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은 3000년도 넘은 속담입니다. ‘여자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핑계입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어땠습니까. 최초의 여성지도자인 선덕여왕을 두고 “아녀자가 정치를 하다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고 비난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당장 파면당해도 시원치않을 지독한 ‘여혐발언’입니다. 그러나 김부식은 옛날 남자라 칩시다. 요즘도 걸핏하면 ‘여자탓’하고, 툭하면 ‘여자가~’하는 못난 남자들이 곧잘 보입니다.
최근들어 브렉시트 후유증과 글로벌 경제 침체, 테러 다발 등 혼란에 빠진 지구촌을 지켜낼 구원투수들이 등장했다는 기사가 봇물을 이룹니다. 그 구원투수들은 바로 여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어지럽힌 쓰레기는 여자나 나서서 치운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 여전히 여자니 남자니 하는 편가르기의 속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성이 어지러운 세상을 깔끔하게 정리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90회 주제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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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호(왕비)가 아이를 낳으려 합니다. 아들일까요?(婦好娩 嘉)”
“정(丁)일에 낳으면 길(吉)하니 아들일 것이다.(申娩吉 嘉)”
“(하지만) 갑인일에 아이를 낳았다.(甲寅娩) 길하지 않았다. 딸이었다.(不吉 女)”
■ 아들은 길하고, 딸은 불길하다.
은(상)나라 중흥군주인 무정(武丁·재위 기원전 1250~1192)이 거느린 왕비는 64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법정 배우자는 3명이었는데, 부호는 바로 2번째 왕비였다. 부호의 출산이 임박하자 조정은 점(占)을 쳤다. 태어날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를 물었다. 가)나)다)는 점을 치고, 그 결과를 적은 갑골문의 내용이다.
무정왕은 아들을 어지간히 바랐지만, 결국 출산날짜를 맞추지 못하는 바람에 딸을 낳았음을 알 수 있다.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갑골의 내용을 보면 아들을 낳으면 ‘길(吉)’하고, ‘기쁘다’는 뜻의 ‘가(嘉)’로 표현했다. 반면 딸은 ‘불길(不吉)’하고 ‘기쁘지 않다(不嘉)’라 했다.
즉 점을 친 결과, ‘길’하면 아들을 낳아, 매우 기쁘지만 ‘불길’하면 딸을 낳고, 재수 없다는 뜻이다. 남아선호, 남녀차별의 뿌리는 이처럼 깊다.
■ 은(상) 시조설화에 숨은 뜻
은(상)나라(기원전 1600~1046) 시조설화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은(상)의 시조인 설(설)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었다. 간적은 강가에서 놀다가 새(현조·玄鳥)의 알을 주워 삼킨 뒤 설을 낳았다. <시경>은 이를 두고 “하늘이 현조에게 명하여 내려와 상(商)을 낳았다(天命玄鳥 降而生商)”고 했다. 여기서 ‘알을 삼켜 낳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뜻이다.
이를 두고 역사가들은 “이 시조설화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임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간적’은 모계 씨족사회의 마지막 여성지도자이며, ‘설’은 부계사회의 시조라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은(상)의 시대는 청동기가 극성기를 이뤘던 때였다. 강력한 신권과 왕권이 공존했고, 아들이 왕위를 세습하기 시작했다. 자연 남녀차별의 풍조가 퍼졌을 것이다.
■ “암탉이 울면 집이 망한다”
이같은 딸은 ‘불길, 불행의 씨앗’이라는 전통은 계속 이어진다. 한비자(韓非子·기원전 280?∼233)는 “아들을 낳으면 서로 축하하고. 딸을 낳으면 죽였다”고 증언했다. 오죽했으면 성인이라는 공자(孔子)도 “여자와 소인은 길들이기 힘들다.(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고 했을까. 그 이유가 기막히다.
“가까이 하면 버릇없이 굴고 멀리하면 원망하기 때문이다.(近之則不遜 遠之則怨)”(<논어> ‘양화’)
루쉰(魯迅·1881~1936)은 훗날 “공자가 말한 여자 속에는 그의 어머니도 있을까”하고 비아냥 댔다.
망국의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는 ‘몰염치’도 서슴지 않는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 대표적이다. 은(상)의 마지막 군주(주왕)을 치면서 출사표를 던진다.
“옛말에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이 망한다’고 했소이다.(牝鷄之晨 惟家之索) 은 왕은 부인의 말만 듣고 선조에게 드리는 제사를 그만두고 나라를 어지럽혔소.”
여기서 주왕의 부인은 ‘희대의 요부(妖婦)’라는 ‘달기(己)’를 일컫는다. 주왕은 달기를 위해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어 벌거벗은 남녀들을 풀어놓았다. 또 불 위에 기름기둥을 걸어놓고는 죄수들에게 걷게 했다. 그들이 미끌어져 떨어지는 모습을 즐긴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포락형(포烙刑)’이다.
사실 나라를 망친 장본인은 주왕 그 사람이다. 그런데도 주 무왕은 애꿎은 달기에게 책임을 물어 ‘암탉 운운’하면서 꾸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아녀자가 왕이 되다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
굳이 중국에서 예를 찾을 필요가 없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신라 선덕여왕의 시대를 일컬어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폄훼했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어찌 아녀자가 안방에서 나와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왕으로 세웠으니 참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男尊而女卑 豈可許 出閨房 斷國家之政事乎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幸也)”(<삼국사기> ‘신라본기·선덕여왕조’)
상대등 비담(毗曇) 등은 “(선덕)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면서 반역을 일으키기도 했다.
신라 35대 경덕왕(742~765)의 ‘아들 타령’은 끔찍했다. 조강지처인 왕비(삼모부인)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궁궐에서 쫓아냈다. 만월부인을 새 왕비로 들였다. 왕은 표훈스님을 불러 “제발 아들이 생기도록 천제에게 빌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천제의 응답은 “딸은 낳을 수 있지만 아들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경덕왕은 “부디 딸을 아들로 바꿔달라”고 재차 간청한다. 그러자 천제는 표훈스님을 통해 “딸을 아들로 바꾸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고 경고한다. 왕은 “그래도 괜찮다”고 고집을 피운다.
천제는 할 수 없이 아들을 내줬다. 그 아들이 바로 혜공왕이다. 하지만 혜공왕이 즉위하자 나라에는 도둑이 들끓었다. 혜공왕은 마침내 반란군에게 살해됐다. 지나친 ‘아들타령’이 나라를 기울게 만든 것이다.
■경국지색의 고사
그런데 역사가들은 “여성의 빼어난 미모가 나라를 기울게 한다”고까지 하면서 또 여성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것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고사이다.
고사(故事)는 한나라 무제 때 나왔다. 당대의 음악가인 이연년이 황제 앞에서 춤을 추며 노래했다.
“북방의 아름다운 여인, 그 미모가 단연 빼어나네.(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눈길 한 번에 성이 기울고 눈길 두 번에 나라가 기우네.(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성과 나라를 기울게 함을 어찌 모를까.(寧不知傾城與傾國)”(<한서>·‘이부인전’>
중국 역사서는 걸핏하면 역대 왕조가 망한 까닭을 이 ‘경국지색’의 탓이라고 돌린다.
주나라 유왕(782~771) 때의 일이다. 유왕이 총애한 여인 중에 포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웃지 않았다. 왕은 여자를 웃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런데 유왕은 전쟁에 대비하여 봉수와 대고(大鼓·큰 북)를 만들었다.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봉화를 올리고 북을 쳐서 제후들을 불러 모으려 한 것이다.
■ 서양도 마찬가지
어느 날 유왕이 봉화를 올렸다. 제후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적군은 오지 않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포사가 깔깔 대며 웃는 것이 아닌가.
유왕은 ‘이거다’ 싶어 그 다음부터 날이면 날마다 거짓봉화를 올렸다. 제후들은 화가 나서 오지 않았다. 그런데 훗날 오랑캐(견융)와 끌어들인 반란이 진짜로 일어났다. 유왕은 다급하게 봉화를 올렸다. 하지만 양치기 소년이 된 유왕을 위해 아무도 오지 않았다. 주나라는 이 때부터 급속도로 쇠락했다.
이밖에도 ‘경국지색’으로 망국의 책임을 돌리는 예는 많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부차(夫差·기원전 496∼473)는 월나라 구천(勾踐·재위 기원전 496∼465)이 바친 서시(西施)라는 여인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 당나라 현종도 양귀비 때문에 현혹되어 나라를 누란의 위기로 빠뜨렸다.
하기야 서양이라고 별 수 없다. 파스칼의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치만 낮았어도’라는 말은 상식이 되었다.
■태평성대는 여성의 몫
그러나 잘못된 역사는 죄다 여성 때문이었을까. 잘난 남성들이 정치를 제대로 했다면 결코 나라를 잃는 수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천하’가 태평성대였던 때도 꽤 있었다.
예컨대 한나라 시조 고조(유방)의 부인인 여태후는 고조가 죽자 어린 천자를 대신하여 정권을 잡았다. 물론 정권을 잡기까지 온갖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특히 고조 생전에 총애를 받던 척부인의 손발을 절단내고, 눈과 귀를 파내 돼지우리에 살게 했다. 그러면서 ‘사람돼지(人체)’라 불렀다. 그런 만행을 저질렀지만 여태후의 시대는 한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태평한 시대로 꼽힌다.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이같은 여태후의 비정한 정치와 정권욕을 맹비난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모든 정치가 안방에서 이뤄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백성들이 농삿일에 힘쓰니 의식이 나날이 풍족해졌다.”(<사기> ‘여태후본기’)
측천무후(재위 690~705)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온갖 간계를 써서 황후가 된 그는 당나라 고종의 건강을 핑계 삼아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문예와 이무(吏務)에 뛰어난 신흥관리를 등용하여 구 귀족층을 배척하였다. 690년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중국 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 15년간 천하를 지배했다. 치세 내내 악랄한 책략과 잔인한 탄압을 가했다.
요승(妖僧) 회의(懷義) 및 장역지 형제와 추문을 남기는 등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과거제의 인원수를 늘려 과거체제의 위상을 높였다. 이같은 획기적인 인재선발 정책은 일반인도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꿈을 불어넣었다.
토지-상업자본-학식이 결합된 지배층의 기반이 과거제를 통해 확립됐다. 이로써 전제왕정의 안정을 기했다. 농업발전에도 힘썼다. 또 당근과 채찍으로 이민족을 다스려서 변방의 안정을 도모했다. 절정의 정치력과 외교력을 발휘한 것이다. 결국 역사가 ‘여자 핑계’를 대는 것은 그야말로 ‘비겁한 변명’이었을 뿐이다.
전세계적으로 여성지도자가 봇물을 이루는 세상. 이제 은(상)의 정인(貞人·점을 주관한 사람)이 와서 점을 치면 점궤가 이렇게 나오지 않을까.
“길(吉)하다. 기쁠 것이다. 기쁘다(嘉). 그러니 딸을 낳을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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