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신라를 울린 '효녀지은' 이야기

 “얘, 지은아. 예전엔 밥은 거칠었지만 맛은 좋았는데, 요즘에 먹는 밥은 좋기는 하지만 밥맛은 예전같지 않구나. 마치 칼날로 간장을 찌르는 것 같고….”
 신라 진성왕(재위 887~897년)대의 일이다. 경주 분황사 동쪽 마을 살던 효녀 지은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눈이 먼 홀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32살이 되도록 시집도 가지 못했다. 지은의 삶은 고단했다. 날품팔이와 구걸로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부잣집에 몸을 팔아 종이 되었다. 지은은 몸을 판 조건으로 쌀 10여 섬을 마련했다.
 하루종일 주인집에서 일한 뒤 저녁에 밥을 지어 어머니를 주었다. 하지만 3~4일 후 어머니는 밥맛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허구헌날 거친 밥만 먹다보니 윤기가 흐르는 쌀밥을 뱃속이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딸이 자초지종을 고백하자 어머니는 대성통곡했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 손님을 접대하는 고구려 귀족의 모습이다. 주인과 객이 독상을 받고 있으며. 과일과 술(혹은 물)도 따로 차렸다.

■“빨리 죽어야 하는데…”
 “나 때문에 네가 남의 집 종이 되었구나! 내가 빨리 죽어야 하는데….”
 딸의 마음도 찢어졌다. 그저 어머니의 ‘입과 배’(口腹)만 채울 줄 알았지, 정작 어머니의 마음에 맞는 봉양을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졌다. 딸과 어머니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가 얼마나 구슬펐는지 동네 사람들의 마음도 찢어졌다. 그 때였다. 낭도들을 소집한 화랑 효종랑이 약속장소인 포석정으로 가던 중 이 고을을 지나가다가 지은 모녀의 울음소리를 듣고 발길을 멈췄다.
 효종랑은 낭도들과의 약속사실도 까맣게 잊고 지은 모녀의 자초지종을 파악했다. 효종랑은 집으로 돌아가 곡식 100섬과 옷가지를 마련해서 지은 모녀에게 전달했다.
 효종랑은 지은을 종으로 산 주인에게 보상하고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효종랑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낭도 수 천 명도 각각 곡식 한 섬씩을 내어 도와주었다. 미담은 궁궐에까지 퍼졌다. 진성여왕까지 나서 조(租) 500섬과 집 한 채를 내려주고 지은의 잡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진성여왕은 다음과 같은 영까지 내렸다.
 “지은이의 집에 졸지에 재산이 쌓였구나. 재산을 혹 도둑맞을 지도 모른다. 군대를 보내 지은의 집을 지키도록 하라.”
 진성여왕은 효녀 지은의 마을을 기려 ‘효양방(孝養坊)’이라 한 뒤, 당나라에까지 표문을 올려 지은의 효성을 알렸다.(<삼국사기> ‘열전·효녀지은’), <삼국유사> ‘빈녀양모’)
 이처럼 지은의 효성은 당대 신라사회를 울렸고, 당나라까지 알려질만큼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아이를 묻어야….”
 흥덕왕 시대(재위 826∼836)는 신라의 최절정기를 구가하던 때였다. 이 시기에 손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역시 날품팔이로 근근히 식량을 구해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런데 손순의 어린 아들이 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보다 못한 손순 부모는 머리를 맞대고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들은 다시 낳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으니….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다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가 굶어죽게 생겼소.”
 깊은 한숨을 쉬던 부부는 결국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다.
 “아이를 묻읍시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머니의 배를 채울 수 없으니….”
 부부는 눈물을 머금고 취산의 북쪽 들에 아이를 묻으려 했다. 하지만 땅을 파자 그 곳에서 석종(石鐘)을 발견했다. 종을 쳐보니 소리가 은은했다. 아내가 말했다.
 “신령스런 물건을 얻은 것도 아이의 복인 것 같으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될 것 같아….”
 집에 돌아온 부부는 석종을 시험삼아 두드렸다. 이 종소리는 대궐까지 들였다. 손순 부부의 자초지종을 들은 흥덕왕은 부부에게 집 한채와 연 50석의 벼를 내렸다.
 “손순이 아이를 묻자 석종이 솟았다니…. 이것은 전세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일테지.” 
 흥덕왕은 손순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순후한 효성을 숭상했다.(<삼국유사> ‘손순매아 흥덕왕대’) 

invalid-file

고구려의 최전방 사령부인 임진강변 호로고루에서 출토된 군량미 흔적. 고구려는 곡창지대인 요동을 차지함으로써  배고픔을 덜었다. 하지만 일반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궁핍했다. |토지주택박물관 제공 

■진정법사 이야기
 의상대사(625~702)의 제자인 진정법사의 이야기도 눈물겹다.(<삼국유사> ‘진정사 효선쌍미’)
 법사는 출가 전에 졸오(병정)으로 있었는데, 집이 가난해서 장가도 들지 못했다. 설상가상 부역에 동원됐던 그는 틈나는 시간에 날품팔이로 홀어머니를 공양했다.
 재산이라고는 오로지 다리 부러진 쇠솥 하나 뿐이었다. 어머니는 어느 날 어떤 스님이 문간에 와서 “절을 지을 쇠붙이를 구한다”고 하자 선뜻 그 쇠솥을 공양했다. 법사는 기쁜 얼굴로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드디어 법사가 출가하던 날, 어머니가 쌀자루를 털어보니 쌀 일곱되가 있었다. 어머니는 이 쌀로 밥을 지은 뒤 말했다.
 “자, 한 되의 밥은 여기서 먹어라. 나머지 여섯되는 싸 가지고 가서 먹도록 해라.”
 아들이 “차마 그럴 수는 없다”고 흐느꼈다.
 “자식으로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며칠 동안의 미음거리까지 모두 싸 가지고 떠난다면 절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들은 세 번이나 사양했지만, 어머니의 강경한 뜻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누릅나무 벗겨먹던 고구려 사람들
 어디 신라만 그랬을까. <삼국지> ‘위서·동이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고구려의 대가들은 밭을 갈지 않는다. ‘앉아서 밥먹는 자(坐食者)’가 1만 여 호가 된다. 하층민들이 멀리서 쌀과 양식, 생선과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공급한다.”
 같은 <삼국지>는 “고구려의 강역이 사방 2000리요, 인구는 ‘3만호’”라 했다. 진수(陳壽·233∼297년)가 <삼국지>를 쓴 것이 3세기 후반이었다. 따라서 <삼국지>가 기록한 것은 고구려 초기의 강역과 인구였을 터. 그렇다면 3만 호 가운데 1/3인 1만 호 이상이 농사도 짓지 않고, 하층민이 공급하는 식량에 기대어 먹고 살았다는 얘기다.
 고구려 평강왕대(재위 559~590년)의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어떤가. 평강공주가 평민인 ‘바보 온달’을 만나려고 보물 팔찌 수십개를 차고 가출한다. 수소문 끝에 온달의 집을 찾은 공주에게 온달의 어머니가 말한다.
 “(당신은) 천하의 귀인일텐데 누구의 속임수로 우리 집에 왔나요?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楡皮)’을 벗기려 간 지 오래됐소.”
 평강 공주가 그 말을 듣고 그 집을 나와 걷다가 산 밑 이르니,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고 있었다.(<삼국사기> ‘열전·온달전’)
 평강공주는 가출할 때 가져나온 보물팔찌를 팔아 농토와 집, 노비, 우마와 기물(생활용기) 등을 샀다. 이로써 살림살이가 다 갖추어졌다.
 평강왕대라면 고구려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을 때였다. 그렇지만 온달 같은 평미은 굶주림에 시달려 누릅나무 껍질을 먹는 비참한 지경에 처했음을 알 수 있다.
 하기야 빈발하는 자연재해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예컨대 진정법사의 이야기가 나올 무렵인 705~707년 사이 신라는 엄청난 가뭄에 시달렸다.
 “705년(성덕왕 4년)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떠돌아 다녔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진휼하였다. 707년 봄 정월에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었다. 한 사람에게 하루 벼 3되씩을 7월까지 나누어 주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성덕왕조’) 

신라 황성동 고분에서 출토딘 수레 도용. 신문왕의 혼인 때 수레 285대분의 예물이 신부집에 전달됐다고 한다. 

■벽화 속의 귀족들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을 때 왕·귀족들은 뜬구름 위에 사는 ‘귀하신 몸’이었다.
 당대 사람들이 직접 그린 벽화를 보면 집작할 수 있다. 평남 덕흥리 고분에서 확인된 묵서명을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무덤을 만드는데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다. 아침에 먹을 간장이 창고에 가득하다.”
 묘주인 유주자사 진(鎭)은 광개토대왕 때인 영락 18년(408년) 사망한 인물이다. 그가 유주, 즉 지금의 요서(遼西·랴오시)지방을 지배한 고구려인인지 어쩐지는 100%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술과 고기, 쌀을 다 먹지 못할 정도였고, 아침에 먹을 간장을 한 창고분이나 보관해 둘 정도였다니 대단한 음식자랑이다.
 5세기 말 무덤인 지안(集安)의 무용총 벽화에서도 고구려 귀족의 풍성한 식사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주인과 객이 각각의 의자와 독상을 차려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먹고 있다. 긴 다리가 있는 상에는 식사와 함께 떡과 과일, 차 등을 차렸다. 이 벽화는 격식을 갖춘 귀족의 식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른 벽화에는 소반과 상 같은 것을 들고 음식을 담아 나르는 여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황해도 안악 3호분의 벽화에도 생생한 식생활의 모습이 나타난다. 귀족 저택의 안채에는 부엌과 고기창고 등을 그렸는데, 고기창고엔 돼지와 소, 그리고 개(혹은 노루)고기 같은 동물이 갈고리에 걸려 있다. 기와집 주방에는 3명의 여인이 부엌일에 열중하고 있다. 시루 앞의 여인은 자루가 짧은 국자를 든 채 왼손에 쥔 막대 모양의 도구로 시루 안을 휘젓고 있다. 부뚜막 아래의 여인은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는 데 여념이 없다. 또 다른 한 여인은 그릇이 쌓인 소반 곁에서 상을 차리고 있다. 또 우물에서는 물을 뜨고, 또 귀부인에게 차를 올리는 모습까지…. 귀족 가문의 화려한 음식문화를 엿볼 수 있다.

 

 ■'대식가' 태종무열왕
 신라 왕·귀족들은 어땠을까.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년)을 보자.
 “태종무열왕은 하루에 쌀 서 말(斗)의 밥과 꿩 아홉마리를 먹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점심을 먹지 않고 다만 아침 저녁만 먹었다. 그래도 하루에 쌀 여섯말, 술 여섯말, 꿩 열마리를 먹었다.”
 물론 무열왕의 비범함을 알리려 과장한 기사일 수도 있지만, 엄청난 대식가였음에 틀림없다. 백제멸망 후 백제 고토의 민심수습과 고구려 정벌 준비, 당나라와의 외교관계 등 산적한 현안을 처리하느라 하루 두끼만 먹었다는데…. 그래도 하루 세끼의 식사량과 견줘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먹어댔으니….
 또 있다. 문무왕(재위 661~681)때의 일이다. 문무왕의 서제(庶弟)인 거득공이 신분을 감추고 지방을 순행했다. 재상이 되기 전에 민심을 살피려고 전국을 돌던 일종의 암행어사였다.
 그가 거사(居士) 복장으로 무진주(광주)를 돌다가 그곳의 관리 안길의 집에 들러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안길은 상다리가 휘는 음식을 차렸음은 물론이고, 세 명의 아내 중 한사람을 설득해서 거득공을 접대하도록 했다. 뜻하지 않은 환대를 받은 거득공은 떠나는 길에 “서라벌에 오면 꼭 날 찾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 후 안길은 파견 관리가 되어 서라벌을 방문, 재상이 된 거득공을 찾았다.
 버선발로 달려온 거득공은 안길을 극진하게 대접한다. 이 때 차린 음식은 무려 50가지나 되었다.

 

 ■285대의 예물수레
 신문왕이 일길찬 김흠운의 작은 딸을 왕비로 맞았을 때 신부집에 보낸 예물 목록을 보면 깜짝 놀란다.
 “신문왕 3년(683년), 김흠운의 작은 딸을 맞아들일 때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였다.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35수레였으며, 조(租)가 150수레였다.”
 한번 상상해보라. 예물의 대부분이 음식이라는 것은 놀랍다. 먹을거리를 가득 실은 285대의 예물 수레가 서라벌 시내를 행진하고 있는 모습을….
 <삼국사기>는 새 왕비를 맞이할 때의 서라벌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5월7일 묘시에 파진찬 대상과 손문, 아찬 좌야와 길숙 등의 아내들, 그리고 양부와 사량부 등 2부의 여자 각 30명씩을 선발해서 새왕비를 맞이오게 했다. 왕비가 탄 수레의 좌우에 시종하는 관원과 부녀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왕궁의 북문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갔다.”(<삼국사기> ‘신문왕조’)
 그로부터 15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 지은처럼, 손순처럼, 진정법사처럼, 온달처럼 구질구질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추석을 맞아 한번 쯤은 주변의 이웃을 살피면 어떨까. ‘효녀 지은’을 찾아낸 효종랑처럼…. 그러고보니 불과 30~40년 전까지도 우리는 ‘초근목피’. ‘보릿고개’라는 단어가 익숙한 세상에 살지 않았던가.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