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동주산성(해발 360m)에 서면 철책너머 저 까마득한 북쪽에 지평선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둑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군사분계선 너머 갈 수 없는 땅, 그곳이 바로 평강고원이다. 야트막한 봉우리 두 개가 여렴풋 하고, 그 너머엔 제법 거대한 산 하나(장암산·해발 1052m)가 버티고 있다.
산인지, 혹은 고지인지 모를 두 봉우리 중 하나는 낙타고지(432.3m)요, 또 하나는 오리산(453m)이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낙타고지는 그렇다치고, 여기서는 오리산(鴨山)을 주목하자.
■아! 평강고원
왜냐? 이 야트막한 오리산과 그 너머 검불랑(680m)은 지금도 내부에서는 끓고 있는 휴화산이다. 인류가 처음 등장했던 4기 홍적세(200만년~1만 년 전) 때 이 오리산과 검불랑에서 최소한 11차례나 뜨거운 마그마를 분출한다. 그런데 오리산·검불랑의 화산분출은 흔히 화산분출이라 생각나는 거대한 폭발, 즉 증기와 용암이 폭발하는 ‘중심분출’이 아니었다, 벌어진 지각 틈에서 마그마가 꿀렁꿀렁 흘러나오는 ‘열하(熱하)분출’이었다. 이 열하분출의 경우 주로 점성이 약한 현무암질 마그마가 흘러
나오게 된다. 따라서 백두산이나 한라산 같은 거대한 화산체는 형성되지 않는다. 다만 흐르는 용암이 거대한 평원을 이루게 된다.
화산인 오리산 정상의 분화구가 주변보다 140m밖에 높지 않은 이유가 된다. 각설하고 오리산과 검불랑에서 꾸역꾸역 11차례나 분출한 용암은 평강과 철원, 이천, 김화, 회양 등을 뒤덮는다. 이들 지역은 2억평(650㎢)에 달하는 거대한 평원이 된다. 용암분출의 진원지인 오리산과 가까운 지역, 즉 평강의 현무암층이 가장 두꺼워졌다. 이것이 바로 평강의 해발(330m)이 철원(220m)보다 높아 ‘평강고원’으로 일컫는 이유가 된다. 그러니 철원 동주산성에서 바라본 평강은 거대한 둑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뜬금없이 화산폭발은 무엇이고, 평강고원은 무엇인가. ‘원자폭탄의 불바다’가 한반도에서 가장 뜨겁고 민감한 이곳 평강고원을 강타할 뻔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필요하다면 핵무기도…’
때는 바야흐로 1950년 11월30일, 미 트루먼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어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낸다.
“군사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모든 행동을 취할 겁니다.”
기자들이 “그 모든 행동에는 원자탄도 포함돼느냐”(<뉴욕데일리 뉴스>의 젝 도터 기자)고 묻자 트루먼은 “우리가 보유하는 모든 무기가 포함된다”고 응수했다.
“핵무기 사용에 대해선 항상 적극적인 고려가 있었습니다.”(트루먼)
한반도에 원자폭탄을 터뜨린다? 그야말로 엄청난 발언이었다. 한국전쟁 승리를 눈앞에 두었던 미국이 중국군의 ‘뜻밖 개입’으로 후퇴를 거듭하자 ‘핵무기’ 카드를 만지작 거린 것이다.
사실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은 중국의 대규모 참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파죽지세로 북진한 유엔군은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라는 구호를 흥얼거리며 승전무드에 도취돼 있었다.
그러나 신생국 중국은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 호파즉당위(戶破則堂危)’, 즉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고, 바깥문이 망가지면 안채가 위태롭기 때문에 나선다’는 구호를 외치며 개입을 결정한다.
10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국경을 넘어오기 시작한 중국군은 11월까지 30만명에 육박했다. 유엔군은 산악지대를 이용한 야간행군으로 남하하는 중국군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유엔군은 뿔피리와 나발을 불고 꽹과리를 치면서 밀집대형으로 전진하는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혼비백산했다. 트루먼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던 11월30~12월1일 사이 유엔군의 인명피해는 1만1000여 명에 이르렀다.
미국 언론은 잇단 패전에 절망감을 드러냈다. ‘진주만 이래 미국의 가장 큰 참패’(<뉴스위크>)이며, ‘패전-미국이 겪었던 것 중 가장 비참한 참패’(<타임>)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잖아도 한국전쟁 개전 때부터 핵무기 사용 여부를 연구해왔던 미국으로서는 특단의 조치를 고려하게 됐다. 트루먼이 기자회견을 열기 불과 이틀 전인 11월28일, 랄로 합동참모본부 국장이 합동전략조사위원회에 “사용할 수 있는 원자폭탄의 숫자와 표적지, 수송 등’ 고려할 수 있는 사항을 검토해달라”고 요구한다. 이튿날인 29일 합동전략조사위는 “유엔군이 한국에서 압도되는 것을 목기 위해 핵무기의 운영이 필요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전망하고, “결심은 최고위층이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30일 발언은 바로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3차대전을 원하는가’
그런데 트루먼의 ‘핵무기 발언’은 동맹국들에게도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벌집을 쑤셔놓은 것이다. 원자폭탄 사용은 소련을 자극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제3차세계대전으로 확전될 수도 있지 않은가.
유럽언론은 ‘충격과 분노(Shock and outrage)’라는 표현을 쓰면서 워싱턴을 맹비난했다.
영국의 집권 노동당 의원 100명은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에게 ‘어떤 경우든 핵무기 사용은 반대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서유럽 대사들은 앞다퉈 미국의 워렌 오스틴 유엔대사를 찾아갔으며, 네덜란드 대사는 눈물까지 머금으면서 트루먼 발언을 비난했다.
“미국이 매우 어렵고 불리한 시기에 아시아에서 일어난 전쟁을 서유럽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급기야 애틀리 영국총리와 트루먼 미 대통령 간 긴급회담이 결정됐다. 애틀리는 ‘원자폭탄 사용 반대’라는 비공산권 국가들의 총의를 모아 트루먼과의 회담에서 관철시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됐다.
프랑스 르네 플레망 총리와 로베르 슈망 외무장관이 급거 영국을 방문했다. 인도의 네루 총리는 “한국전쟁에 대만을 참전시키거나 원자폭탄을 사용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극우친미 성향이던 호주의 퍼시 스펜더 외무장관 조차도 “핵무기는 완전한 합의를 거친 후에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12월4일부터 열린 애틀리-트루먼의 역사적인 회담은 ‘핵무기가 사용될 작전사항이라면 언제든 영국 총리에게 미리 알린다”는 구두합의로 마무리된 것이다. 이로써 트루먼의 원자폭탄 사용발언은 엄청난 충격파를 던진채 10일 만에 일단락된 것 같았다.
■원자탄의 유혹
하지만 ‘잘하면’ 한방에 전쟁을 끝낼 수도 있지 않는가. 게다가 미국의 원자폭탄 전력(369개·1950년 말 현재)은 소련(5개 정도)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달콤한 유혹 때무에 미국은 전쟁 내내 ‘원자탄 카드’를 만지작 만지작거렸다. 트루먼은 ‘1951년 4월부터 10월까지’ 원자폭탄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소련의 대규모 군사개입 가능성을 개진한 정보보고서가 올라왔고, 중국이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만주지역에 집결시킨 때였다. 4월5일 미 함참은 새로운 대규모 중국군 병력이 전선에 투입되거나, 또는 소련전투기들이 유엔군을 공습할 경우 즉각 원자폭탄으로 보복공격할 것을 결정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9개의 원자탄을 괌으로 이관시켜달라는 미 합참의 요청을 승인했다. 이로써 1945년 이후 처음으로 원자탄이 해외로 배치됐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 때 트루먼은 ‘중국군과 북한군의 목표물’에 ‘마크-4’ 원자탄을 투하하는 명령서에 사인했다”고 했다.
1951년 7월10일부터 시작된 정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질 때마다 역시 원자폭탄 카드를 꺼내려 했다. 9~10월에는 B-29전폭기가 원폭투하 모의 출격을 위해 북한상공에 나타나 모조핵탄두와 대형 TNT 폭탄을 투하했다. 대도시나 산업기지에 투하하는 ‘전략목표’로서가 아니라, 전쟁터에 투하하는 이른바 ‘전술목표’로서 핵무기 사용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허드슨 하버(Operation Hudson Harber)’라는 이름의 이 작전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중국군과 북한군의 대규모 병력을 식별하는데 필요한 대응시간이 부족하다는 기술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만약 진짜 터졌다면
1951년 9월15일 미 국방부는 극동군사령부와 협의 끝에 ‘지상군 근접지원 핵무기 긴급사용(Emergency Use of Atomic Bombs in Close Supports)’을 수립했다.
그러면서 원폭의 투하목표를 나타낸 지도를 첨부했다. ‘핵무기 공격을 위한 가상표적(Hypothetical Target under Consideration for Attack by Atomic Weapons)’은 바로 강원도 평강고원이었다.
이 기밀문서는 일본 릿쿄대(立敎大) 아라 다카시 교수가 워싱턴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된 극동군 문서철에서 찾아냈다. 기밀문서에 따르면 평강지역에 투하할 원자탄의 규모는 40㏏이었다. 이것은 2차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2~3배 되는 것이다.
1951년 9월15일이면 미국이 ‘허드슨 하버’ 작전, 즉 원자폭탄의 전술적인 사용을 적극 고려했던 때였다. 9~10월 사이 미국은 ‘전술적인’ 핵무기 사용의 가치를 판단하려고 B-29를 통한 ‘투하 모의훈련’을 한창 벌였던…. 그런데 ‘만약’ 실제로 이 표적에 원자탄이 떨어졌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재앙이다. 더구나 평강지역에는 휴화산이 두 개나 있다. ‘만에 하나’ 핵폭탄이 잠자고 있던 휴화산을 깨웠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무리 ‘만에 하나’라는 가정이라도 몸서리 쳐진다. 결국 미국의 모든 핵무기 투하계획은 끝내 ‘숨겨놓은 카드’로 남았다. 원자폭탄의 사용이 ‘너무 위험한 도박’이었기 때문이었다.
트루먼은 훗날 “2500만의 무고한 비전투요원들을 희생시킬 수 없었고, 전쟁을 세계대전으로 확전시킬 의도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트루먼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이어 3번째로 원폭투하를 결정한 지도자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피했던 것이다. 핵무기를 잘못 투하할 경우 소련의 자동 개입을 불러올 수 있었다. 이는 제3차대전의 개막을 뜻하는 것이었기에 차마 실행에 옮길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하나 원래 핵무기는 도시나 산업지역 등을 공격하는 전략폭격의 용도로 쓰였다. 하지만 북한이나 만주에는 핵무기를 투하할 전략적인 목표가 부족했다. 만약 원자폭탄을 터뜨렸는데도 소기의 전과를 올리지 못할 경우 핵무기의 위신은 크게 추락하는 것이다. 그 경우 유럽 대륙에서 소련에 위협을 줄만한 결정적인 무기를 잃게 되는 것이다.
■김일성의 공포
어쨌든 한국전쟁 내내 미국이 핵카드를 만지작거리자 북한 김일성은 극도의 공포심을 피력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만일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면 끝장”이라고 했단다. 핵의 공포 속에서 간신히 전쟁을 끝낸 북한은 자체적인 핵개발에 나섰다.
1955년 4월 원자 및 핵물리학연구소를 설치했고, 과학자들을 소련의 다국적 연합핵연구소에 유학시켰다. 1962년에는 소련으로부터 IRT-2000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기도 했다.
북한을 더욱 압박한 것은 1950년대 말 전술핵무기의 남한 배치였다. 이후 북한은 중국과 소련에 핵개발 지원을 끈질기게 요청했다. 비록 번번이 거절당했지만….
북한이 1960년대부터 의 ‘전 국토의 요새화’ 작업에 전력을 기울이는데, 김일성은 지하갱도를 구축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단다.
“온 나라를 요새화함으로써 원자탄 없이도 원자탄을 가진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북한은 또 1960년대부터 재래식 병력을 휴전선 부근에 전진배치시킨 까닭도 ‘핵공포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저명한 북한문제전문가 셀리그 해리슨은 그것을 ‘적을 껴앉는 전략(Hugging-the enemy)’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논개작전’이라 할 수 있다. 즉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북한군 뿐 아니라 더욱 가깝게 배치될 수밖에 없는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민간인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도록 전진배치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공포가 상상을 초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유진석, <핵억지 형성기 최초의 전쟁으로서 6·25전쟁과 미국의 핵전략>, ‘한국과 국제정치’ 제27권2호 통권 73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2011
조지프 굴든, <한국전쟁>, 김쾌상 옮김, 일월총서 8, 일월서각, 1982
월리엄 스톡, <한국전쟁의 국제사>, 김형인·김남균·조성규·김재민 공역, 푸른역사, 1995
아카기 간지, <핵무기와 6·25전쟁>, ‘일본의 6·25전쟁 연구’, 이종판 역, 서상문 편집,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정성화, <미국의 대소 핵정책:트루먼, 아이젠하워 시대>, ‘미국사 연구 9’, 한국미국사협회, 1999
이기환, <분단의 섬-민통선>, 책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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