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절도는 공소시효가 없다.’ 25년 전인 1994년 도난 당한 보물 ‘만국전도’(제1008호)와, 11년 전인 2008년 사라진 전(傳)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 목판 및 후적벽부 목판 등이 마침내 회수됐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공조수사를 통해 1994년 9월 서울 동대문 휘경동에서 도난당한 ‘만국전도’ 1점과 함양 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류 필사본 116책을 회수했다고 29일 밝혔다. 함양 박씨 문중 유물 가운데는 ‘만국전도’를 포함해서 7종 46점이 보물(제10078호)로 일괄지정되어 있다. 경찰은 이 함양 박씨 문중의 전적류를 은닉한 혐의로 ㄱ씨를 검거했다.
전남 담양 몽한각에서 도난당했다가 112년만에 회수된 ‘숭례문’ 목판, 현재 숭례문에 걸린 현판 글씨인데, 양녕대군 글씨로 알려져 왔다.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사범 단속반과 경찰은 또 2008년 9월 전남 담양 몽한각(시도유형문화재 제54호)에서 사라진 전(傳)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 목판’ 2점과 ‘후적벽부 목판’ 4점 등 중요 문화재 123점을 11년만에 찾아냈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이 문화재가 장물인줄 알고도 취득해 은닉한 ㄴ씨를 붙잡았다. ㄱ씨와 ㄴ씨는 불구속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이중 ㄱ씨는 ‘만국전도’ 등 밀양 박씨 문중의 문화재가 국가지정문화재(보물)인 것을 알고도 확보한 뒤 자신의 아내가 운영하던 식당내부 벽지에 은닉했다. 그러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느끼게 되자 개인경매업자를 통해 유물을 처분하려다가 덜미가 잡혔다.
한상진 문화재청 문화재사범단속반장은 “접어둔 상태로 장기간 보관해놓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보존상태가 나쁘지 않다”면서 “훼손된 부분은 복원했다”고 전했다.
‘숭례문 목판’과 ‘후적벽부 목판’ 등의 경우도 문화재사범 ㄴ씨가 문화재절도범 공소시효(10년)가 끝나기를 기다려 경매업자를 통해 처분·유통하려다가 붙잡혔다.
숭례문에 걸린 현판. 양녕대군의 친필이라는 설과 아니라는 설이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문화재 공소시효는 없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문화재 사범의 공소시효는 10년이다. 그러나 이는 문화재 절도나 도굴범에 해당되는 공소시효이다. 2002년부터 훔치거나 도굴한 문화재를 은닉하고 있는 자도 처벌을 받았다.
그러자 “도난 및 도굴 문화재인 줄 모르고 구입했다”는 변명들이 나왔다. 법의 허점을 노린 주장이었다. 이에따라 2007년부터 ‘선의취득 배제 조항’이 신설됐다. 즉 “도난 및 도굴 문화재인줄 모르고 구입했다”는 선의취득의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문화재의 도난신고를 받으면 반드시 도난됐다는 공고를 내야한다. 그런데 이 도난공고를 확인하지 않고 문화재를 사들이면 선의취득에 해당되지 않는다. 불법이다. 결국 문화재 은닉과 거래의 공소시효는 사실상 없는 것이다.
‘만국전도’ 등 밀양 박씨 유물과 ‘숭례문 목판’ 및 ‘후적벽부 목판’ 등도 도난신고가 된 문화재이기 때문에 은닉할 수도, 거래할 수도 없다.
이번에 적발된 문화재 사범들은 “죽은 사람이 훔친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수법으로 수사를 난항에 빠뜨리기도 했다. 예컨대 숭례문 목판 등 문화재사범의 경우 죽은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바람에 동명의 고인 수백명을 수사선상에 올려놓고 확인하는 작업을 벌여야 했다.
그렇지만 결국 사실상 공소시효가 없어진 조항 덕분에 끈질긴 수사 끝에 25년만에, 혹은 11년만에 도난문화재들을 회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난 당한지 11년만에 회수된 ‘숭례문 현판’. 두장인데 한 장은 앞뒤로 숭(崇)과 예(禮)자가, 다른 1장엔 앞면에 문(門)자가 새겨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1623년 알레니의 휴대용 세계지도 필사본
25년만에 회수된 ‘만국전도’는 1661년(현종 2년) 조선 중기 문신인 여필 박정설(1612~1693)이 채색 필사한 세계지도이다. 이 지도는 중국 명나라 말기에 예수회의 이탈리아 선교사 줄리오 알레니(艾儒略·1582~1649)가 1623년 편찬한 한문판 휴대용 세계지리서 <직방외기(職方外紀)>에 실린 ‘만국전도’를 민간에서 확대 필사한 것이다. 현재까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확인됐다.
1989년 보물지정 당시의 유물사진과 회수된 지도를 비교하면 지도의 윤곽과 도법 등이 일치하고 지명을 수정한 부분 및 채색 필사된 붓질의 방향도 같다. ‘만국전도’와 함께 회수된 함양 박씨 문중 전적류는 18세기 퇴계학맥을 계승한 유학자인 소산 이광정(1714~1789)의 <소산선생문집>을 비롯해 나암 박주대(1836~1912) 등이 직접 쓴 친필본 등으로 구성돼있다.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새긴 목판. 자유분방한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져 왔다. 몽한각의 목판에는 ‘숭례문 목판’과 ‘후적벽부’ 목판을 다시 새긴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문화재청 제공
■숭례문 현판 글씨와 초서 ‘후적벽부’의 주인공
11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숭례문 목판’ 2점과 ‘후적벽부 목판’ 4점 등도 양녕대군(1394~1462)의 친필 글씨로 알려진 목판들이어서 관심을 끈다. 전남 담양 몽한각(도유형문화재 제54호)은 양녕대군의 증손인 이서(1482~?)의 재실이며, 1803년 담양부사 이동야와 창평현령 이훈휘 등이 만들었다.
도난당했다가 되찾은 ‘숭례문’ 목판 2점 중 1점에는 앞 뒤로 ‘숭(崇)’자와 ‘례(禮)’자를, 다른 1점에는 앞면에만 ‘문(門)’자를 각각 새겼다. 역시 도난 당했던 ‘후적벽부 목판’ 4장엔 앞 뒤로 북송시대의 시인인 소동파(1037~1101)의 ‘후적벽부’ 시가 새겨져 있다. 그러니 시는 모두 8폭이다. ‘후적벽부’는 소동파가 ‘전적벽부’를 지은 뒤 2개월만에 다시 손님 2명과 적벽강에서 노닐며 풍물의 변화와 겨울달밤의 쓸쓸한 정감을 표현한 한시이다.
“…서리는 이미 내려 나뭇잎은 모두 떨어지고(霜露旣降 木葉盡脫) 사람 그림자는 땅에 있고 고개들면 밝은 달(人影在地 仰明月), 돌아보며 즐기며 노래하며 서로 화답했다(顧而樂之 行歌相答)…”
압수수색 당시의 ‘후적벽부’ 목판. 문화재사범들이 비밀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문화재청 제공
‘후적벽부 목판’ 글씨는 이른바 ‘광초(狂草·자유분방하게 휘갈겨 쓴 큰 초서체)’에 가까운 필치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이 후적벽부 목판의 마지막 판목에 ‘숭례문’ 글씨 목판과 ‘후적벽부’ 시 목판의 사연을 기록한 ‘간기(刊記)’가 새겨져 있다.
“즉 강정공(剛靖公·양녕대군의 시호)의 유묵으로 세상에 전하는 것은 숭례문 편액의 세 글자와 이 서각(후적벽부) 뿐이다. 각본은 지덕사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오래될수록 제 모습을 잃을까 염려되어 추성(담양의 옛 이름) 몽한각에서 중각했다. 정해년(1827년?) 9월.”
만국전도를 압수수색하고 있는 사범단속반
간기에서 언급된 지덕사는 양녕대군의 신위를 모신 사당과 무덤이 있는 곳이다. 앙녕대군 후손들이 숭례문 목판과 후적벽부 목판을 정해년(1827년?) 9월 다시 새겼다는 것이다.
‘숭례문’ 목판 글씨 3점은 일반에게 아주 친숙한 글씨이다. 바로 지금 국보 1호 숭례문의 편액(문 위에 거는 액자)의 대자인 ‘숭례문(崇禮門)’ 글씨이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이 숭례문 편액의 글자는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1530년(중종 25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정남쪽 문을 숭례문이라 하는데 양녕대군이 현판글씨를 썼다”고 소개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도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 석자는 양녕대군이 쓴 글씨이며 웅장하고 뛰어남은 그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유원(1814~1888)은 공조판서를 지낸 유진동(1497~1561)을,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대제학을 지냈고 초서와 예서에 능한 신장(1382~1433)을, 실학자 이규경(1788~?)은 세조시대의 명필인 정난종(1433~1489)을 각각 숭례문 편액 글씨의 주인공으로 지목했다. ‘숭례문’ 편액을 양녕대군이 썼다는 100% 확증은 없는 셈이다.
도난당했다가 회수한 ‘전’ 양녕대군의 ‘후적벽부’ . 양녕대군의 초서가 맞는지 여전히 논쟁중이다.|유지복의 ‘전 양녕대군 초서 후적벽부에 대한 고증’ <서지학연구> 53, 한국서지학회, 2012년에서
‘숭례문 목판’과 함께 도난당했다가 이번에 회수된 ‘후적벽부’ 목판 역시 마찬가지다. 이 ‘후적벽부’를 양녕대군이 이른바 ‘광초(狂草·자유분방하게 휘갈겨 쓴 큰 초서체)’에 가까운 필치로 담아냈다는 확증 또한 없다.
하지만 몽한각의 ‘후적벽부’ 목판에 “‘숭례문 3자’와 ‘후적벽부’ 목판은 양녕대군의 글씨”라는 간기가 새겨졌으니 양녕대군의 글씨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비록 작자를 완전히 밝혀줄 낙관이 없지만 현재까지는 ‘숭례문 현판=양녕대군’ 설이 다수설로 간주되고 있다. 19세기 초중엽까지 양녕대군의 후손들에 의해 다시 새겨졌거나 혹은 그 당시까지 양녕대군의 유물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숭례문 복원을 위한 고증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덕사부묘소(서울시유형문화재 제11호·양녕대군 사당과 묘소)에서 숭례문 현판의 탁본이 발견된 바 있다. 이는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보(1814~1881)가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복원을 위한 영건도감의 제조(총책임자)로 있으면서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1871년(고종 8년) 집필된 <임하필기>에는 “이승보가 숭례문 현판을 직접 확인했다”고 기록했다.
한상진 단속반장은 “문화재사범에 대한 공소시효가 사실상 사라진만큼 수십 수백년이 지나도 적발될 수밖에 없다”면서 “도난문화재를 은닉·관리하는 이들은 빨리 해당문화재를 돌려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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