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최북단. 강 건너 북한마을이 손에 잡힐 듯하다. 지금은 ‘평화전망대’이지만, 이 야트막한 봉우리의 원래 이름이 제적봉(制赤峰)이다. ‘빨갱이(赤)를 제압(制)한다’는 뜻이니, 얼마나 증오에 가득찬 이름인가. 하기야 저 강은 1600여 년 전(396년)에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4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략했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군이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이 둘러싼(四面초絶 海水環繞) 관미성(오두산성)을 20일 동안이나 공격한 뒤 함락시켰다”고 기록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추억이다.
■정전협정 제1조 제5항
하지만 이곳은 평화의 상징일 수 있다. 당장 제적봉이라는 살벌한 이름은 지금 ‘평화전망대’라는 이름을 얻지 않았는가.
사실 저곳은 원래부터 전쟁과 반목, 증오의 이름으로 일컬어질 강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라.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오두산) 도도한 물결을 이루며 흘러가는 곳이다. 여기에 다시 황해도에서 내려오는 예성강이 합류하면서 저 서해바다로 빠져 나간다. 찢겨진 세 강이 만나 넉넉한 품을 이루며 큰 바다 망망대해로 뻗어가는 강…. 이 강은 원래부터 평화와 통합의 강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예로부터 사람들이 저 강을 ‘조강(祖江)’, 즉 ‘할아버지 강’이라 했다지 않는가.
뿔뿔이 흩어져 살아온 가족을 넉넉한 품으로 안아주는 할아버지와 같은…. 그러나 조강은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의 시대를 걸으면서 절대 발을 들여놔서는 안될 금단의 강이었다. 불과 3.2㎞ 너머 농사짓고 있는 북한 농부들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런데 이 금단의 조강이 남북간 증오의 역사를 종식시킬 일종의 ‘평화수역’임을 아는 많지 않다. 리영희 선생은 “‘한강하류~황해 사이의 수역’(조강)은 남북한의 민간배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자유통행권’을 갖는 수역”이라고 해석했다. 선생은 “한강하구 수역(조강)은 쌍방이 승인한 남북공용의 특수구역이자 국제수로(international water ways)”이라고 규정한다. 그 근거로 정전협정을 든다.
“‘한강하구의 수역’(조강)으로 그 한쪽 강 기슭 다른 일방의 통제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간선박의 항해에 이를 개방한다. 한강하구의 항행규칙은 군사정전위원회가 이를 규정한다. 쌍방 민간선박이 항해함에 있어 자기 측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않는다.”(정전협정 제1조제5항)
그러니까 민간선박은 조강, 즉 한강+임진강 합수부~강화도~예성강 합수부~굴당포(황해도)·불음도(경기도)까지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조강=국제수역
이것을 공식적으로 처음 거론한 이는 리영희 교수였다. 리영희 선생은 1999년 6월11~15일 서해교전이 벌어지자 매우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한다. 즉 그해 계간 <통일시론>의 여름호에 실린 <북방한계선은 합법적인 군사분계선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북방한계선은 합법적인 군사분계선이 아님’을 논증했다,
리영희 교수는 우선 양측이 정전협정문에 해상 군사분계선을 긋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남측이 주장하는 북방한계선(NLL)은 원래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 움직임을 막기 위해 미군이 내부적으로 정한 선이라는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이어 정전협정문 제1조 제5항을 들면서 “한강하구 수역(조강)은 쌍방이 승인한 남북공용의 특수구역”이라고 규정한다. 즉 “정전협정은 한강하류~황해에 접하는 남북한 사이의 수역은 일종의 ‘국제수로(international water ways)’로 규정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선생은 “서해안의 한강하구 수역 내에서 남북한의 민간 배들은 일종의 ‘자유통행권(right of free passage)’ 혹은 ‘무해통행권(right of innocent passage)을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전협정 첨부지도(제2도)에 그려져 있는 A(가)~B(나)선은 무엇인가. 육상에 그어진 군사분계선과 같은 해상군사분계선은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첨부지도(제3도)는 각주를 달아 이 선의 기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즉 “서해안 한강하구 공용수역에 산재하는 수없이 많은 작은 섬들에 대한 통제권을 표시하는 기준선”이라는 것이다.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첨부지도(지도2)의 ‘주(注)1’에 “이 선은 (통제를 표시할 뿐이지 그 외에는) 아무런 의의가 없으며 또한 이에 다른 의의를 첨부하지도 않는다”고 엄격하게 규정해놓았다.
“그러니까 이 선은 작은 섬들에 대한 유엔측과 공산측의 관할권만을 표시한 것이며, 북한의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 경계선을 표시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선은 해상군사분계선의 기능은 없다. 정전협정 1조5항, 즉 ‘한강하구 수역(조강)=국제수로’라는 원칙은 유효하다.”(리영희 선생)
이렇게 정전협정상 ‘한강하구 즉 조강=민용선박의 자유항해 수역’으로 규정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육상의 비무장지대처럼 적대행위가 빈발했다. ‘한강하구 순찰선박 총격(1962)’을 비롯해 한강하구 순찰대 피습(1967), 임진강 무장공비 침투(1968), 임진강 및 강화도 무장 공비와 간첩 침투(1971), 한강하구 침투 무장공비 사건(1980), 임진강(현수교) 침투 무장공비 사건(1981) 등등….
■유도 송아지의 비밀
그런데 1990년 긍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그 해 11월 한강하구, 즉 조강 수역에 남측 준설선이 통과한 것이다. 사연인 즉은 그 해 엄청난 수해로 한강 하류와 임진강변의 제방이 유실됐다. 복구를 해야 했다. 육로로도 복구자재와 장비를 운반할 수 있었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만약 조강(한강하구)을 통과한다면 금상첨화였다. 이 때 준설선의 조강 통과를 위해 애쓴 이가 있었다. 바로 당시 유엔사 정전위원회 수석대표의 특별고문이었던 이문항씨(미국명 제임스 리)였다. 이문항씨의 회고.
“공식접촉 보다는 평소 접촉해온 북한측 군정위 고위간부들과의 비공개 모임을 요청했다. 준설선과 예인선 8척이 인천~교동도를 거쳐 한강하구로 진입, 한강하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획을 설명했다. 특히 군부와는 상관없는 민간건설회사가 공사를 시행한다는 점과 선박, 인원, 적재물 등의 자료를 모두 사전에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북한은 이틀 뒤 판문점 직통전화를 통해 이같은 제의를 수락했다.~”
사실 정전협정을 따져보면 북한으로서도 이문항씨의 요청을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이문항씨는 다만 정치적인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막기 위해 비공식적인 요청을 한 것이다. 이것은 휴전 이후 47년 만에 처음으로 정전협정문에 따라 한강하구(조강)에서 민간선박이 통행한 사례로 기록됐다.
이후에도 조강에서는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했다.
1996년 집중호우로 떠내려가던 두살바기 송아지 한마리가 조강의 한복판에 있던 유도에 걸려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먹을 것이 없던 송아지는 빼빼 말라갔다. 송아지가 갇혀있던 유도는 사실 정전협정에 따르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섬이다. 1997년 1월 17일, 보다못한 해병대 제2사단 병력 24명이 고무보트 7인승 4척에 분승, 위기에 빠진 송아지를 구출했다. 당시 유엔사는 군사정전위 비서장 명의로 대북통지문을 발송한 것으로 구출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정전위가 북쪽에 통보한 것은 출입일시와 인원, 장비 뿐이었다.
애시당초 국제수역인 조강의 한복반에 있는 중립지역(유도)를 출입하는데 북한의 동의를 얻고 말고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송아지는 1998년 제주도 출신 암소와 혼인해 7마리의 새끼를 낳았고, 2006년 자연사했다. 북쪽의 황소가 남쪽의 암소를 만나 자식을 낳았다? 이 7마리의 송아지야말로 통일을 상징하는 ‘통일소’가 된 것이다. 하기야 조강(한강하구)은 정전협정에 따르면 얼마든 평화와 통일의 강이 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1999년 2월18일에는 조강의 중립수역인 납섬에 서검도 주민 소유의 염소 10마리가 표류했다. 이 때도 해병대원 34명이 투입돼 염소들을 회수했다. 하지만 이 때는 북한 측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다. 이후 1999년 8월에는 집중호우로 북한측 관산포 일대에 표류한 준설선을 예인한 일도 있었다.
■중단된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
이처럼 정전협정 상에 ‘조강(한강하구)=국제수역’으로 해석될 수 있는 조항이 명백하게 들어있었고, 실제로 이 조항에 따라 몇번 불가피한 통행의 사례도 있었지만, 이것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임진강+한강합수부~조강~서해5도를 잇는 해상군사분계선과 북방한계선(NLL)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바 없는 ‘공리’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강하구(조강)의 성격을 공식적으로 처음 확인한 리영희 선생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관심이 증폭된다.
사진작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이시우씨 등을 주축으로 ‘한강하구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가 계획된 것이다. 첫 행사는 정전협정 52주년을 맞은 2005년 7월27일 열기로 했다.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이시우씨의 회고.
“리영희 선생의 논문을 보고 떠올린 행사입니다. ‘쌍방 민간선박의 항해에 한강하구수역을 개방한다’는 정전협정 제1조5항에 따라 배를 띄워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강화도 외포리~창후리 어로한계선~인화리 한강하구선~한강하구수역~외포리 등을 도는 코스로 준비했습니다. 처음 행사 이야기를 하자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비서장인 캐빈 매든 대령도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했어요.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어요.“
정전협정에 따르면 유엔사로서는 거부할 근거가 없었다. 하지만 행사를 불과 일주일 앞둔 21일 오후 팩스 한 장이 조직위원회로 전해졌다. 유엔사가 아니라 우리 국방부가 보낸 팩스였다. 팩스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400t 이상의 대형선박에 304명이 승선하면 좌초 등의 사고가 일어났을 때 신속한 구조가 어렵다. 따라서 어로한계선 북방 800m 지점까지만 운항이 가능하다.”
조직위는 국방부의 회신을 존중해서 500t 규모의 선박(승선인원 300명)을 띄우기로 했던 행사일정을 바꿨다. 즉 500t 선박은 어로한계선 800m 지점까지만 운항하고, 한강하구는 35t급(승선 인원 24명) 선박으로 바꿔 진입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행사를 불과 이틀 남긴 7월25일 국방부는 ‘한강하구(조강)의 진입’을 사실상 불허하는 내용의 회신을 조직위에 내려 보냈다.
“한강하구 내에서의 선박운행은 향후 남북 당국 간 및 유엔사-북한군 간 합의하에 한강하구 수저(水底)에 대한 정밀조사와 연구를 통해 안전한 수로가 확보된 이후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국방부가 ‘안전상’이 이유로 불허한 것이다. 이시우씨는 “우리 국방부가 앞장서 불허방침을 내린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정전협정 제1조5항은 ‘한강 하구의 수역은 민간선박의 항해에 이를 개방하고 쌍방의 육지에 배를 댈 수 있다’는 원칙을 담고 있지만, 아울러 “한강 하구의 항행규칙은 군사정전위원회가 이를 규정한다”는 내용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엔사가 아닌 국방부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조강 통행은 허가가 아니라 등록사항
유엔사와 국방부 등이 조강(한강하구)의 자유통행을 막는 근거로 내미는 조항이 있다. 바로 ‘한강하구의 항행규칙은 군사정전위원회가 규정한다’는 조항이다, 1953년 10월3일 군사정전위원회는 정전협정 제1조 5항에 나온 ‘항행규칙’을 마련하기 위해 ‘한강 하구에서의 민용 선박 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을 마련했다. 우선 한강하구에는 군사분계선이 없기 때문에 사민(민간인)과 민간선박의 통행은 원칙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다만 쌍방 사령관은 자기 측의 선박등록에 적용할 규칙을 규정해야 하며, 한강하구를 통행하는 선박도 몇가지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니까 ‘조강, 즉 한강하구는 원칙적으로 남북의 민간항행에 개방되어 있다. 다만 그 항행규칙은 군사정전위가 정하도록 되어 있고, 남측의 경우 선박의 등록절차 등은 유엔사가 하도록 되어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 항행규칙을 가만히 보면 한강하구를 드나드는 민간선박은 항행규칙에 따라 유엔사에서 소정의 등록절차를 밟으면 된다는 뜻이 아닌가.
말하자면 ‘항행규칙’은 유엔사의 ‘허가’ 사항이 아니라 유엔사에 소정의 절차만 밟는 ‘등록’ 사항이라는 것이다.
정태욱 교수는 “한강하구를 항행하는 권리는 이미 존재하며, 등록에 따라 실행할 따름”이라며 “따라서 유엔사는 신청자들이 일정유건을 가추었을 때 통행을 허용해야 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행정법학의 구분을 원용하면, 비무장지대의 출입은 허가 사항이고, 한강하구의 항행은 확인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의 경우로 비유하자면, 비무장지대의 출입 허가가 건축 허가에 해당한다면, 한강하구의 등록절차는 건축물의 준공검사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유엔사가 평화적인 민간선박의 통행을 허가하고 불허할 권리(관할권)가 없다는 것이다. 민간선박이 적대행위와 위험성이 명백하지 않다면 등록절차에 따라 통행은 의무적으로 허용돼야 한다는 것이 장태욱 교수의 해석이다. 분명한 것은 정전협정이 항행규칙보다 상위의 법이라는 점이다,. 정태욱 교수는 아예 한강하구(조강)을 일종의 ‘평화구역’으로 설정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조강에 유람선을 띄우자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가 국방부의 불허로 반쪽행사로 끝난 2005년 11월7~11일 정반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등의 주도로 한강에 정박중이던 거북선을 한강하구(조강)로 항행하도록 한 것이다. 거북선은 조강을 거쳐 한산대첩 전적지 해상으로 이동했다. 유엔사 군사정전위는 항행규칙에 따라 선박등록 및 등록증을 받아 북측에 통보했다. 또 수로조사와 거북선 이동 일정 등의 내용을 담은 대북통지문을 발송했다. 그야말로 정전협정과 항행규칙에 따라 적법한 절차를 통해 통행한 것이다.
물론 돌발적인 적대행위가 일어날 수도 있는 만큼 유엔사나 정부나 쉽게 민간선박의 통행을 허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작금이라면 더군다나 거론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2005년 이후 형식적으로나마 열렸던 한강하구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가 올해엔 아예 열리지 않은 것도 저간의 사정을 반영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저 할아버지 강, 조강은 분단과 반목의 강이 아니라 통일과 화합의 강이라는 것이다. 임진강과 한강을 담고. 다시 예성강까지 품에 안아 저 망망대해로 달려나갔던….
■‘정전협정에는 북방한계선이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남북간 두고두고 골치 아픈 ‘서해 5도’와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앞서도 밝혔듯 정전협정은 해상군사분계선을 설정하지 않았다. 조강, 즉 ‘한강하구’ 조항은 이미 설명한 바 있으니 생략하겠다. 정전협정 제2조 제13항 ㄴ항을 보자.
“본 휴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10일 이내에 상대방의 한국에 있어서의 후방과 연해제도 및 해면으로부터 그들의 모든 군사력, 보급물자 및 장비를 철거한다.~ 상기한 연해제도라는 용어는 1950년 6월24일에 상대방이 통제하고 있던 섬들을 말하는 것이다.
단 황해도와 경기도 도계선(가~나) 북쪽과 서쪽에 있는 모든 섬 중에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의 국제연합군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남겨두는 도서군을 제외한 기타 모든 섬은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의 군사통제하에 둔다. 한국 서해안에 있어서 상기 경계선 이남에 있는 모든 섬들은 국제연합군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남겨둔다.”
양측은 이같은 내용을 담은 ‘지도 3’(서부 연해섬들의 통제)를 첨부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주석을 지도 위에 남겨놓는다.
“(주1)“가~나 선은 서부섬들의 통제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 선은 이무런 의의가 없으며, 또한 이에 다른 의의를 첨부하지도 못한다.”
“(주 2)각 도서군들을 둘러싼 장방형의 구획의 목적은 다만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남겨두는 각 도서군들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방형 구획은 아무런 다른 의의가 없으며, 또한 이에 다른 의의를 첨부하지도 못한다.”
■정전협정 지도에 붙은 엄격한 주석의 의미는?
무슨 뜻인가. 리영희 선생은 이 조항을 조목조목 알기쉽게 설명해놓았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서해상의 웬만한 섬들은 압도적인 제공권과 재해권을 장악한 유엔군의 점령 또는 관제 아래 있었다. 하지만 양측은 서해해상 섬들의 통제권을 정전협정 발효일(1953년7월27일)의 실제적인 점령상태가 아니라, 전쟁 발발 전날(1950년 6월24일)을 기준으로 삼았다.
또한 그 분계선은 과거 시점의 황해~경기도 분계선(A가~B나)으로 삼았다. 다만 그 도경계선의 북쪽과 서쪽의 섬 가운데 백령도를 비롯한 큰 섬 5개는 유엔군 통제아래, 나머지 섬들은 북한의 통제 아래 둔다는 것이다. 또 하나 황해~경기도 분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유엔군의 통제아래, 북쪽은 북한의 통제아래 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도에 기록한 (주1)과 (주2)는 굉장히 엄격한 단서이다. 즉 (주1)에서 황해도~경기도 경계선(A가~B나)은 그저 도경계선이며. 육지에 가까운 서해연안의 많은 섬들의 남북통제권을 명시하는 선일 뿐이다. 그 선을 연장하거나 접속시켜서 다른 ‘선’이나 ‘구역’의 일부로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주2)는 더욱 엄격하다. 정전협정 첨부지도 제3도를 보면 유엔군 통제하의 서해5도 둘레에 4각형 형태의 점선을 그렸다.
그러나 (주2)는 섬의 위치를 표시하는 점선일 뿐, 그 사각형 안의 공간은 어떤 수역이나 구역, 구획과 같은 공간의 면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더구나 그 점선 사각형을 서로 연결해서 어떤 목적의 선을 긋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리영희 선생은 기하학의 초보적 공리를 인용한다.
“기하학의 초보적인 공리의 하나인 점(點)은 ‘위치는 있으니 크기는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공리가 서해5도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제수역인 조강~서해5도를 잇는 어떤 선도 정전협정에 따르면 불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연히 남측이 설정한 북방한계선(NLL)과 북한이 선포한 50마일 군사경계수역 등은 일방적인 선언 및 주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북방한계선은 이승만 정권의 북침을 막기 위한 것
북방한계선의 전신은 ‘클라크라인’은 1952년 9월27일 설치됐다. 유엔군은 지지부진한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 해안봉쇄를 실시하려고 했다. ‘클라크 라인’은 휴전이 성립된 이후인 1953년 8월27일 정전협정에 따라 철폐됐다.
하지만 미군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전쟁재개 움직임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이 발효된 이후에도 북진통일을 외치고 두만강~압록강선까지의 전쟁재개를 끈질기게 요구했다. 현 전선에서의 휴전을 공약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의 잇단 도발 위협에 진저리를 쳤다.
급기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11월 4일 최후통첩에 해당되는 극비친서를 보낸다.
“만약 귀하(이승만)가 독단으로 군사적 공격행위를 결심한다면 나(아이젠하워)는 귀하에게 대한민국 군대는 참담한 괴멸적인 패배를 당할 뿐 아니라 기능할 수 있는 군사집단으로서는 영원히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본인의 확신을 전달한다~.”(<한국전쟁에 관한 미국정부 극비문서집 1952~1954>)
그러면서 ‘이승만이 도발할 경우’ 쿠데타를 일으켜 체포하고 한국정부를 해체시킨 뒤 한국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등의 응징계획까지 만들었다.
따라서 리영희 선생은 “미국은 혹 있을 지도 모를 이승만 정권의 서해 도발을 막으려 이전의 ‘클라크라인’을 한국해군의 ‘북방한계선’으로 규정해놓은 것으로 믿어진다”고 결론을 내렸다. 명칭이 ‘북방한계’라는 점도 이상하다는 게 리영희 선생의 말이다. 북한해군의 행동을 제한하려 한 것이었다면 응당 ‘북한해군의 남방한계선’이어야 하지 않을까.
“남북 사이의 서해수역은 어느 쪽도 합법적으로 관할권의 배타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정전협정상 공백으로 남겨져있는 수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북한(유엔군 포함)은 이 수역에 대한 성격규정을 새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남북해군 충돌과 같은 사건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조치이다.”
<참고자료>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 리영희, ‘통일시론 1999 여름호’, 청명문화재단
<JSA-판문점(1953~1994)>, 이문항, 소화, 2001
<한강하구(정전협정의 틈, 유라시아로의 창)>, 이시우, 통일뉴스, 2008
<한강하구 평화정착과 국제법적 해법>, 정태욱, ‘한강하구의 평화정착과 행태평화적 발전전략 토론회’(한강하구 평화의 배띄우기 조직위 주최), 2007
<분단의 섬 민통선>, 이기환, 책문, 2009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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