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1일은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우리 기술로 만든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가 성공적으로 우주궤도에 안착한 날이죠.
이제 자력으로 1t 이상의 실용위성을 지구 상공 700㎞ 저궤도에 올릴 수 있는 7번째 국가(러시아·미국·유럽·중국·일본·인도)가 되었는데요.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우주에 갈 수 있는 우주독립을 실현했다 할까요.
벌써 2030년이면 우리 손으로 만든 발사체와 탐사선을 달에 보내고, 나아가서는 화성까지 탐사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답니다.
■“우주로 나가라”는 홍대용의 설파
명색이 ‘히스토리텔러’인 저는 몇몇 칼럼에 주목했어요.
과거 천문·우주를 향한 가없는 호기심과 관심을 쏟았던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은 원래 우리 조상들은 세계최고의 로켓기술 보유국이었다면서 최무선(1325~1395)이 만든 ‘주화(走火·달리는 불)’와, ‘주화’를 개량한 ‘신기전’과 ‘화차’ 등을 꼽더라구요. 또 어떤 분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 하늘 이야기를 담은 ‘천상열차분야지도’, 우리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문현상 등을 관측·연구해서 편찬한 역법(<칠정산>) 등을 꼽았습니다.
이 가운데 실학자겸 과학사상가인 담헌 홍대용(1731~1783)의 언급이 눈에 띄더라구요. 담헌은 ‘지구자전론’은 물론이고 ‘우주무한론’을 설파했는데요. “하늘의 뭇별은 각각의 세계를 갖고 있다. 우주세계에서 지구 또한 한 개의 별일 뿐이다. 무한한 세계가 우주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 만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담헌서> ‘보유·내산문답’)는 주장입니다.
“지구에서 보이는 외에도 은하 세계와 같은 것은 몇 천, 몇 만, 몇 억이나 되는 줄을 알 수 없다.”
어떻습니까. 담헌의 주장은 “어찌 좁은 지구를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느냐. 이제 지구를 넘어 드넓은 우주로 나가라”는 외침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 담헌의 외침을 240여 년 후의 우리 과학자들이 ‘누리호 발사성공’으로 실현시킨거구요.
■사실로 밝혀지는 고려사·실록의 천문기록
그런데 사실 담헌의 선배들이 활약한 우리 우주·천문학의 수준은 당대 최고라 할만큼 선진적이었습니다.
그 예를 하나하나 들춰보겠습니다. 2017년이었습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흥미로운 천문학 논문이 실렸습니다.
미국·영국·폴란드 등 6개국 공동연구진이 2016년 남미 칠레에서 전갈자리 꼬리부분에 있는 한 별을 둘러싼 가스구름을 관측했습니다. 그런데 별의 움직인 방향과 속도 등을 계산하던 공동연구진이 들춰본 기록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세종실록> 1437년 음력 2월5일자였습니다.
“객성(客星·신성)이 미성(尾星·전갈자리)의 둘째 별과 세째 별 사이에 14일간이나 나타났다.”
공동 연구진이 관측한 가스구름은 바로 1437년 폭발한 신성의 흔적이었습니다. 조선 천문관의 관측기록이 자그만치 579년 뒤에 최첨단 기구로 무장한 천문학자들의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된 셈입니다.
세종시대의 천문관 뿐이 아닙니다. 고려·조선의 천문학자들은 밤하늘의 우주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천문 현상들을 관측하고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당대 서양 천문학을 압도할 수준이었습니다.
1073년과 1074년 <고려사> 기록을 보겠습니다
“1073년(고려 문종 27) 동벽의 남쪽(물병자리)에서 객성이 나타났는데, 이듬해인 1074년에도 다시 같은 자리에서 객성이 보였는데 크기가 ‘모과’만 했다.”
그로부터 931년 뒤인 2005년 한국천문연구원의 양홍진·조세형 박사와 경북대 박명구 교수, 고등과학원의 박창범 교수 등이 이 객성의 정체를 발견했습니다. 이 객성이 물병자리 ‘아르 아쿠아리’라는 신성의 폭발이었음을 논증한 겁니다.
어떻게 밝혀냈을까요. 연구진은 이 객성의 크기가 ‘모과만 하다’는 <고려사> 기록에 주목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새로운 별이 나타나면 크기에 따라 계란·술잔·모과·바리(밥그릇)·질장구(흙으로 만든 화로 모양의 장구) 등으로 표시했는데요. 연구진은 이렇게 유성의 밝기를 다양한 사물의 크기를 비유한 자료를 현대의 별밝기 등급으로 환산했습니다.
즉 계란은 3~4등급, 술잔은 2~3등급, 모과는 1~2등급, 바리는 0~1등급, 질장구는 0~-1등급으로 추정했는데요.
1등급이 차이 나면 밝기는 2.5배 차이 납니다. -등급은 아주 밝아서 태양은 -26.8등급인데요.
1073~1074년 사이에 두 번 나타난 ‘모과’ 크기의 객성 밝기는 1~2등급에 해당되는데요. 북두칠성에서 가장 밝은 끝 별(1.8등급)에 해당되는 밝기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연구팀은 이 별이 지구로부터 890광년 떨어져 있으며, 폭발 당시 10의 37승 줄(태양이 830년 동안 내는 에너지)를 발산한 것으로 추산했다.
그런데 이 1073~74년 사이에 관측된 이 신성폭발 기록은 오로지 <고려사>와 <증보문헌비고> 등에만 보입니다.
우리나라 고천문 관측자료가 얼마나 우수했는지를 웅변해주는 대목이죠. 당시 국내연구진의 논문은 세계 5대 천문학 저널 중 하나인 <천문학·천체물리학지>의 표지 논문으로 선정됐습니다.
■별의 정체를 두고 집중토론을 벌였다
1572년 11월6일 덴마크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1546~1601)가 특이한 별을 발견했습니다.
카시오페아 자리에서 별의 사멸현상인 대폭발, 즉 초신성을 관측한 겁니다. 관측 후 브라헤는 “우주는 불변”이라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신봉하던 이들을 향해 “아둔하고 눈먼 자들이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당대 조선의 성리학자 율곡 이이(1536~1584)의 <석담일기>에 심상치않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1572년(선조 5) 음력 10월 객성이 책성(策星·카시오페아의 일부)의 옆에 나타났다. 그 크기가 금성보다 컸다.”
1572년 음력 10월이라면 티코 브라헤가 카시오페아 자리에서 찾아낸 바로 그 무렵이었죠. 유럽에서 보였던 초신성이 조선의 밤하늘에서는 보이지 않을 리 없습니다. 유럽인들은 이 ‘티코의 초신성’이라 했는데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적어도 ‘율곡의 초신성’이라 하지 않을까요.
그로부터 20년 뒤 조선에서는 기이한 천문현상을 두고 15개월간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내용일까요.
즉 1592~1594년 사이 무려 4개의 객성이 관측되었는데요. 그런데 그중 ‘천창성(고래자리) 동쪽에 나타난’(<선조실록>) 1개의 객성이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이 객성은 1592년 10월 20일~1593년 2월 24일 사이의 3개월간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요.
그런데 5개월의 공백기를 보낸 뒤 1593년 7월17일~1594년 1월4일 사이의 6개월간 다시 나타났습니다.
당시 조선 천문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객성’은 이름 그대로 ‘손님별’인데 왜 같은 자리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를 반복한 것일까요.
하도 이상해서 전현직 천문관들이 모여 이 객성의 실체를 두고 집중토론회까지 열었습니다.
그 결과 “임진년(1592년)부터 천창성(고래자리)에서 두 차례에 걸쳐 15개월간 관측된 이름없는 별을 객성이라 했지만 이 별은 객성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항성 같다”(<선조실록> 1594년 8월2일)고 수정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로부터 400년 뒤인 2007년 국내 천문학자들이 이 별의 실체를 규명했는데요.(박명구·박창범·양홍진의 ‘한국 고천문 초신성 기록연구’, 2007)
이 별은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니라 별의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하는 ‘변광성’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천창성(고래자리) 안에 존재하는 ‘MIRA 변광성’이었는데요. 이 변광성은 평균 11.3개월을 주기로 2~11등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별의 밝기가 변화되는 별이죠. 지름이 태양의 300배나 되는 초거성으로서 별 내부가 불안정하여 불규칙적으로 변합니다.
서양에서 이 변광성을 발견한 것은 1596년이었고, 1642년 요하네스 헤벨리우스에 의해 ‘MIRA(Mira· 놀라움)’라는 이름이 붙었는데요. 그렇다면 조선 천문관들은 서양보다 4년 먼저 발견했고, 또 집중토론을 거쳐 2년 먼저 그 정체를 확정지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오히려 조선의 천문학 수준에 ‘놀라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케플러보다 4일 케플러 초신성을 발견
그러나 놀랄일이 더 있습니다. ‘케플러 초신성’이라는 천문현상을 아시죠.
1604년 10월 17일부터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가 체코 프라하에서 관측한 초신성입니다.
신성과 초신성은 우리 역사서에서 ‘손님별’, 즉 ‘객성’으로 통칭되고 있는데요. 별이 폭발할 때 방출되는 빛 때문에 엄청나게 밝아지는 현상을 말하죠. 초신성은 밝은 정도가 신성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초(超)라는 접두어가 붙었습니다.
그러나 폭발의 양상인 완전히 다르죠. 신성은 별의 표면만 폭발하는 현상이구요. 반면 초신성은 별 자체가 완전히 폭발해서 사라져 버리는 천문현상입니다. 이를테면 ‘별의 사멸’입니다. 때문에 어느 별에서 신성 현상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지만, 별의 최후 때 폭발한 뒤 사라져 버리는 초신성 현상은 딱 한번 나타나죠.
1604년 관측된 이른바 케플러 초신성은 우리 은하에서 인간이 육안으로 목격한 마지막 초신성이라 합니다.
그런데 1604년(선조 37) 음력 9월 21일자 <선조실록>에 심상치 않은 천문기록이 보입니다.
“1경(오후 7~9시)에 객성이 미수(尾宿·전갈자리) 10도의 위치에 있었다. 형체는 목성보다 작고 색깔은 황적색이었다.”
음력 9월21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13일입니다. 케플러가 초신성을 관측하기 4일 전의 기록이죠. 그렇다면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케플러 보다 4일이나 먼저 별의 사멸과 함께 펼쳐지는 우주쇼를 관측한 겁니다.
■“객성은 도적별이다. 큰일 났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고려~조선 왕조의 천문관측 분야는 왜 그렇게 당대 세계최고 수준이 되었을까요. 그 답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케플러 초신성’으로 일컬어지는 1604년 객성의 출현 때 보인 선조 임금의 반응입니다.
“객성(客星)이 여러 달 미수(尾宿) 분야에 나타났다. 이 분야는 바로 우리나라에 해당되는 분야이다…객성은 바로 적성(賊星·도둑별)이다. 다른 재변도 연이어 나타나는 데….”
선조의 언급 중 ‘미수 분야가 우리나라(조선)에 해당된다’는게 무슨 뜻일까요. 동양에서는 하늘과 땅이 서로 연결돼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전국의 땅을 나눠서 각각의 별자리에 속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분야(分野)’라 합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십시요. 동양에서는 특정 별자리에서 이변이 일어나면 그 별자리에 해당되는 지역에서도 심상찮은 변고가 발생한다고 믿었습니다.
선조는 “객성이 출현한 별자리(미수)에 해당되는 땅이 바로 ‘조선’”이라며 땅이 꺼져라 걱정하고 있는겁니다.
케플러에게 과학적인 탐구 대상이었던 1604년의 ‘초신성’이, 조선에서는 ‘하늘이 임금에게 내리는 경고 메시지’로 해석된 겁니다. 비단 선조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유독 천문학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왜일까요. 왕조시대 임금들은 하늘이 내리는 상서로움과 재앙, 길흉의 조짐을 잘 파악하는 것을 제1덕목으로 삼았습니다.
임금은 하늘과 땅의 중간자 입장에서 농사를 제때 지어야 하는 백성들에게 하늘의 변화를 알려줘야 했습니다.
상형문자인 임금 왕(王)자를 보십시요.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를 소통시키는 형상이죠.
그런데 하늘에서 객성과 같은 이변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불길한 징조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책임은 임금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럴 때 임금은 위로는 몸과 마음을 삼가고 반성해서 하늘의 징계를 두려워 해야 했고(공구수성·恐懼修省), 신하들에게는 “나의 잘못을 기탄없이 지적하라”고 ‘구언(求言)’해야 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1770년(영조 46) 봄에 객성이 출현하자 영조는 월대에 올라 사흘 밤낮으로 간절히 외쳤습니다.
“제발 객성아.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옮기지 마라.”
<영조실록>은 “임금이 사흘간 간절한 마음으로 빌자 객성이 사라졌다”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왕조 시대 임금이 천문학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천문 관측은 정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일·월식, 햇무리와 달무리, 지진, 혜성, 신성 등의 출현은 ‘비상현상’으로 분류했습니다. 이때는 출현시각, 모양과 정도, 위치, 변화 등을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기록한 보고서(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를 4부 작성해서 올렸습니다.
보고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천문관은 <관상감일기>와 <천변등록(天變謄錄)>에 자세한 사항을 기록하여 원부로 보관했습니다. 2중3중의 지독한 기록과 보관이었습니다. 그 철저한 기록의 개가가 결과물로 나타납니다.
■조선에서 관측한 핼리 혜성의 모습
여러분은 에드먼드 핼리(1676~1742)라는 천문학자 아시죠.
핼리는 약 76.03년의 주기로 타원형 궤도를 그리며 지구 주변을 도는 혜성을 발견한 인물인데요.
핼리는 1456~1531~1607~1682년에 약 76년 주기로 나타난 혜성의 궤도가 거의 일치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혜성이 1682년의 76~77년 후인 1758~1759년 사이에 돌아올 것이라고 예측했어요.
물론 당대 사람들은 “무슨 헛소리냐”고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1742년 죽은 핼리 자신도 확인하지 못했구요. 그런데 1759년 핼리가 예언한 그 혜성이 정말로 나타나는데요. 사람들은 그 혜성에 ‘핼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해, 즉 1759년 3월 11일자 ‘성변측후단자’를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3월 11일 신묘 밤 5경(~5시) 파루 이후에 혜성이 허수(虛宿) 별자리 영역에 보였다. 혜성이 이유(離瑜) 별자리 위에 있었는데 북극에서의 각거리는 116도였다.’
이날의 성변측후단자는 핼리 혜성의 모습을 스케치한 뒤 “혜성의 꼬리가 1척5촌을 넘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날의 관측자 5명의 실명을 기록했는데요. ‘성변측후단자’를 모은 1759년 음력 3~4월의 <성변등록>은 35명의 천문관이 25일 동안 관측한 것인데요. 위치와 크기, 색깔 등의 변화를 기록했습니다.
양홍진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천문학자 핼리가 주기를 예측한 이후 첫번째로 지구를 방문한 혜성을 스케치까지 해서 기록으로 남긴 것은 조선이 유일하다”고 평가했는데요. 조선 천문관의 관측실력과 지독한 기록의식이 이뤄낸 개가라 할 수 있습니다. <성변등록>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에 차고넘치는 이유라 합니다.
그러고보면 세계 7번째로 한국형 발사체를 우주궤도에 안착시킨 일은 만시지탄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이제 담헌 홍대용의 바람처럼 좁디좁은 지구를 벗어난 이상 이제는 무한한 우주에서 꿈을 펼치는 미래만 남았군요.(이 기사를 쓰는데 양홍진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박명구·박창범·양홍진, ‘한국 고천문 초신성 기록 연구’, 2006년 기관고유사업 위탁연구과제 보고서, 한국천문연구원, 2007
양홍진·박명구·조세형·박창범, ‘Korean nova Records in A.D. 1073 and A.D. 1074:R Aquarii, <Astronomy&Astrophysics> Vol. 435, 2005년 5월호
양홍진, ‘성변측후단자 UNESCO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준비하며’, 한국천문학회 춘계 학술대회, 2022
기상청, <관상감이 기록한 17세기 밤하늘>(한국 기상기록집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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