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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평양의 미인기생 차릉파는 왜 신라금관을 썼을까…1935년 '금관 기생 사건'의 전모

역사는 History, 히스토리는 이야기죠.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가는 ‘이기환의 Hi-story’입니다. 이번 주는 ‘신라 금관을 쓴 평양기생’입니다. 참 기막힌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주부터 경주 서봉총을 재발굴(2016~2017)한 성과를 담은 테마전시회(2021년 2월28일까지)를 열고 있는데요. 제목이 ‘영원불멸의 성찬’입니다.

‘무엄하고 무례한 이 난거-기녀의 머리에 국보 금관을 씌우다니’라는 제목으로 고이즈미의 폭거를 고발한 조선일보 1936년 6월23일자

서봉총은 남분과 북분이 맞닿은 표주박 형태의 쌍분이고, 1500년 전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되는데요. 일제강점기인 1926년(북분)과 29년(남분) 발굴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발굴해놓고 출토품들을 정리하지도, 발굴보고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고고학의 기본도 지키지 않은 거죠.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이 90년 만에 서봉총을 재발굴하고, 발굴보고서를 간행한 뒤에 테마전시회까지 여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 재발굴 결과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는데요. 바로 두 개의 무덤 중 남분의 둘레돌의 큰항아리 안에서 제사음식의 흔적이 발견된 겁니다. 

서봉총 금관을 쓴 기생 차릉파. 평양의 이름난 미인 기생이었다고 한다.

큰 항아리 안에서 돌고래와 복어, 민어, 남생이, 성게 등 7500여 점의 동물유체가 확인되었는데요. 즉 신라인들이 그렇게 고급 어종을 요리해서 호화로운 식생활을 즐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거죠. 

이와같은 재발굴 성과는 박물관 가셔 보시고요. 저는 이번 주 방송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서봉총을 둘러싼 기가 막힌 일화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서봉총은 1926년 북분, 29년 남분이 차례로 발굴됐는데요. 특히 북분에서 금관총(1921년)·금령총(1924년)에 이어 세번째로 금관이 발굴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1926년 서봉총 북분 발굴에는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1882~1973·재위 1950~1973) 국왕이 황태자 시절 발굴에 참여한 것으로도 화제를 뿌렸습니다. 구스타프 국왕은 고고학자로도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는데요. 마침 서봉총에서 금관이 노출되기 시작할 때 일본을 방문 중이었습니다. 

이때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경주 발굴에 관여한 자는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라는 인물이었습니다.

학자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났다는 평을 듣는 자입니다. 바로 고이즈미가 바로 황태자가 발굴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도록 잔머리를 굴립니다. 즉 노출된 금관을 꺼내지 않고 그대로 두어 구스타프 황태자가 마지막 발굴의 방점을 찍도록 한 겁니다. 한마디로 밥상을 차려준 거죠. 

그리스와 로마의 발굴현장을 누볐던 스웨덴 황태자로서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죠. 10월10일 10시 경주 현장에 도착한 구스타프 황태자는 “마-베라스!!(와! 경이롭다!!)”를 연발하며 흙속에 묻혀 살짝 노출된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손수 발굴했습니다. 출토된 금관에는 특이하게 봉황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평양기생 차릉파에게 금관을 씌운 고이즈미(사진 왼쪽 원안). 1926년 서봉총 발굴 당시 고이즈미는 서봉총 발굴의 실무책임자로 마침 일본을 방문중이던 구스타프 스웨덴 황태자를 초청해서 발굴에 참여하는 이벤트를 기획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래서 이 고분에 스웨덴의 한문 명칭인 ‘서전(瑞典)’의 ‘서(瑞)’와 봉황의 ‘봉(鳳)’을 따서 ‘서봉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답니다.

문제는 일제가 스웨덴 황태자에게 경주 발굴의 인심을 쓴 것도 모자라 고려청자와 금귀고리 한 쌍까지 선뜻 선물했다는 겁니다. 남의 땅에서 출토된 국보급 유물을 선심 쓰듯 내줬다니 참 기막힌 일이었죠.

그런데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발굴 후 10년이 지난 1936년 6월 조선일보(23일자)와 부산일보(29일자) 등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기사가 실립니다. 

서봉총 금관. 봉황장식이 붙어있고,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했다고 해서 스웨덴의 한자 명칭(서전· 瑞典)의 ‘서(瑞)’자와 봉황 ‘봉(鳳)’자를 써서 서봉총이란 이름이 붙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금제의 비장품이 모독되기까지의 경로’(조선일보)와 ‘금관의 파문(波紋), 박물관의 추태(실태·失態)? 국보를 기생의 장난감(玩弄物)으로’(부산일보)라는 제목의 평양발 기사였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건은 기사가 나간지 약 9개월 전인 1935년 9월에 터집니다. 평양박물관은 제1회 고적애호일을 기념하는 특별전을 열면서 조선총독부 경성 박물관로부터 대여받은 서봉총 출토 금제유물들을 전시했습니다. 

금관은 물론 금제귀고리와 허리띠, 목걸이까지 총출동한거죠. 그런데 당시 평양박물관장이 바로 경주에서 서봉총 발굴을 주도한 고이즈미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일보 보도를 보면 기가 찹니다. 

고이즈미는 금제유물들을 전시하기 4~5일 전에 평양 시내 일본인이 운영하는 요정에 동경(도쿄)에서 온 자기 친구를 초대한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것입니다.

각 신문에 실린 '금관기생' 관련 기사. 당시 엄청난 물의를 빚었다.

“내가 발굴한 금관을 평양에 가져왔는데 이것을 여자에게 씌우고 사진을 찍어 나중에 발행되는 책에 넣으려고 한다”면서 그 자리에 합석한 기생 4~5명에게 “너희 중에 모델을 뽑으려 한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낙점된 여성이 바로 평양에서 이름난 미인이라는 차릉파라는 기생이었습니다. 기생 차릉파는 다음날 박물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차릉파는 고이즈미를 비롯한 1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30분 넘게 금제 허리띠와 금목걸이, 금귀고리를 두릅니다. 

마지막에는 금관까지 머리에 올려놓은 뒤 박물관 카메라로 사진을 찍게 됩니다. 셔터를 누른 자가 바로 고이즈미였습니다. 

이효석의 일본어 소설 ‘은은한 빛’. 금관기생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이효석 문학관

차릉파의 배경에는 평양 시내의 실제 경관을 담은 그림인 ‘기성도’가 있었습니다.

신문은 “이로써 천수백년전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게 가신 그 님의 금관은 일개 천비(기생)의 머리 위에 올라 그 자취를 다시 천세에 남기는 운명을 지게 됐다”고 개탄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자들은 차릉파에게 “왕후 공주가 되었으니 지금 죽어도 한이 없겠다”느니 “옛 사람의 것을 쓰고 사진을 찍으면 백이면 백 불길하다”느니 하며 웃었다고 합니다. 

고이즈미는 한술 더 떠서 “이 왕관은 경주의 기생집 근방에서 발굴됐는데, 지금도 기생이 쓰고 사진을 찍으니 왕관과 기생과는 어떤 인연이 있나보다”라고 했답니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26년 서봉총 북분에서 노출된 금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500년 전 찬란한 금관을 쓰고 안장된 신라 왕족 귀족 여인을 일개 기생하고 연결지어 한껏 모독한 것입니다. 고이즈미는 그래도 구석이 있었는지 차릉파에게 “세상의 오해가 있을 터이니 그 사진을 박았다는 말은 하지 마라”고 신신당부했답니다. 

그러나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금관 쓴 기생’ 사진이 평양 시내에 유포되기 사작했고, 결국 9개월 만에 신문에 보도된 겁니다. 아마 요즘 같았으면 양식있는 누군가가 사진 혹은 동영상으로 찍어 SNS로 삽시간에 퍼뜨렸겠죠. 어쨌든 이 사건은 식민지 백성의 공분(公憤)을 샀습니다.

조선일보는 “왕관을 어떻게 일개 기생의 머리 위에 올려놓는 경거망동을 벌일 수 있느냐. 평양시대 지식인층의 분노를 사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사건은 1940년 4월 발표한 이효석의 일본어 소설 <은은한 빛(ほのかな ひかり)>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하룻밤의 은밀한 놀음이 드러나자…국보의 존엄을 모독했다는…비난의 소리가 높아 신문기자가…기생 집에 숨어들어가 문제의 사진을 훔쳐내어 사회면에 폭로했다…”

차릉파라는 기생은 어떻게 됐을까요. 졸지에 ‘금관을 쓴’ 이력 때문에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 것 같습니다. 

금관기생 차릉파가 가짜승려에게 사기를 당해 경찰에 신고했다는 1936년 7월18일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기사

‘금관’ 사건이 벌어진 뒤 20여 일이 지난 1936년 7월19일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등에 ‘금관기생 차릉파’ 혹은 ‘모 사건으로 세간의 화제에 오른 평양 기생’이 가짜 승려의 협박과 갈취에 돈을 계속 뜯겼다는 기사가 보도됩니다. ‘금관’ 사건 이후 유명해진 차릉파의 집으로 온갖 사기꾼들이 몰려들었든 겁니다. 견디다못한 차릉파가 경찰에 신고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차릉파는 이후에 서울로 진출했던 것 같습니다. 1940년 8월에 나온 <모던 일본> 조선판에 바로  ‘동릉파’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잡지는 서울 기생들의 자산순위를 발표했는데요. 일본의 문예평론가 가와무라 미나토(川村溱)의 단행본(<말하는 꽃, 기생>, 유재순 옮김, 소담출판사, 2002년)은 <모던 일본>에 등장하는 ‘동릉파(東凌波)’가 ‘차릉파’라고 설명합니다. 

서봉총 남분의 둘레돌 항아리에서 확인된  동물유체를 토대로 구성한 1500년전 신라 왕실의 제사음식. 돌고래와 남생이, 복어, 서해안에서 잡히는 민어까지 올렸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모던 일본>은 경성 기생들의 재산 순위를 설명하면서 ‘동서 72명의 기생 재산순위에서 ‘동릉파, 즉 ‘차릉파’의 재산이 공동 2위(18만엔)이라 합니다. 차릉파가 강산월이라는 기생과 함께 공동 2위에 올랐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재산은 각각 18만엔이었다는데요. 당시 기생집을 10년 운영한다 해도 고작 평균 3~4만엔을 모았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모던 일본>에 등장하는 차릉파가 평양에서 활약한 기생 차릉파가 맞다면 어찌된 걸까요. 서울로 진출한 차릉파는 평양에서 얻은 ‘금관기생’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전국구 스타가 되어 ‘기생재벌’의 반열에 올랐다는 이야기죠. 그렇다면 ‘기생왕관 사건’의 주범인 고이즈미는 총독부로부터 견책을 받았을 뿐 평양박물관장직을 거뜬히 유지했습니다. 쓴웃음이 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테마전에서 금방 발굴한 1500년전 신라인의 따끈따끈한 제사음식과 함께 전시된답니다. 오늘 방송내용 처럼 서봉총 관련 이야기들도 테마전에서 소개된다니까요. 한번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