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 왕건과 남의 희랑대사, 두 분 ‘스승·제자’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고려건국(918년) 1100주년을 맞아 올 12월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특별전을 준비중이다. 국내외에 흩어진 고려유물 300여점의 출품이 확정되었다. 청자사자형 향로를 비롯해 국보 20건, 보물 28건이 등장한다. 고려문화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가 될 것이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이 특히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은 북한 소재 고려문화재의 대여전시이다. 이미 북한측에 대여를 요청할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 유물 17점의 목록을 통일부에 제출했다. 그 중의 ‘고갱이’는 바로 고려의 창업주인 태조 왕건의 동상과, 왕건의 스승으로 알려진 희랑대사 조각상(해인사 소장·보물 제999호)의 동반 전시다.
그렇다면 왕건과 희랑대사는 왜 스승·제자가 되었으며, 두 사람의 동상·조각상은 어떻게 조성됐고, 어떻게 지금까지 전해지게 됐을까.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은 왕건과 희랑대사
후삼국 통일을 꿈꾸던 왕건과 화엄학의 대가로 해인사에서 이름을 떨치던 희랑대사가 만난 것은 920년대 말엽이었다.
바야흐로 신라와, 견훤의 후백제, 궁예→왕건의 태봉→고려 등 후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혼란기였다. 더구나 해인사가 있는 합천(대야성)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후백제와 고려 또한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합천 가야산과 지리산 일대는 1100년 후인 한국전쟁 때도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이라 할만큼 접전을 펼쳤다. 시공을 초월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아닐 수 없다. 해인사도 ‘후백제파’와 ‘고려파’로 나뉘게 되는 불상사를 겪는다.
1075년(문종 29년) 편찬된 균여(923~973)의 전기(<균여전>)에는 중요한 두 인물이 등장한다.
“신라 말기에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 사종(司宗)이 있었다. 관혜공은 후백제의 괴수 견훤의 복전(福田·일종의 스승)이 되었고, 희랑공은 우리 태조 대왕(왕건)의 복전이 되었다. 두 분의…주장이 달라…그 문도도 점차 물과 불이 되었다. 관혜공의 법문을 남악, 희랑공의 법문을 북악이라 했다.”
후백제 견훤을 지지한 관혜와, 고려 왕건을 지지한 희랑이 첨예하게 맞서 대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혜의 행적은 <균여전>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후백제 멸망과 고려 건국의 와중에 ‘패배자’의 너울을 쓴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승군을 보내 왕건을 도운 스승 희랑대사
반면 왕건과 희랑대사의 극적인 만남은 <가야산해인사고적>에 자세히 기록돼있다.
즉 태조 왕건이 합천 미숭산에서 후백제 왕자(월광)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전세는 불리했다. 후백제군의 군세가 마치 귀신처럼 신묘했기 때문이다. 왕건의 힘으로는 버텨내기 힘들었다. 결국 왕건은 해인사로 들어가 주지인 희랑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백제를 물리칠 비책’을 청했다.
“…희랑이…용적대군을 보내 고려군을 도왔다. 후백제 왕자 월광은 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이 공중에 가득찬 것을 보고 두려워 항복했다.…이곳에 국가의 가장 중요한 문서를 보관해서 병사를 진무토록 하고 봄가을로 사천왕법석을 행하며….”(<가야산해인사고적>)
비록 허구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합천에서 고려-후백제 전투가 빈발했던 것을 감안하면 꽤나 의미심장한 기록이다. 희랑이 보냈다는 용적대군은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해인사 소속의 승군일 가능성이 짙다. 결국 왕건의 귀의로 스승이 된 희랑대사가 승군을 보내 후백제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다.
<가야산해인사고적>은 “태조 왕건이 희랑대사를 더욱 공경하여 받들면서 전답 500결을 시납하고 해인사를 중수했다”고 기록했다. <가야산해인사고적>은 이런 내용을 전하면서 “이런 일이 영구히 끊기지 않도록 천복 8년(943년·태조 26년) 10월에 판에 새긴다”고 분명하게 썼다. 곤경에 빠진 태조 왕건으로서는 희랑대사가 구세주였을 것이다. 얼마나 고마웠을까. 그랬으니 ‘영영토록 해인사에 각종 혜택을 준다는 내용이 혹여 중단되지 않을까’ 문서(판)로까지 남긴 것이다.
조선 후기 문신인 유척기(1691~1767)가 해인사를 유람하고 지은 <유가야기(游伽倻記)>는 “고려 왕실이 기유년(949년·고려 광종 즉위년) 5월 희랑대사에게 시호와 교지를 내렸다”고 기록했다. 교지에는 고려 국왕의 관인이 찍혀 있었다. 태조 왕건 뿐 아니라 4대인 광종까지도 희랑대사를 극진하게 모셨음을 알 수 있다.
■‘뜬금없이’ 현현한 태조 왕건동상
1992년 10월, 개성 서북쪽 고려 태조 왕건릉(현릉)의 확장공사를 진행하던 포크레인 삽날에 희한한 유구가 걸렸다.
무덤 내부도 아니고 무덤에서 북쪽으로 약 5m 떨어진 곳을 굴착작업 하다가 우연히 확인된 것이다. 발굴조사가 아니었으므로 현장에 학자들도 없었다. 포크레인 기사는 지하 2m 정도에서 노출된 석판을 별생각없이 파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하공간의 덮개인 석판 안에서 포크레인 삽날에 걸려나온 것은 다름아닌 동상이었다. 포크레인 삽날에 눌린 동상은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 떨어지고, 여러곳이 찌그러졌지만 나머지 부분들은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동상은 힘차고 풍채좋은 장년의 모습이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두 손을 명치 앞에 잡은 상태로 의자에 앉은 자세였다. 앉은 키는 84.7㎝ 내외로 실제 성인의 크기와 가까웠다. 무엇보다 나체상이었다는 것이 강한 인상을 주었다. 동상 표면에 비단조각들과 금도금한 흔적인 청동박편이 붙어있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비단조각은 동상에 입힌 옷의 천이고, 금도금 박편들은 동상이 쓰고 있던 통천관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무덤 내부도 아니고 무덤 밖 땅 속에서 ‘뜬금없이’ 수습된 이 청동상의 실체를 아는 북한학자들은 없었다. 그저 왕건이 서거한 후 묻은 부장품 중의 하나인 청동불상으로 여겼다. 이 동상은 2005년 무렵까지도 개성 고려역사박물관에 ‘청동불상’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왕건상 추적자
물론 북한학자들 가운데 1997~98년 이후 이 동상을 청동불상이 아닌 ‘왕건상’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학문적인 근거를 제대로 댄 연구논문은 없었다. 그저 이 동상은 현릉을 조성할 때 파묻은 부장품이고, 그후 언젠가 능의 봉분 북쪽에 내어 묻은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 동상 발굴 이전부터 왕건상의 존재를 추적하던 남한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노명호 전 서울대교수(국사학과)였다. 1983년부터 고려왕실 인물들의 고향을 연구하기 시작한 노 교수의 눈길을 사로잡는 심상치않은 기록들이 있었다.
즉 “고려 태조 왕건의 조각상을 태조의 능인 개성 현릉 어딘가에 묻었다”(<세종실록>) “태조 왕건의 조각상과 혜종(2대)의 소상을 개성으로 운반했다”(<금성일기>)는 내용들이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현릉 부근에 반드시 왕건상이 존재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개성은 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었다.
그러던 1997년 10월 노명호 교수를 깜짝 놀라게 한 기사가 국내신문에 실렸다. 일본 규슈(九州)산업대 기쿠다케 준이치(菊竹純一) 교수가 왕건릉에서 수습한 동상의 존재를 사진과 함께 소개한 것이다. 노교수는 무릎을 쳤다.
노교수는 일단 보도사진과 각종 문헌자료를 토대로 논문(‘고려 태조 왕건 동상의 유전’)을 써서 발표했다. 급기야 노교수는 2005년 개성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 남북공동학술토론회에 참석해서 이 논문을 북한학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또 현릉을 답사하고 동상을 실측조사하는 기회를 얻었다. 남북 학자들의 검토결과 왕건의 동상인 것으로 확인됐다.
■왕건은 왜 나체로 현현했을까
그런데 왕건상을 보면 곤혹스러운 점이 여럿 보인다.
우선 나체상이라는 점에 눈에 띈다. 왜 고려의 창업주이자 지존으로 추앙되었을 태조 왕건을 벌거벗은 몸, 즉 나체상으로 조각했을까. <고려사> 등의 기록과 발굴상태를 종합해보면 어느 정도 의문이 풀린다.
일단 “1065년(헌종 원년) (태조 왕건의 원찰인) 봉은사 진전(조각상을 모신 전각)의 어탑(御榻·의자)이 스스로 움직였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왕건상이 의자에 앉은 모습이었음을 암시해준다.
“또 1203년(신종 6년) 9월 최충헌이 봉은사에 가서 태조 어전에 제사하고 겉옷과 내의를 바쳤다”(<고려사>)는 기록이 있다. 나체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이 아니라 옷을 입히는 이른바 ‘착의형 나체상’이라는 것이다.
1992년 출토 당시 표면에 붙어있던 비단 조각들이나, 금박편, 옥띠장식 등은 왕건 동상이 매장될 때도 옷을 입고 금도금관을 썼으며, 허리에는 옥띠를 두른 상태였음을 일러준다.
■오그라든 남근은 무슨 뜻일까
또하나 보는 이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남근의 묘사’이다.
체격은 성인 남성과 같은데 남근의 크기는 2㎝에 불과하고, 그 또한 가로로 주름을 새긴 오므라든 형상이다. 고려인들이 숭앙하는 개국시조를 표현한 것치고는 너무 외람되지 않은가. 여기서 노명호 교수는 “이 왕건상에 불가에서 말하는 ‘32대인상(三十二大人相)’을 반영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32대인상’은 부처가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특징을 일컫는다. 특히 고대 인도의 진화에 등장하는 전륜성왕의 신체특징을 불교가 채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32가지 특징 가운데 ‘마음장상(馬陰藏相)’이 있는데, 이것은 말(馬)의 남근(陰)처럼 오그라들어 몸 안에 숨은(藏) 형상(相)을 뜻한다. 전생에 자신의 몸을 삼가 색욕을 멀리함으로써 성취한다는 것이다. 7세기의 불서인 <법원주림>은 “마음장상은 대단히 켜질 수도 있지만 작을 때는 8살 동자의 것과 같다”고 했다.
■사람반 불상반인 이유는
비단 ‘오므라든 남근’ 표현 뿐이 아니다. 왕건상의 얼굴이나 몸은 ‘사람 반 불상 반’의 모습이다.
‘터럭 하나 잘못 그리면 그 사람이 아니’라는 원칙아래 그려온 고려·조선 시대의 초상화를 생각한다면 저으기 당황스럽다. 하지만 태조 왕건의 경우 어진(임금 초상화)는 실제 모습 그대로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동상만큼은 실제 모습에 ‘32대인상’의 요소를 가미했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언급했지만 ‘32대인상’은 출가자인 부처와 재가자인 전륜성왕의 신체적 특징을 종합한 상(相)이다. 전륜성왕은 진리의 수레를 굴리면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세계를 평정한다는 이상적인 제왕이다.
인도 전역을 통일한 아쇼카왕과, 이를 본받고자 한 후대의 중국 양무제, 진무제, 수문제 등 전륜성왕을 자처한 통치자들은 모두 통일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이야말로 당연히 ‘전륜성왕’을 자처했을 것이다. 왕건의 동상에 32대인상의 요소가 한껏 가미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왜 무덤 밖에서 나왔을까
그렇다면 왕건 동상은 왜 현릉의 무덤방에서 5m 떨어진 곳에 묻혀 있었을까.
951년(광종 2년) 태조 왕건의 원찰인 개경 봉은사에 어진(초상화)와 함께 봉안된 동상은 후대 왕들에 의해 극진히 모셔졌다. 몽골과 합단(哈丹·원나라의 반란세력)의 침공 때도 왕건 동상은 강화도에 피란했다가 돌아왔다. 태조 왕건의 동상은 그야말로 고려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조선개국과 함께 태조 이성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조(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을 연천 마전군으로 옮기라”(<태조실록> 1392년 8월8일)는 것이었다.
해동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한발 더 나간다. 이 왕건 동상을 잠시 문의현(청주)로 옮겼다가 1428년(세종 10년) 개성의 왕건릉, 즉 ‘현릉 옆’에 묻기로 했다.
“…충청도 문의현(청주)에 있던 태조 진영 및 동상…등을 개성의 각 릉의 옆에 묻는다”(<세종실록> 1428년 8월1일)의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있다. 왕건 동상이 왜 현릉의 5m 북쪽 지하에서 매장된 채 발견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천재 최치원이 인정한 천재 희랑대사
신라의 대문장가인 최치원(857~?)은 희랑대사를 위한 시를 6수나 남기면서 ‘문수보살’ 혹은 ‘천재’라 일컬었다.
“필추(희랑)가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강경하니 잡화(화엄경)가 삼절(성황)을 이루리라… 오늘 아침 부상(동쪽바다)에서 떠오른 지혜의 해 문수(보살)가 동묘(해인사)에 강림한 것을 알겠도다…. 멋지도다 해인의 뜻 해우(신라)에서 밝힘이여…천의는 단지 천재(희랑대사)에게 맡기려 할 뿐이라오.”(<고운집>)
신라가 넣은 최고의 천재라는 최치원이 인정한 ‘천재 스님’이었던 것이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것일까.
지금도 나말여초의 천재 스님이자 왕건의 스승이기도 한 희랑대사의 얼굴상이 다름아닌 해인사에 남아있다.
■살아있는 듯 1100년 전의 모습인 희랑대사상
보물 제999호로 지정된 ‘건칠 희랑대사 좌상’이다.
원래 목조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8년 X-레이 촬영 결과 뒷면은 목조지만, 정면은 건칠로 이뤄졌음을 확인했다. 건칠은 목재인 목심을 뼈대로 삼지 않고 모시나 삼베와 같은 헝겊을 여러 겹 바르고 칠을 거듭해서 형태를 만드는 기법이다. 건칠기법은 힘줄이나 뼈마디까지 아주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 희랑대사 조각상도 원래는 몸 전체를 건칠기법으로 제작했다가 어느 시기에 뒷면에 크게 파손되어 목재를 잇대어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희랑대사 조각상은 높이 82.2㎝, 무릎너비 60.7㎝의 등신상이다. 극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화엄종의 진리를 무언의 형상으로 설법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 초상 조각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마른 몸에 결과부좌 다리 위로 양손을 포개 단정히 앉아 정면을 응시한다. 툭 튀어나온 울대뼈와 쇄골, 손의 힘줄과 손가락 뼈마디…. 건칠 기법의 장점을 제대로 살렸다. 긴 얼굴에 뾰족한 턱, 큰 귀…. 그리고 세가닥 깊은 이미 주름과, 미간 및 눈가의 자연스러운 주름이 조화를 이룬다. 또 코 양 옆에서 입가로 내려오는 팔자주름은 희랑대사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튀어나온 광대는 살짝 올라가 있고, 높은 미간에서 이어지는 크고 오똑한 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얇은 입술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다. 영락없이 인자한 노스님의 인상이다.
■앞가슴이 심상치않은 희랑대사상
왕건상의 ‘남근’처럼, 희랑대사상의 ‘앞가슴’이 또 심상치않다.
희랑대사상의 가슴에 나있는 작은 구멍(지름 1.6㎝, 깊이 약 8㎝)이 그것이다.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1782년 해인사 기행문(‘가야산기’)에 희랑대사의 가슴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표현해놓았다.
“희랑선사의 상은 얼굴과 손을 까맣게 칠했고 힘줄과 뼈가 울퉁불퉁 나왔다. 옷섶을 헤쳐 가슴을 드러냈는데 양쪽 유방 사이에 앵두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다. 아마도 생전에 중완(中脘·배꼽의 위에 있는 혈자리)에다 쑥뜸한 흉터를 형상한 것이거나, 조각한 지가 오래되어 썩고 좀먹어 구멍이 생긴 것일 게다.”
이덕무는 그러면서 “세상에서는 희랑대사를 흉혈국인(중국 남쪽 지방의 나라)이라 했다”고 전했다. 가슴의 구멍은 ‘흉혈국 사람들이 화엄삼매(마음의 고요한 경지) 때 빛을 발한 자취’라는 것이다. 혹은 해인사에 모기가 들끓어 스님들이 수행하기 힘들어하자 희랑대사가 스스로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했다는 구전도 전해진다.
그런데 ‘가슴 구멍’과 관련해서는 서역 구자국 출신의 승려인 불도징(232~348)의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전해진다.
“불도징은 왼쪽 젖가슴 옆에 작은 구멍이 하나 있다. 굵기는 12~15㎝ 가량 되는데, 뱃속까지 뚫려 있어서 이따끔 내장이 그 곳에서 나오기도 한다. 밤에 독서할 때 막아두었던 솜을 빼면 온 방안이 환히 밝아진다.”(<고승전>)
■뽀샵이나 보정없는 얼굴
조각상은 희랑대사의 생전 얼굴을 그대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뜯어봐도 뽀삽이나 보정의 흔적은 없다.
‘사람 반 불상 반’의 얼굴과 몸이 특징인 제자 왕건상과, 생전의 모습 그대로인 스승 희랑대사상을 한 곳에서 나란히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북한의 왕건상은 지난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전에 다른 북한의 국보급 유물 90여점과 함께 출품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스승(희랑대사)·제자(왕건)의 만남은 기획되지 않았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고려 건국 1100년을 맞아 태조 왕건상과,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일조한 희랑대사의 만남은 한창 순풍이 불고 있는 남북교류의 상징 장면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노명호, <고려태조 왕건의 동상>, 지식산업사, 2011
‘고려태조 왕건 동상의 유전과 문화적 배경’. <한국사론> 50권, 서울대, 2004
‘고려 태조 왕건 동상의 황제관복과 조형상징’, <북녘의 문화유산-2006년 특별전>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06
정소라,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16
문명대, ‘해인사 목조희랑조사진영(초상조각)상의 고찰, <미술사학연구>, 미술사학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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