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lkh@kyunghyang.com
강화도 최북단. 강 건너 북한 마을이 손에 잡힐 듯하다. 지금은 ‘평화전망대’이지만, 이 야트막한 봉우리의 원래 이름은 제적봉(制赤峰)이다. ‘빨갱이(赤)를 제압(制)한다’는 뜻이니, 얼마나 증오로 가득 찬 이름인가. 하기야 저 강은 1600여년 전(396년)에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4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략했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군이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이 둘러싼(四面초絶 海水環繞) 관미성(오두산성)을 20일 동안이나 공격해 함락시켰다”고 기록했다. 이 수역은 예로부터 조강(祖江), 즉 ‘할아버지 강’이란 이름을 얻고 있다.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을 품에 안고 망망대해로 빠져나가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이 금단의 조강이 남북간 증오의 역사를 종식시킬 일종의 ‘평화수역’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리영희 선생은 “‘한강하류~황해 사이의 수역’(조강)은 남북한의 민간배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자유통행권’을 갖는 수역”이라고 해석했다. “쌍방이 승인한 남북 공용의 특수구역이자 국제수로(international water ways)”라는 것이다. 선생은 그 근거로 정전협정을 들었다. 정전협정문에 첨부된 지도를 보면 군사분계선(휴전선)은 ‘서해안 임진강 하구부터 동해안 간성까지’(지상 250㎞) 그어졌다. 군사분계선은 육상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해상 군사분계선은 없으니, 조강에도 군사분계선이 없다는 얘기다. 정전협정은 또 다른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한강 하구의 수역’(조강)으로 그 한쪽 강 기슭 다른 일방의 통제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간선박의 항해에 이를 개방한다.”(정전협정 제1조 제5항·지도)
한마디로 민간선박은 조강, 즉 한강+임진강 합수~강화도~예성강 합수~불당포(황해도)·불음도(경기도)를 연결하는 수역을 마음대로 통행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정전협정의 조항을 주목하는 이가 없었으니 까마득히 몰랐던 것이다. 아니 이 ‘금단의 조강’을 논하는 것 자체가 터부시됐을 터였으니까….
물론 민간선박이 실제 조강을 통과하려면 군사정전위가 마련한 항행규칙(1953년 10월3일)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이 규칙은 반드시 받아야 하는 ‘허가’ 사항이 아니라 소정의 절차만 밟으면 되는 ‘등록’ 사항이라는 해석이 옳다. 지금은 워낙 일촉즉발의 상황이 많으니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여름휴가 때 저 ‘할아버지 강’을 따라 저 서해바다까지 유람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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