든 그 곳에 살고 있던 동이계 주민들의 문화이자 신앙으로 면면히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것도 수·당 시대를 지나면 중국에서의 삼족오 신앙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삼족오 ‘가운뎃다리’의 비밀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왜 하필 까마귀 중에서도 세발 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이어야 하는가 말이다. 당나라 서견(徐堅)과 송나라 홍흥조(洪興祖)는 삼족오를 두고 아주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해 안에 있는 삼족오를 양정(陽精)이라 한다. 그것은 온윤한 곳에서 성장한다”(서견의 <초학기(初學記>)
“양은 3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해 안에는 삼족오가 있다, 이것을 양정(陽精)
이라 한다,”(홍승조의 <초사보주(楚辭補注)>
이형구 교수는 “양정(陽精), 그러니까 세 발 가운데 하나(가운데)는 남성의 상징인 양물, 즉 생식기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삼족오의 가운데 다리는 바로 생식기란 뜻인가. 또 하나 월중섬여와 함께 해석한다면 “삼족오는 양(陽), 달 속의 두꺼비(월중섬여)는 음(陰)을 뜻한다”(<문선·文選>)는 풀이가 설득력을 갖는다. 오묘한 음양의 조화이다.
또 동이족이 ‘3(三)’을 끔찍히도 사랑해왔음을 주목할 수 있다.
“내기를 해도 삼 세 번 해야 직성이 풀리고, 의사봉도 3번 두들겨야 하고, 독립선언문에도 33인이 등장하고, 한글 창제원리도 하늘·땅·사람 등 3을 중심으로 삼았고….”
손환일 박사는 “삼족오 신앙 이같은 민족의 집단적 무의식을 반영한 사상이 아닐까”하고 풀이하고 있다.
■이적(異蹟)의 신령한 새
비단 고구려 뿐이 아니었다.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줏빛 알에서 태어나고, 2대 탈해왕이 역시 알에서 태어난 신라에서도 까마귀는 ‘이적(異蹟)’의 대상이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가 대표적이다.
■삼족오, 일본축구의 문양이 된 까닭은
어떻든 삼족오의 뿌리는 이처럼 깊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대부인 연성군 이곤 묘비에 새겨진 문양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즉 구름 사이로 펼처진 수평선에 떠오르는 일출….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 속에 보이는 ‘삼족오’….
“그것은 곧 해뜨는 동방의 나라, 조선의 상징을 새긴 것이 아니었을까. 이 문양은 동이족, 즉 한민족을 상징하는 징표이자 민족신앙이 아니었을까.”(손환일 박사)
삼족오는 조선시대 들어서도 ‘연성군 이곤묘비’처럼 본연의 모습으로, 아니면 다소 변형된 형태로 전래됐다. 민화에 활용됐고, 막새기와나 가사 수장, 등잔과 당상관 흉배일월도, 무구 등에서 이용됐다. 심지어는 대한제국기의 의장기인 일기(日旗)로도 활용되는 등 대부분 신앙이나 상징의 대상으로 표현됐다. 요즘엔 어떨까. 관념으로만 ‘삼족오’를 ‘고구려의 상징’으로 여길 뿐, 그저 죽음을 연상시키는 까마귀, 즉 흉조로 기억될 뿐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축구협회의 엠블럼과, 일본축구대표팀의 유니폼에 ‘삼족오’ 문양이 있다는 사실을
접하기만 하면 마치 큰일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또 일왕의 즉위식에 입는 곤룡포에 삼족오의 문양이 있다면 또 어떨까.
그러나 일본에서도 삼족오 신앙은 만만치 않다. <고사기> 등 8세기 일본 문헌에는 ‘야타가라스(八咫烏)’라는 신령스런 까마귀가 나온다. ‘야타(やた)’는 ‘대단히 큰 것’이고, 가라스(がらす)는 까마귀이다.
이 상상 속 까마귀가 건국의 신이라는 진무(神武) 천황의 동정(東征) 때 길잡이를 해줬다는 전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천황 가문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 도래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일본이 삼족오 신앙을 믿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고구려 기상의 상징인 삼족오를 지금 당장 국가와 민족의 상징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한다면? 아마도 국수주의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냉소하고 폄훼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이 순간 ‘까마귀를 흉조’로 여기 고, 터부시한다면…. 아마도 ‘김치’가 ‘기무치’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들이 생길 터이다.
/문화 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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