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것도 아니고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아낸 보물이 있다.
놀라지마라.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국립중앙박물관에는 41만점에 달하는 유물이 있다. 물론 절대다수는 잘 관리되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한국전쟁 등 워낙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어온 나라가 아닌가. 즉 일본인이 발굴·소장하던 유물을 인수받았고, 한국전쟁 때 유물이 이곳저곳으로 피란한 이력까지 있으니 체계적인 관리가 어려웠다.
■김정호는 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을까
수장고에서 발굴한 대동여지도의 경우를 보자.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호의 역작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의 서문에 해당되는 ‘지도유설’에서 춘추전국시대 손자의 글을 인용해서 지도의 제작목적을 밝혔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국방상의 요충지를 알아야 하고, 재물과 세금이 나오는 곳과 군사를 모을 수 있는 원천을 잘 알아야 하며, 여행과 왕래를 위해 지리를 잘 알아아 한다.”
김정호는 “지도란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적을 막고, 사나운 무리를 제거하며 평화로울 때는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대동여지도 완성을 도와준 사람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혼자 북치고 장구쳐서 만든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은 안팎으로 급급해졌다. 내부정세는 혼란스러웠고, 외세는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영국에 속절없이 무너지자 뜻있는 조선의 지식인과 관료들은 나라 걱정에 우려의 한숨을 쉬었다.
이때 고종 시대의 고위관료인 신헌(1810~1884)은 김정호의 지도제작을 적극 후원했다. 즉 신헌은 비변사나 규장각, 그리고 민간에 소장된 지도와 도서를 수집해서 김정호에게 제공했다.
<청구도>의 서문을 써준 실학자 최한기(1803~1877)와 최성환(1813~1891) 등도 김정호를 적극 후원했다. 김정호는 자신이 직접 측량작업을 펼친 것이 아니었다. 지도와 지리지에 실려있는 각종 측량자료들을 일일이 비교하고 종합해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
■“김정호 선생을 서양의 첩자로 몬 어리석은 조선인들…”
그런데 언젠가부터 김정호가 팔도강산을 3번이나 돌아다녔고, 백두산도 7~8번이나 오른 뒤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것은 1925년 10월 8~9일 동아일보 1면에 연속으로 실린 논설에서 처음 나온 뒤 확대재생산됐다.
최남선의 글로 짐작되는 이 논설은 “김정호 선생은 ‘팔역의 강산’(팔도강산)을 샅샅이 답사했고, 이를 위해 백두산만 7번이나 올라갔다”고 극찬하면서 ‘그런 김정호 선생이 무엇을 한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몽매한 조선의 상황’을 개탄한다.
“대동여지도를 위해 십수년동안 과객노릇을 하여… 가장 정명(精明)하고 적확한 지도를 만든 이지만…이런 국보적인 인물이…화액(禍厄)을 당했다. …김정호 선생의 공적이 충일했건만 임자인 조선과 조선인은 몰라주고 깨닫지 못했다.”
필자의 개탄이 하늘을 찌른다.
“파천황의 대업(대동여지도 완성)을 아름답게 완성한 학계의 위인(김정호)에게 조선과 조선인은 무엇으로 보답해주었는가. 재주는 있는데 과거공부는 하지 않은 어리석은 놈이라든가, 가족의 생계를 내팽개치고 쓸데없는 일에 골몰한 미친 놈이라든가, 뭐 이렇게 욕하고 (심지어는) ‘저 재주가 아무래도 서양인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혐의까지 뒤집어씌웠다.”
김정호가 서양 간첩의 누명을 뒤집어 쓴채 횡액을 당했다는 것이다.
“‘필시 (김정호라는 작자는) 국가의 험요(요새)를 외국인에게 알릴 장본인’이라는 죄안(범죄 사실을 적은 기록)을 앞세워 필생의 과업으로 완성한 대동여지도는 ‘몰이해한 관헌’에게 그 목판을 몰수당하고…작자인 김정호는 인간에게 가장 참혹한(最慘) 운명으로써… 지금 (조선의) 도처에 있는 ‘골고다’는 그 독한 어금니로 또한번 이 의인을 씹어버렸다.”
골고다가 어디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다.
요컨대 당대 조선과 조선인이 고산자 김정호의 위대한 업적인 대동여지도를 몰라보고 욕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외국이 파견한 간첩이라고까지 의심하고 결국 대동여지도 목판을 압수하고 김정호까지 최참(最慘), 즉 ‘가장 참혹한 운명’인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이 논설은 이후 호사가들의 상상력까지 덧붙여 눈덩이처럼 확대재생산됐다.
동아일보 논설에서는 “김정호가 백두산을 7번 올랐다”고 했지만 최남선의 <별건곤> 1928년 5월호 글에서는 “4번인지, 5번인지 올랐다고 하더라”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김정호를 죽인 조선은 일제의 지배를 받아도 싸다’
김정호 이야기를 ‘매조지’한 것은 결국 조선총독부였다.
총독부가 1934년 펴낸 <조선어독본>의 ‘김정호 전기’에는 더욱 비극적인 내용이 실려있었다.
김정호가 백두산을 8번이나 오르내렸고, 전국 방방곡곡을 세차례나 돌며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는데 조선의 무지몽매한 지도자인 대원군(1820~1898)이 국가기밀누설죄로 김정호와 그 딸을 죽이고 대동여지도와 대동여지도 목판도 모두 불태워버렸다는 것이었다.
최남선이 제기한 근거없는 뉴스가 어느덧 그럴듯한 가짜뉴스로 포장된 것이다.
일제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조선은 김정호 같은 뛰어난 인물에게 누명을 씌워 죽일만큼 우매한 나라이므로 문명국인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60년 가까이 싱명력 발휘한 가짜뉴스
이 새빨간 가짜뉴스는 1993년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국어 읽기 교과서에까지 등장했다.
“아! 슬프다. 억울한 죄명으로 죽임을 당했다. 나라를 다스리던 완고한 사람들이 지도를 보고 나라의 사정을 남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김정호의 피땀이 서린 지도의 목판까지 압수하여 불살랐으니 정말 안타깝다.”
가짜 뉴스의 폐해가 이토록 지독하다. 장장 60년 가까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공리처럼 취급됐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이 대동여지도 목판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가만 돌이켜보면 최남선의 동아일보 추정글에 “대동여지도의 판목이 압수되었다”는 내용을 언급했지만 “소각됐다”는 표현은 없다. 사실 대동여지도는 1923년부터 조선총독부 박물관 소장품이었다.
해방 이후 ‘본관품(총독부 박물관 소장품) 9739호’라는 유물번호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되었다. 그러다 한국전쟁 등의 우여곡절을 겪어 부산~경주 등을 전전하다가 1970년대 서울(국립중앙박물관)로 최종 이관됐다. 이때 새로운 유물번호, 즉 ‘K 93호’라는 임시번호(가·假)를 부여받았다. ‘본관품 9739’호라는 유물번호를 잃어버리고 임시번호(K 93호)를 받은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결국 유물번호만 바뀌었을뿐 박물관 수장고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선입견 탓에 가린 진실
하지만 누구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던 목판 11판(앞뒤 22개)이 대동여지도 진품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원군에 의해 불태워진 대동여지도 목판은 존재할 수 없다’고 교육받아온 사람들이 아닌가. 선입견이 눈앞에 멀쩡하게 존재해있던 ‘대동여지도’의 진실을 가린 것이다.
게다가 이 목판의 일각에는 재사용되고 미완성된 흔적도 보였다. 그랬으니 박물관 직원들도 그저 ‘미완성 복각품’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그러다 199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전국의 고지도목록을 작성중이던 한국역사문화지리학회 전문가들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전문가들은 물론 대동여지도 목판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약 3개월간의 조사를 마치고 돌아서던 전문가들에게 당시 소재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가 “저기요!”하면서 운을 뗐다.
“박물관 소장품 중에 흥미로운 목각품이 있는데 진위를 판단해달라”는 것이었다.
소재구 학예사의 이 한마디가 정체불명의 상태로 남아있던 대동여지도의 신원을 되찾아 주었다.
당시 한국역사문화지리학회 소속 전문가였던 이우형·성남해씨 등은 이 목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지몽매한 지도자(대원군)가 불태워버렸다는 바로 그 대동여지도 목판이 틀림없었다.
현전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대동여지도가 다름아닌 박물관 수장고에서 현현한 것이다. 목판은 2008년 보물 제1581호로 지정됐다.
지금도 수장고 안에는 정리되지 않는 유물들이 제법 있다. 출처를 모르거나 중도에 잃어버린 유물만 1만4000여점이 된다. 그중 보물·국보급 유물이 없으리라는 법이 없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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