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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한마디 농담'으로 세워진 나라

 “얘들야, 앞의 말은 농담이었느니라.(前言戱之耳)”
 공자님이 순간 진땀을 흘리면서 “내 말이 농담이었다”고 서둘러 변명한다. 제자 자유(子游)가 정색을 하며 대들었는데,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공자 ‘농담사건’의 사연을 들어보자.
 공자가 어느날 제자 자유가 다스리고 있던 고을인 무성(武城)에 갔다. 마침 고을 곳곳에서 비파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요순시대의 고복격양가(鼓腹擊壤歌)와 같은 태평성대의 노래소리였다.
 공자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농을 던졌다.
 “어째 닭 잡는데 소잡는 칼을 쓰는 것 같구나.(割鷄 焉用牛刀)”

 

춘추시대 진나라의 봉지. 춘추 5패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했던 진나라는 주나라 천자의 농담 한마디 덕분에 건국됐다. (출처:인성핑의 <신권의 일천년 (2) 상 주시대>, 시공사, 2003년)

■공자의 ‘썰렁개그’
 얼핏 들으면 야유였다. 견문발검(見蚊拔劍), 즉 모기를 잡으려고 칼을 빼든다는 고사가 있지 않은가. 이 정도의 작은 고을을 다스리면서 뭐 그리 거창한 ‘예악(禮樂)’을 펼치냐는 힐난 같았다.
 자유가 이 대목에서 발끈한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가르쳐주시기를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아끼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쉬운 사람으로 변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자유는 고을 사람들에게 음악과 예의를 가르침으로써 선생의 높은 뜻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스승이 뜻밖에 ‘닭잡는데 소잡는 칼’ 운운하자 납득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공자는 제자들에게 “앞의 말은 취소”라며 뱉은 말을 주워담으려 했다. 사실 공자가 아주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제자가 거창한 예약을 가르치는 것을 두고 ‘좀 과한 통치가 아니냐’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가르침대로 제대로 백성을 다스리고 있는 제자에게 정말로 농담 한마디를 던졌을 수도 있다. 어찌됐던 후세의 사람들은 근엄한 스승인 ‘공자의 유일한 농담’으로 이 때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상상이 간다. 농담 따위와는 거리가 먼 근엄한 공자님께서 뜬금없이 ‘썰렁한 농담’을 던졌으니…. 자유는 스승의 ‘썰렁개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울컥’ 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당황한 스승이 쩔쩔매며 “네 말이 맞다. 농담이다”라며 진화에 나섰을 것이고….   
 
 ■농담의 끝판왕
 ‘농담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다. 바로 주나라의 두번째 왕인 성왕(재위 기원전 1042~1021년)이다.
 알려진대로 은(상)을 멸하고 주나라, 즉 서주를 세운 이는 주 무왕이었다. 하지만 창업의 스트레스가 컸을까. 무왕은 천하를 통일한 지 불과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무왕의 뒤를 이어 강보에 싸인 갓난 태자 송(誦)이 즉위했다. 이 사람이 성왕이다. 성왕의 나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삼촌인 주공(周公)이 7년간 섭정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 성왕이 역시 코흘리개 동생인 우(虞)와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다. 성왕은 재미있게 놀다가 오동나무로 규(珪)를 만들어 우(虞)에게 주며 말했다. ‘규(珪)’는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하사했던 신표였다.
 “네 너를 당(唐)지역에 봉하노라.”
 마침 삼촌인 주공이 ‘당’이라는 소국에 발생한 난을 평정하고 주나라 땅으로 편입시켰던 때였다. 동생과 소꿉놀이를 하던 성왕은 장난으로 ‘당’나라를 주겠노라고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꿉놀이가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졌다. 곁에서 천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던 사일(史佚·사관의 이름)이 득달같이 나서 고했다.
 “자, 빨리 책봉의 날을 고르십시오. 우(虞)를 당나라에 봉해야 합니다.” 

진나라 제후의 청동궤짝과 명문. 진나라는 중원과 북방의 문화를 적절하게 혼합, 중원의 패자로 부상했다.|시공사 제공  

어린 성왕은 사관의 말에 뜨악했다.
 “아니 과, 과인은 그저 농담으로 한 말인데….(吾與之희耳)”
 사관의 반응은 싸늘했다.
 “천자는 농담을 해서는 안됩니다.(天子無희言) 천자가 말씀하시면 사관은 곧 그것을 기록하고 예의로써 그 말씀을 완성하며 음악으로 그것을 노래하옵니다.(言則史書之 禮成之 樂歌之)”
 성왕은 꼼짝없이 동생을 당나라 땅에 봉해야 했다.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서남부, 즉 황하와 분하(汾河)의 동쪽에 있으며, 100리나 되는 넓은 곳이었다. 성왕의 동생인 우가 세운 나라가 바로 춘추시대 진(晋)나라였다. 진나라를 일컬어 흔히 ‘중원’이라 할만큼 중국의 중심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춘추시대의 최강국이었다. 훗날(기원전 353년)에는 조·한·위나라 등 삼진(三晋)으로 나뉘었으며, 이 때부터 중국역사는 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어쨌든 춘추시대를 주름잡았던 진(晋)은 이렇게 철없던 천자의 ‘소꿉놀이 농담 한마디’로 건국됐던 것이다. 그러니 ‘농담의 끝판왕’이라 할 수밖에 없다. 

 

 ■피바람을 부른 농담
 한나라 고조 유방의 ‘피바람 농담’도 유명하다.
 한고조 유방의 조강지처이자 정부인은 여걸의 풍모가 빛나는 여태후였다. 그런데 고조에게는 따로 총애하는 후궁이 있었다, 척부인이었다.
 고조는 여태후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효혜제)이 자신과 닮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척부인이 낳은 아들 여의를 예뻐했다. 고조는 늘 척부인과 여의만 감싸고 돌았고, 출정 때마다 데려고 다녔다. 고조는 이미 태자로 책봉된 효혜제를 폐위시킬 궁리만 했고, 척부인도 밤낮으로 고조 앞에서 울면서 ‘내 아들을 태자로 세워달라’고 매달렸다. 급기야 기원전 198년, 고조가 태자를 바꿀 결심을 하고는 태자태부인 숙손통에게 농담을 칭하면서 그 뜻을 넌즈시 전했다.
 그러자 숙손통은 그것이 농담거리가 되냐는 듯 “저의 목을 쳐서 그 목에서 나오는 피로 이 땅을 더럽히겠다”며 죽음을 무릅쓴 간언을 올린다.
 “예전에 진(晋)나라의 헌공은 애첩 여희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기존의 태자를 폐위시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진(秦)나라는 어떻습니까. 시황제는 맏아들(부소)을 태자로 정하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망쳤습니다. 또한 폐하께서는 어려울 때 고생하신 조강지처를 버리시다니오. 새 태자를 세우시려면 저를 죽이시고….”
 숙손통의 반발이 예상보다 더 거칠자 고조는 당황해서 쩔쩔 맸다.
 “경은 그만하라! 난 단지 농담한 것 뿐이다.”
 숙손통은 고조를 더 닦달했다.
 “어찌 천하를 가지고 농담할 수 있단 말입니까. 태자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흔들리면 천하가 진동합니다.”
 고조는 숙손통 외에도 최측근이자 책사인 장량까지 가세한 거센 반발에 밀려 ‘농담을 빙자한’ 태자 교체의 속내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고조가 던진 ‘헛된 농담’은 무시무시한 피바람을 불렀다.
 이 사건으로 앙심을 품은 여태후는 고조의 사후, 헛된 꿈을 꾼 척부인과 여의에게 잔인하게 복수한다. 여의를 독살한 뒤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고 귀를 태운 뒤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였다.
 그런 뒤 돼지우리에 던져넣고는 사람들에게 ‘사람돼지(人체)’라 부르도록 했다. ‘농담’의 결과는 이처럼 참담했다.    

공자가 제자를 시켜 밭을 갈고 있던 은자에게 나루터를 묻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제자들에게 예악을 실행하라고 강조해온 공자는 작은 고을을 이상향으로 만든 제자 자유에게 한마디 농을 걸었다가 진땀을 흘렸다.  

■술자리 농담은 인사발령이었다
 1503년(연산군 9년) 11월22일, 정승들이 모여 임금(연산군)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한다.
 전날 밤, 창경궁 내전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임금과 대신들이 격의없이 대취한 것을 ‘복기’하면서, ‘술자리 무용담’을 반추하는 자리였다.
 “전하께서 호피(虎皮)에 어의(御衣)까지 하사해서 입히시매 신이 취한 줄도 몰랐사옵니다.”(영의정 성준)
 “전하께서 하사하신 어의를 오늘 아침에야 보니 신이 토한 흔적이 있었사옵니다. 만번 죽어도 마땅한 죄입니다.”(좌의정 이극균)
 “신까지 벗어 하사하시고, 지근거리까지 들게 하시니 성상의 은총이….(참의 한형윤)   
 “괜찮다. 어제 과음해서 취한 뒤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구나.”(연산군)
 임금와 대신들이 만취해서 필름이 끊어지고, 임금이 하사한 어의에까지 ‘오바이트’했던…. 임금이 스스로 북을 쳐 노래하고, 더러는 손으로 사모를 벗겨 머리털을 움켜쥐고 희롱하며 욕보이는…. 임금와 신하간 예절을 차리지 않은 ‘광란’의 술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나도 필름이 끊어져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쿨하게 넘긴다. 연산군은 되레 스스로를 탓한다.
 “어제 과음해서 실수했으니 인군의 패덕이 이보다 더할 수 없고 역사를 더럽힌 것이 이보다 더할 것이 없으리라. 대신들 보기 부끄럽다.”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던 연산군은 성준에게 호초(胡椒·후추나무) 한자루, 한형윤에게 옥관자(玉貫子·옥으로 만든 망건의 부속품) 하나를 각각 하사한다.  

연산군이 대신들과의 격의없는 술자리를 벌이면서 몇몇 신하들에게 승진을 약속한 뒤 그 약속을 지켰다는 내용을 기록한 <연산군일기>. 

“어젯밤 과인이 취중에 한 약속이지만 어길 수 없구나.”
 또 있었다. 연산군은 그 옛날 주 성왕과 동생의 ‘동엽작희(桐葉作희)’ 고사, 즉 오동나무잎으로 농담삼아 작위를 주었다는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과인이 어젯밤 취중에 김감(金勘)의 품계를 올려 지성균관사(성균관의 정2품)를 시켜준다고 했지. 또 한형윤을 이조참판으로 삼는다고 약속했지? 어젯밤 약속대로 그렇게 임명토록 하겠다. (주 성왕의 고사처럼) 임금의 약속을 ‘없는 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아니냐.”
 대신들이 “어찌 군신간에 허구헌날 엄하고 공경하는 모습만 보이겠느냐”며 임금을 다독거리면서 “두 사람의 임명에도 하자가 전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술자리 농담’이 진담으로 변했던 재미있는 일화가 아닌가. 아니 연산군은 농담을 빙자한 ‘취중진담’으로 인사발령을 낸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 거창한 고사를 들추지 않더라도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나 말 한마디의 무게가 보통이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오늘도 이런 반성을 해본다.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농지거리’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가. 거꾸로 한낱 농담으로 던졌던 다른 이의 말에 공연히 정색하고 화를 벌컥 낸 것은 아닌가. 그야말로 농담은 농담일 뿐인데?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