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범에게 곤장 80대를 선고한다.’ 2012년 7월 필자는 ‘조선의 성범죄, 어떤 처벌을 받았나’라는 기사에서 <세종실록>을 인용했다.

1438년(세종 20년) 8월1일 <세종실록>에 기록된 성범죄 사건의 요지는 ‘성균관 유생 둘이 옷을 벗고 목욕하다가 지나던 여인을 덮치려 했지만 여인이 도망가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요지였다. 사헌부 수사 결과 문제의 유생 둘 중 실제 여인을 덮친 유생에게 장 80대의 형을 내렸다. 당시 조선은 모든 범죄의 판결에 1367년 제정된 명나라 형법(<대명률>)을 따랐다. 

“무릇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 조간(勺姦·여자를 유괴한 뒤 간음)은 장 100대이고, 강간한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流) 3000리에 처한다.”(<대명률> ‘형률·범간조)

필자는 이 법조항을 보고 성희롱범에게 강간미수죄(장 100대 유배 3000리)보다는 낮은 장 80대에 처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세종실록> 1438년(세종 20년) 8월1일자 기록을 뜯어보니 이 사건이 달리 보였다. 다시 보니 ‘성균관 유생들의 성범죄’ 사건은 조선판 ‘미투’에 비견될 만 했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소년전홍’.  젊은 양반이 이웃집 여인을 희롱하는 장면을 그렸다. 조선시대엔 성희롱도  곤장 80대 이상의 처벌을 받았다.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판 ‘바바리맨’의 성범죄

2012년 기사 쓸 때 흘려보낸 <세종실록> 기록을 토대로 1438년 8월 1일의 상황을 곱씹어보자. 

성균관 유생 둘(진사 최한경과 생원 정신석)은 성균관 내의 공자 사당에서 거행되는 제사를 위해 반수(泮水·성균관 옆에 흐르는 물)에서 목욕재계하고 있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3일 동안 몸을 깨끗히 하고 모든 언행을 삼가는 치재(致齋) 기간 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목욕재계 중이던 두 성균관 유생 앞에 평상복 차림의 ‘앳된 부인(幼婦)’이 여종 둘을 거느리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 진사 최한경이 ‘홀랑 벗은채(不衣冠)’ 갑자기 뛰어나가 부인을 쓸어잡고 희롱하며 욕을 보였다.(率然出搏幼婦以희辱) 

이에 부인은 완강하게 항거하고, 부인의 여종은 “우리집 안주인이예요”라 부르짖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정신석이 부인의 두 여종을 때려서 쫓아버리고는 최한경을 도와서 힘으로 부인을 억눌렀다. 

<세종실록>은 두 유생이 여인을 어떻게 욕을 보였는지 적시하지 않았다. 

다만 “뒤이어 부인이 쓰고있던 입자(笠·갓)를 빼앗아 성균관의 재실로 돌아왔다.

정신석에게 쫓겨난 두 여종에게서 “부인이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여인의 집에서 사내종(원만)을 급히 현장에 보냈다. 그러나 이미 여인은 풀려났고, 두 유생은 떠난 뒤였다. 사내종 원만은 즉시 성균관 직숙관(숙직)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나는 홍여강(洪汝康·누구인지 사료에 나오지 않음)의 종입니다. 아직 혼인하지 않은 여주인이 병에 걸려 어린 계집종을 거느리고 할머니뻘 어르신 집으로 가려고 반수(성균관 옆에 흐르는 물)을 지나다가 두 유생에게 뜻하지 않게 침핍(불법적인 핍박) 당했습니다. ~제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지만 현장을 보지 못했습니다. 유생이 입자를 빼앗아 갔다니 이를 찾아주십시요.”

공자님에게 올리는 제사를 앞두고 목욕재계 중이던 유생들이 여인을 욕보였다? 이것은 대단한 파문을 일으킬만한 사건이었다.


■‘성희롱만 인정한 가해자들’

성균관은 서둘러 자체조사에 들어갔다. 성균관 기숙사(재생)에 자초지종을 묻자 최한경·정신석 두 유생이 자백했다. 하지만 둘은 “우린 다만 희롱했을 뿐”이라고만 진술했다. 요즘 같으면 성희롱 부분만 인정한 것이다. 

이에 성균관 정록(정8~9품 관리)이 최초에 조사를 의뢰했던 홍여강의 사내종 원만을 소환해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 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원만의 진술이 오락가락해진 것이다. 

“다시 한번 진술해보라. 너의 여주인이 당한게 맞냐?”(성균관 정록)

“사실은 여주인이 아니고 주인의 유모(乳母)의 딸입니다. 저는 다만 (성균관 유생들을 겁주려고) 여주인이라 말한 것입니다”(사내종)

사내종 원만의 진술이 달라지자 성균관 정록이 순간 꾀를 내어 다 아는데 왜 거짓말 하냐는 듯 운을 뗐다.

“야. 네 주인의 유모라고? 그 유모라는 여자한테는 본래 딸이 없다는데 무슨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성균관 정록의 유도 질문에 크게 흔들린 원만은 다시 말을 바꾸었다.

“아닙니다. 주인의 ‘비첩(婢妾·여종의 신분으로서 양반집 첩이 된 여인)’입니다. 그냥 ‘비첩’이란 소리가 싫어서 숨긴 것입니다.”

신윤복의 <청금상련>. 고위관리들이 의정부나 육조 같은 관아의 후원에서 기생들을 희롱하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사헌부에 성범죄 사건을 고소한 여인

여주인→여주인의 유모 딸→비첩까지… 진술이 세 번이나 바뀌자 성균관 정록은 “안되겠다. 진실을 알아야겠으니 대질 심문 해보자. 첩과 두 계집종은 어디 있느냐. 빨리 불러오라”고 했다. 대질심문이라면 가해자인 성균관 유생 두 사람하고 피해자인 여인과 두 여종이 대면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2차 가해가 우려되는 상황이 아닌가. 사태가 심상치않게 돌아가자 사내종 원만은 다시 둘러댔다.

“오늘 아침 일이 있어서 모두 외출했습니다. 지금 집에 없습니다.”

사건 조사는 사내종 원만의 모호한 진술로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이 무렵 사헌부에 고소장을 제출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홍여강의 아들인 홍우명의 첩, 소앙(召央)이었다. 사헌부는 관리들의 비행과 부정부패를 규찰하고 수사하는 요즘의 ‘검찰+감사원’ 역할을 했던 사법·사정기관이었다. 사건이 지지부진, 그대로 유야무야 될 위기에 처하자 두 유생에게 ‘당한’ 여인이 직접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제출한 것이다. 지금도 선뜻 내기 어려운 용기인데, 조선시대 때는 오죽했으랴. 소앙의 사헌부 고소는 ‘조선판 미투’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소앙 여인이 진술을 번복한 이유

그러나 <세종실록>의 기사를 읽으면 뭔가 석연치않은 냄새를 풍긴다.

“소앙이 사헌부에 고소했는데, 소앙 역시 처음엔 강간미수라 했다가 나중에는 단지 희롱만 당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자못 의심했는데, 사대부 집안과 관련된 사건이어서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소앙이 용기를 내어 사헌부에 성균관의 두 유생을 고소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처음엔 ‘강간미수’라 진술했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희롱’으로 말을 바꿨다. <세종실록>은 소앙이 왜 또 진술을 바꿨는지는 쓰지 않았다. 다만 “소앙이 진술을 바꾸자 사람들이 자못 의심의 눈길을 던졌는데, 그 사건이 사대부 집과 관련된 것이어서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고 썼다. 

소앙의 진술과 관련해서 사대부 남편 집안(홍씨 가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아니면 가해자인 두 유생과 그 가문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그리고 사건을 수사한 사헌부가 또 어떤 입장을 보였는지 알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의 입지가 좁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록 기사인 것 같다. 오죽했으면 당대의 여론도 이 사건을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았다고 했을까.

어쨌든 이 사건을 수사한 사헌부는 세종에게 ‘정신석은 태형 40대, 최한경은 장 80대에 해당된다’고 세종 임금에게 고했다.

“공자에게 올리는 제사를 집전하는 임무를 맡은 정신석은 부인의 입자(갓)을 빼앗고 희롱했으니 태형 40대에 처해야 합니다. 또 최한경은 소앙을 강간하려고 침핍(侵逼·달려들어 핍박함)한 죄는 장 80대에 해당됩니다.”

최한경이 1444년 과거에서 33명 중 5등으로 합격했음을 알려주는 자료. 최한경 곁에서 성희롱을 도운 유생 정신석도 이 과거에서 합격했다.  

■“미심쩍다” 재수사 명령한 세종

사헌부의 최종수사발표를 들은 세종은 여전히 미심쩍다면서 재수사를 명했다. 세종은 “들리는 바로는 단지 이에만(강간미수에만) 이르지 않았다고 하니 다시 진상을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했다. 임금에게까지 미심쩍은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성균관 유생 성범죄 사건은 당대의 핫이슈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헌부의 재수사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헌부는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고소한 사람의 진술로만 결단할 수밖에 없다”면서 “그렇지만 거듭거듭 조사하고 추궁해도 소앙의 진술은 ‘성희롱만 당했다’는 것이어서 그 이상의 죄상을 밝힐 수 없다”고 세종에게 보고했다. 결국 세종은 최한경에게 장 80대의 처분을 내리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사헌부의 수사결과와 세종의 판결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앙의 진술이 오락가락했음에도 결국 최한경의 강간미수 혐의는 인정했으니 말이다. 사헌부는 다만 <대명률>의 강간미수죄 처벌형량(장 100대, 유배 3000리)보다는 낮춰 장 80대가 적당하다고 세종에게 보고했다. 여론을 청취하고 “내 들으니 (강간 미수 이상의) 일이 벌어진 같으니 재수사하라”고 지시한 세종 임금의 자세도 평가할만 하다.


■궁녀 출신 성균관 여종의 손을 잡은 공신 

그로부터 또 한 번 조정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희롱 및 성범죄 사건이 1476년(성종 7년) 일어났다.

4월7일 대사헌 윤계겸(1442~1483)이 우참찬 어유소(1434~1489)을 체포해서 국문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사달은 그해 2월 성균관 대성전의 문묘(공자 사당)에서 열린 석전제가 끝난 뒤의 음복(飮福) 때 일어났다. 

“어유소가 성균관 소속의 여종인 녹금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또 손을 잡아 희롱했다”는 것이었다.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또한 사건이 일어난 곳은 다름아닌 공자를 비롯한 유학의 성인들을 모신 성균관이었다. 게다가 우참찬이라면 의정부 소속 대신이 아닌가. 윤계겸은 “어떻게 그런 분이 이토록 무례하고 방자한 짓을 저질렀냐”고 탄핵한 것이다.

이 탄핵에 따라 사헌부 관리가 투입돼 국문을 열 예정이었다. 그런데 <성종실록>을 보면 웃지못할 일이 벌어진다. 

어유소가 의정부 녹사(하급관리)를 승정원에 보내 “제가 무슨 낯으로 하늘을 보겠냐. 죽을 죄를 졌다”고 인정하면서 “그러나 병이 위독해서 의원을 만나야 한다”고 아뢰었다. 죽을 죄를 졌다면서도 본인이 직접 나서지도 않고 하급관리를 시켜 ‘위독’ 운운하면서 ‘의사를 만나야겠으니 출두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칭병’하면서 수사에 불응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어유소는 하급관리를 통해 승정원에 “변방에 오래 근무했던 탓에 그 계집이 궁인(宮人)이 된 것을 몰랐을 뿐”이라면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나도 모르게 실수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어유소가 누구인가. 1456년(세조 2년) 무과에 장원급제한 뒤 북방의 야인정벌(1460년)과 이시애의 난(1467년) 진압에 큰 공을 세워 1등 공신(적개공신)이 된 무장이다. 게다가 명나라가 건주위의 여진족을 정벌할 때(1467년) 조선 지원군 장수로 파견돼 큰 공을 세워 명나라 황제로부터 상품을 받았다. 그랬으니 당대 북도 방어에 없어서는 안될 무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 여인들이 몸을 씻는 모습을 동자승들이 훔쳐보고 있다.   

■성희롱 가해자가 된 공신

그런 어유소가 ‘성균관 여종 녹금 성희롱 사건’의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사헌부는 일단 어유소의 반인(伴人·개인 수행원)과 구사(丘史·공신에게 배당된 하인)를 소환해서 곤장을 때려 심문했다. 모시던 주인을 잘못 만나 횡액을 당한 것이다. 공신의 신분인 어유소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유소는 다시 하급관리를 보내 승정원을 통해 “어제 제 하인과 수행비서가 곤장을 맞았다”고 성종에게 일러바쳤다.(4월18일) 성종은 “아니 수행원이라면 주인의 죄를 감춰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왜 그들에게 곤장을 치느냐”고 어유소를 두둔하면서 오히려 사헌부를 문책했다.

그러나 사헌부 지평 박숙달은 “사헌부는 그저 석전의 음복날에 취해 녹금을 희롱한 어유소를 국문하는 것일뿐”이라고 주장했다. 박숙달은 이 자리에서 더 엄청난 어유소의 혐의를 까발렸다.

“어유소가 녹금을 희롱만 한 것이 아닙니다. 성균관 서리의 진술로는 어유소가 한달여가 지난 3월3일 성균관 유생들의 과시(일종의 월정고사) 때 의정부 당상으로 참여한 뒤 녹금의 집을 왕래했답니다. 이것은 녹금 뿐 아니라 이웃 사람들도 인정했습니다. 오로지 어유소만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어유소의 수행원들을 심문한 것입니다.”


■“어유소, 성희롱만 저지른게 아닙니다”

핵폭탄급 발언이었다. 어유소가 녹금을 성희롱한 것도 모자라 녹금의 집에까지 찾아갔다는 것이다. 

성종은 할 수 없이 “어유소를 빨리 국문하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다모(茶母·관비 출신의 사헌부 소속 여수사관) 등을 통해 이 사건을 수사한 사헌부는 총력을 다해 어유소를 탄핵한다.

“어유소는 성균관에서 녹금을 희롱한 뒤 유생의 시험날에 녹금의 어미를 불러 사사롭게 말하고는 도보로 쫓아가 집에 찾아갔다가 날이 저물녘이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4월20일)  

특히 대사헌 윤계겸은 “다모의 수사와 녹금 모자의 진술을 보건대 희롱이 아닌 간통이 분명한데 병을 칭하고 수사를 불응하고 있으니 이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성균관 여종이라는 녹금이 궁녀 출신이라는 것이 더 큰 파문을 일으켰다. 궁녀는 원칙적으로 임금의 여자이기 때문에 궁녀를 욕보이는 것은 대역죄인으로 취급됐다. 

사건원 사건 박숭질(1435~1507)까지 나서 “어유소를 용서한다면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국체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면서 “죄를 주라”고 주문했다. 이에 성종은 “술을 먹고 실수했을 뿐이며, 무엇보다 어유소는 공신이 아니냐”고 두둔했다. 

교수형을 당하는 모습을 그린 김윤보의 <형정도첩>. 성폭행죄가 바로 교형, 즉 교수형에 해당되는 중벌로 취급됐다.

■가해자의 역성을 들어준 성종 

성종은 “어유소가 위독하다고 하지 않느냐”고 주변을 돌아보며 “병세는 어떠냐”고 묻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성종과 눈이 마주친 원로대신이자 영사(정 1품)인 정인지 역시 성종의 역성을 들어주지 않았다. 정인지는 “녹금은 대궐에서 놓아보낸 시녀)이니, 일이 과연 잘못된 것”이라고 뜻을 밝혔다. 

이후 <성종실록>은 “어유소를 처벌하라”는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1등 공신이 술취한 김에 저지른 일과성 사건’이라는 성종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이어졌다. ‘처벌하라’는 대간·간관의 상소와 ‘안된다’는 임금의 답변으로 점철됐다. 

사헌부 집의 이형원은 “비록 어유소가 승복하지 않았다 해도 주변 사람들의 진술이 일치한다”면서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월22일)

사헌부 수장 대사헌에 이어 사간원 대사간 최한정(1427~1486)까지 탄핵대열에 합류했다.

최한정은 “대신이 음란해서 방탕하면 ‘마소(馬牛)에 옷을 입힌 격’이라 했다”면서 어유소를 마소에 비유했다.(23일) “저렇게 뻔뻔하고 염치없는 사람을 주상께서는 ‘취중의 일’이라고 용서함으로써 결국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질 것”이라고 신랄하게 퍼부었다. 그래도 성종은 “공이 크고 죄가 작기 때문에 용서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대·간관의 공세와 성종 임금의 방어 공방은 짧게는 5월 12일까지 한달 넘게 앵무새처럼 진행됐다. 특히 5월12일에는 예문관 부제학인 손비장까지 나서 어유소의 파직을 청했다. 성종은 아예 묵묵부답으로 응대했다. 하지만 어유소 성희롱 사건은 해를 넘긴 1477년(성종 8년) 1월8일 사간원 최한정이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용서하시는 일이 많다”면서 그 사례로 시녀 녹금을 희롱한 어유소 건을 들었다. 


■사면령에도 해당되지 않은 강간범

앞서 살펴보았듯 조선시대 성범죄는 <대명률>에 따라 엄벌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강간은 모반과 같은 대역죄와 존속살인 등과 맞먹는 중죄로 취급됐다. 국가의 경사 때 종종 행했던 대사면령에도 강간죄는 해당되지 않았다. 예컨대 성종은 1471년 1월24일 20살의 나이에 요절한 아버지를 의경왕(훗날 덕종으로 추존·1438~1457)으로 추서하면서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사면령에서 제외되는 중죄를 나열했다.

“24일 새벽녘 이전에서부터 모반(謀反)·대역 모반(大逆謀叛)한 것, 조부모나 부모를 살해하거나 때린 것, 처첩으로서 지아비를,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 고의살인과 독살, 염매(염魅·죽이려고 저주해서 행위)한 것과, 강간·강도 등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다 용서하여 면제한다.”

아무리 국가적인 대사면령이라도 강간범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못박은 것이다.

구한말 곤장을 맞는 모습. 세종시대의 성균관 유생 최한경은 지나던 부인을 덮쳤다는 혐의로 장 80대의 처벌을 받았다.

■교수형으로 단죄한 강간범

<대명률>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강간죄의 경우 교수형이 원칙이었고 강간미수죄의 형량은 ‘장 100대에 유배 3000리’였다.

실제로 ‘11살 어린 아이를 강간한 사노 잉읍금을 교수형에 처했다”(<태조실록>)거나 “죽도록 항거한 처녀를 강간한 철원사람 정경을 교수형에 처한다”(<세종실록>)의 기록처럼 극형을 받은 강간범이 제법 많았다. 심지어 부모가 죽어 삼년상을 치르려던 16살 처녀를 끌고가 강간한 가노(家奴) 형제 등 3명은 상전을 겁간한 죄로 법정최고형인 능지처참의 극형을 받았다.(<태종실록>)   

심지어 군수를 지낸 황우형은 1472년(성종 7년) 자신의 처 4촌 오라비의 아내이자 사족의 부인인 반씨를 강간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 <대명률>에 따르면 강간미수죄의 형량은 ‘장 100대에 유배 3000리’였다. 그러나 황우형은 예전에도 장모를 능욕한 혐의로 붙잡힌 이력이 있었다. 성종은 “처가쪽 사촌 오라비의 아내를 욕보이려 하는 등 죄질이 아주 나쁜 자를 강간미수로만 처리할 수 없다”는 사헌부의 주청에 따라 ‘황우형의 직첩(관리임명장)을 거두고 영원히 등용하지 않으며,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내린다’고 판결했다. 성종은 이 처벌도 부족하다며 변방 중의 변방인 회령의 관노(官奴)로 쫓아냈다.


■사대부 왕족에는 관대했던 처벌 

그러고보면 성범죄 처벌의 경우 오히려 조선시대가 지금보다 더 엄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맞는 얘기다. 그렇다고 조선시대의 형벌이 이상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사법부의 저울이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균형잡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녀자 강간죄가 아무리 추상같다 한들 천민의 경우 법률에 따라 교수형으로 처벌됐지만, 양반의 경우엔 장과 유배형 등으로 마무리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종친이나 부마와 같은 왕실 사람의 경우 처벌에 어려움이 많았다.

단적인 예로 세종대왕의 손자인 청풍군 이원(1460~1504·세종의 막내 영응대군의 외동아들)은 천하의 난봉꾼이었다. 정희왕후(세조의 부인)의 부음을 듣고도 7촌 숙부의 첩을 간통한 것도 모자라 연적인 부평부사 김칭과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는 등 추태를 부렸다. 

청풍군은 이 일로 유배형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못말리는 난봉기질은 유배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유배지에서 청상과부를 강간한 것이다. 그 천인공로한 일로 다시 유배지를 옮겼지만 그 곳에서도 남의 논밭과 우마를 빼앗는 등 완악한 짓을 저질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탄핵상소가 빗발쳤지만 성종은 “청풍군은 세종의 손자이며, 영응 대군의 외아들이다. 어머니(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제사를 받들기를 부탁했기 때문에 특별히 사면했다”고 고집을 피웠다.

명나라 형법서인 <대명률>. 조선은 <대명률>에 따라 모든 사건을 판결했다.  

■성범죄 가해자 최한경의 그후

또 추상같은 처벌을 내렸다는 여러 사례들도 끝까지 살펴야 한다. 마지막까지 읽어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저 처벌을 받은 대목에서 읽기를 마무리하면 안된다. 필자도 왕왕 그런 잘못을 저질러 앞부분만 읽고 경솔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있다. 단적인 예로 성균관 유생 최한경의 후일담을 보자.

1438년(세종 20년) 최한경은 양반의 첩인 소앙을 강간미수(혹은 성희롱)한 죄로 장 80대의 처벌을 받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최한경은 6년 뒤인 1444년(세종 26년)에 실시된 식년시(3년만에 치르는 정기 과거)에 최종합격자 33명 중 5등(병과 2등)으로 당당 합격한다. 최한경과 함께 소앙 여인 일행을 욕보인 정신석 역시 20등(정과 10등)으로 급제했다. <필원잡기>와 <사가집>, <동국통감>을 지은 서거정이 전체 3등(을과 3등)을 차지한 과거였다. 

최한경은 과거합격 후 글씨를 잘 쓴 덕분에 능력을 인정받았다. 급제 8년만인 1452년(단종 즉위년) 형조의 도관정랑(정 5품)이 된 지 두달만에 성균관 직강(정 5품)으로 옮겼다. 이때 사간원 좌헌납 송인창(1403~?)이 “송사를 다루는 관리(도관정랑)를 두 달만에 바꾸는 것은 잘못됐다”고 간언하자 단종은 “최한경이 글씨를 잘 써서 춘추관에서 벼슬할 만 하므로 옮겨준 것”이라고 답했다.(<단종실록>) 

단종은 “만약 그것이 무리스럽다면 도관정랑과 성균직강을 겸임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편법을 쓰면서까지 최한경을 발탁했다. 최한경은 이후 <세종실록> 편찬에 사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455년(단종 3년) 호조정랑 재직 중에는 몰수한 최습의 가산을 월권으로 나눠 지급한 일로 ‘장 80대와 자자(刺字·이마에 전과기록을 새기는 형벌), 장리안(贓吏·뇌물수수죄 등의 전과자 이름을 적은 명부) 등재’의 형벌이 내려졌다. 그러나 당시 집정이던 수양대군의 배려로 태형 40대에 해당되는 벌금형에 그쳤다. 


■제버릇 못준 최한경

그런데 그렇게 문명을 떨친 최한경이었지만 역시 여자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질투까지 심했던 모양이다. 

1456년(세조 2년) 행호조정랑이던 최한경은 기생 청루월을 첩으로 삼고는 사령(부하관리) 이덕중에게 청루월의 심부름을 들게 했다. 청루월이 만나는 다른 남자를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감시 뿐이 아니었다. 최한경의 사주를 받은 이덕중은 청루월에게 희롱하는 남자만 보면 해코지하며 그 남자들의 말다래를 끊어놓았다. 급기야 이 일이 발각되어 탄핵을 당하자 최한경은 이덕중을 피신시키고, 다른 가노(집안 노비)를 시켜 대신 소송에 임하게 했다. 그러다 일이 발각되자 이덕중에게 금품을 쥐어주고 발설하지 않도록 했다. 

결국 최한경은 사헌부의 탄핵에 따라 파직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3년도 안된 1459년 이전에 불사조처럼 복귀해 이듬해 당상관에 올랐다. 최한경은 이후 첨지중추부사와 충청도관찰사, 이조참의를 거친 뒤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한 뒤 사망했다.


■승승장구한 가해자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성균관 유생시절 성희롱 사건(혹은 강간미수 사건)의 가해자였고, 또 관직생활 중 기생과의 스캔들로 파직당한 인물이 훗날 최고 지성이라는 성균관의 수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대간과 간관의 끈질긴 탄핵항소에도 성종 임금의 비호를 받아 처벌을 면한 어유소 역시 병조판서와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겸 도총관 등의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1489년(성종 20년) 10월 4일에 기록된 어유소의 졸기(부음기사)에도 궁녀 출신 여인 성희롱 및 강간사건 이야기는 단 한 단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지금보다 오히려 강력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가해자가 누구냐,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그 저울추가 오락가락했음을 알 수 있다. 


■‘꽃밭에서’ 가사가 최한경의 작품?

필자는 최한경 관련 기사를 준비하다가 사뭇 흥미로운 자료 하나를 보았다. 가수 정훈희씨의 노래로 알려진 주옥같은 가요 ‘꽃밭에서’의 가사가 실은 최한경이 성균관 유생 시절 어릴 때부터 연모해오던 ‘박소저’라는 여인을 위해 지은 연애시였다는 것이다. 출처도 최한경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 <반중일기(泮中日記)>라는 것이다. ‘반중’은 성균관 인근의 동네를 일컫는다.   

“꽃밭에 앉아서(坐中花園) 꽃잎을 보내.(膽波夭嶪) 고운 빛은(兮兮美色) 어디에서 왔을까.(云河來矣) 아름다운 꽃이여.(灼灼基花) 어지 그리도 농염한지(何彼艶矣) 이렇게 좋은 날에(斯于吉日) 이렇게 좋은 날에(吉日于斯) 그 님이 오신다면(君子之來) 그 님이 오신다면(美人之歸) 얼마나 좋을까.(云何之樂)”

그런데 필자가 아무리 찾아봐도 최한경이 썼다는 <반중일기>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고전번역원이나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정보자료에도 찾을 수 없다. 고전 전문가에게도 문의해봤지만 자신도 처음보는 자료라 했다. 

그런데 출처를 찾아가던 필자는 고 최인호 소설가의 2007년작 산문집 제목이 <꽃밭>이며, 그 책의 서문에서 “조선조 유생 최한경의 ‘꽃밭에서’라는 시에서 산문집의 제목(<꽃밭>)을 땄다”는 글귀를 보았다. 아무렴 최인호 소설가가 출처불명의 책을 인용하지는 않았을텐데…. 아무튼 누구든지 최한경의 <반중일기>와 ‘꽃밭에서’ 출처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필자에게 귀띔해주기 바란다.

여하튼 그 주옥같은 노래말의 주인공이 만약 성균관 유생 최한경이 맞다면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지나던 여인을 성희롱하고 심지어는 욕을 보이려 했으며, 훗날 사람을 고용해서 첩으로 삼은 기생들에게 접근하는 남성들을 해코지했던 최한경과. 어릴 때부터 좋아한 소녀를 위해 그렇게 멋들어진 시를 남겼던 최한경…. 최한경이든 어유소든 성범죄의 혐의를 받은 이들이 훗날 개의치 않고 잘 살아갔지만 아무리 씻으려해도 씻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역사기록이다.

그들의 성범죄 혐의 기록이 지금 다른 역사서도 아닌 조선왕조실록에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처럼 훌륭한 반면교사가 어디 있는가. 어떤 시대를 살든 행동거지 조심해야 한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