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외놈(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외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없이 소용있냐.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구한말 시아버지(유홍석 의병장)을 따라 독립운동에 나선 여성의병장 윤희순 선생(1860~1935)이 지은 의병가 ‘안사람 의병가’ 가사의 일부이다. 시아버지인 유홍석 의병장이 짓고 윤희순 선생이 필사해서 보급했다는 ‘안사람 의병가 노래’도 남아 있다.
“…내집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지 하여보세.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찾기 운동이요, 왜놈들을 잡는거니 의복버선 손질하여 만져주세. 의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게 안윽하게 만져주세…”라는 가사다.
윤희순의 <의병가사집> 중 ‘오랑캐들아 경고한다’는 주제의 격문. ‘조선의 안사람들도 의병을 할 것이며, 마적떼 오랑캐인 왜놈들은 좋은 말로 할 때 용서를 빌고 가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문화재청 제공
물론 ‘안사람 의병가’나 ‘안사람 의병가 노래’ 모두 당대 가사만 전담했던 여성들의 구국운동을 일깨우고 의병활동을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안사람 의병가’가 쉽게 각인될 수 있는 단어의 반복과 강조를 동원한 감성적인 설득을 통해 선동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문화재청은 11일 윤희순 선생이 의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지은 낱장의 친필가사를 절첩의 형태로 붙인 순한글 가사집인 윤희순 <의병가사집>을 등록문화재로 등록예고했다.
국내의병 15년, 해외독립운동 25년의 성상을 쌓은 윤희순 선생은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이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 강행 등으로 전국적인 민중저항이 벌어졌다. 이것이 을미의병이다.
여성독립투사 윤희순 선생이 지은 의병가들. ‘의병군가’와 ‘병정노래’ 등이다. 의병군가는 나라없이 살 수 없음을 강조하며 의병활동을 독려하고, 나라찾아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희망과 왜놈을 잡아 임금 앞에 꿇어앉혀 분을 풀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때 시아버지 유홍석(1841~1913)을 비롯한 가문이 의병활동에 뛰어들자 당시 36살이던 윤희순 선생도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시아버지와 남편이 이끄는 의병을 도왔다. 이때 윤희순 선생은 ‘안사람의병가’와 ‘애달픈 소리’, ‘방어장’, ‘병정노래’, ‘의병군가 1·2’, ‘오랑캐들아 경고한다’, ‘왜놈앞잡이들은’, ‘금수들아 받아보거라’, ‘병정노래’ 등 다수의 격문과 의병가를 지었다.
“우리 조선 청년들아 의병하러 나라찾자…이 나라와 살자면 원수같은 왜놈들을 몰아내어 우리집을 지켜가세…우리 조선사람 농락하며 안사람들 농락하며 민비를 살해하니 우리인들 살 수 있나. 빨리나와 의병하세.”(‘방어장’)
윈수같은 왜놈들이 조선사람과 그 안사람을 농락하고 민비까지 살해했으니 궐기하자는 내용이다.
“…우리나라 좀벌레 같은 놈들아. 어디가서 살 수 없어 오랑캐가 좋단 말인가. 오랑캐를 잡자하니 내사람을 잡겠구나. 죽더라도 서러워하지 마라. 우리 의병은 금수를 잡는 것이다…”(‘병정노래’)
‘안사람 의병가 노래’와 ‘병정가’. ‘안사람 의병가 노래’는 남녀 가릴 것 없이 의병활동을 하도록 권면하면서 여성들이 구체적으로 해야할 행동지침을 담고 있다. ‘병정가’의 가사는 ‘오랑캐’는 후대에까지 왜놈들을 잡아 살과 뼈를 깎아내겠다고 다짐한 내용이다. ‘안사람병정가‘는 시아버지 유홍석의 글을 윤희순 선생이 필사해서 의병활동 홍보에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문화재청 제공
이 노래는 왜놈에 붙어서 일본을 이롭게 하는 자들을 ‘좀벌레 같은 놈들‘이라고 욕하고 그런 병정들은 죽더라도 원망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나라없이 살 수 없네. 나라 살려 살아보세…조상없이 살 수 없네, 조상살려 살아보세. 살 수 없다 한탄 말고 나라찾아 살아보세…’(‘의병군가’)처럼 아주 단순하고 운율있는 가사를 만든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느이 왜놈들 그렇지않아도 잔나비 꾀 여우 같은 놈들인 줄은 내 진작부터 알았다만 우리 조선 사람 화가나면 황소 호랑이 이니라. 우리가 느이 놈들 못잡으면 우해에도 못잡을 손가’(‘왜놈대장 보거라’)
‘원수같은 왜놈들아. 느이 놈들 잡어다가 살을 갈고 뼈를 갈아 조상님께 분을 푸세.’(‘병정가’)
당대의 여성이 썼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전투적인 가사내용으로 의병운동을 독려하고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 조선말부터 대한제국기의 역사가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매천 황현(1855~1910)이 1864년 대원군 집정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약 47년간의 역사 등을 기록한 친필 원본 7책이다.|문화재청 제공
윤희순 선생이 지은 ‘오랑캐들아 경고한다’는 격문 또한 흥미롭다.
“…너희 놈들이…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이 마적떼 오랑캐야. 좋은 말로 할 때 용서를 빌고 가거라. 이 오랑캐야. 대장놈들아.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
격문 중에 “좋은 말로 할때 용서를 빌고 가라”는 경고 메시지가 재미있다.
윤희순 선생은 의병운동을 독려하는 격문과 의병가를 짓고 보급하는 역할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고종이 장제 퇴위되고 정미 7조약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다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윤희순 선생은 30여명으로 구성된 이른바 ‘안사람 의병단’를 조직했다.
‘안사람 의병단’는 남자 의병들의 식사나 빨래를 돕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강원 춘천 여우내 골짜기에서 고된 훈련을 받았다.
황현의 <오하기문>. <매천야록>의 초고로 추정된다. 19세기 후반~1910년까지의 역사적 사실과 의병항쟁 등을 비롯한 항일활동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문화재청 제공
‘안사람 의병단’은 심지어 화약 만드는 일까지 뒷바라지 했고, 군자금 355냥까지 거두었다. 한일합병 이후인 1911년 온 가족은 물론 다른 의병가족 수십 가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윤희순 선생은 시아버지를 도와 민족해방운동을 펼쳤다.
윤희순 선생의 나이 52살 때였다. 윤 선생은 이후 1912년 노학당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학생들을 직접 모집한 뒤 학생들을 가르쳤다.
윤선생은 이때 학교까지 25㎞ 거리를 매일 걸어다니면서 학생들에게 항일독립운동을 고취시켰다. 이 학교는 1915년 폐교될 때까지 50여명의 반일애국자를 키워냈다.
중국 생활 도중 시아버지(1913년)와 시동생(유재열·1914년), 그리고 남편(유제원·1915년)까지 잃었다. 윤희순 선생은 이후 아들인 유돈상(1894~1935)과 함께 3대 독립운동을 지탱했다. 아들 유돈상은 만주와 몽골, 그리고 중국 중원으로 뿔뿔이 흩어진 의병의 후손과 문인 등을 규합해서 180여명으로 구성된 조선독립단을 조직했다.
이때 윤희순 선생은 이들의 친인척 20여명으로 구성된 가족부대를 결성해서 통신업락업무와 모금활동, 정보수집, 군사훈련 등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윤희순 선생은 조선인 뿐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의병가사를 보급시키며 연설로 한국과 중국의 연합 필요성을 역설했다.
“저는 천하에 무서울 게 없습니다. 천번을 넘어지면 만번을 일어서겠습니다. 우리가 중국에 온 것은 일본 놈들한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강철같던 윤희순 선생도 결국 중국독립운동을 펼치던 아들(유돈상)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자(1935년 7월19일) 무너지고 말았다.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윤희순 선생도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한사람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윤선생은 아들이 순국한지 불과 11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윤희순 선생이 중국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며 이국 땅에서 겪은 고통과 설움, 의병들의 고생과 처지, 그리고 고향으로 가고픈 애달픈 사연을 담은 ‘신세타령’이 심금을 울린다.
“이 내 몸도 슬프련만 의리 의병 불쌍하다…왜놈들이 득세하니 배고픈들 먹을 수 있나 춥다한들 춥다고 할 수 있나. 내 땅 없는 설움이란 이렇게 서러울까…이역만리 찬바람에 발자국마다 얼음이요. 발끝마다 백서리 맺고 눈썹마다 얼음이, 수염마다 고드름이 달렸다…불쌍하다. 불쌍하다. 물을 잃은 기러기가 물을 보고 찾아가니, 맑은 물이 흙탕이요. 까마귀가 앉았구나…”
윤희순 선생의 ‘신세한탄’은 이렇게 끝난다. “방울방울 눈물이라. 맺히나니 한이로다.”
문화재청은 윤희순의 <의병가사집> 등 항일독립유산 5건과, <매천야록> 등 경술국치 직후 순절한 매천 황현과 관련 있는 문화유산 4건, ‘서울 한양대학교 구 본관’ 등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고, ‘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 문화재(등록문화재 제 774호)로 등록했다.
<매천야록>은 조선말부터 대한제국기의 역사가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매천 황현(1855~1910)이 1864년 대원군 집정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약 47년간의 역사 등을 기록한 친필 원본 7책이다. <오하기문(梧下記聞)>은 <매천야록>의 초고로 추정된다. 19세기 후반~1910년까지의 역사적 사실과 의병항쟁 등을 비롯한 항일활동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오하기문’이란 표제는 황현이 거처한 정원에 오동나무를 일컫는다. 매천 황현 시문, 관련 유묵과 자료첩·교지·시권·백패통 등도 문화재가 된다. ‘한말삼재(韓末三才)’, ‘호남삼걸(湖南三傑)’ 등으로 이름을 알린 황현의 시는 우국충절의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이 깊이 투영된 구국애민의 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대 제일의 문장가들과 교유한 서간, 신문기사 모음 등을 통해 19세기 말~20세기 초 사이 국가적 위기와 사회 상황, 지식인들의 동향을 살필 수 있는 희귀한 자료이다. <대월헌절필첩>은 황현이 1910년 8월 경술국치 다음 달인 9월에 지은 절명시(絶命詩) 4수가 담겨있는 첩이다. 서간과 상량문 등도 포함되어 있다. 황현은 절명시를 남기고 사랑채였던 대월헌(待月軒)에서 순절했다.
‘서울 한양대학교 구 본관’은 한국전쟁 직후, 한양대학교 캠퍼스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1956년 대학 본부로 처음 건립되었다. 외관을 석재로 마감하고 정면 중앙부에 열주랑(列柱廊·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다수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세우는 등 당시 대학 본관건물에서 볼 수 있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디자인 요소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국내에서 유일하게 공학을 모태로 성장한 대학인 한양대의 역사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편 이번에 등록문화재가 된 ‘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는 1964년 건축가 최창규가 설계한 건물이다. 옛 공군사관학교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급경사로 디자인된 지붕형태와 수직성을 강조한 내부 공간 등이 당시 일반적인 교회건축의 형식에서 벗어난 독특한 건축기법으로서 의미가 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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