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1년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민통선 이북 파주시 장단에서 두동강 난 비석이 발견됐습니다. 동양의 의성 허준 선생의 무덤이었습니다. 서지학자가 10년 가까이 신분을 숨겨가며 찾아낸 것입니다. 도굴꾼에 의해 파헤쳐졌지만 두동강난 비석에는 ‘陽平○ ○聖功臣 ○浚’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었습니다. 허준 선생이 누구입니까. 타고난 천재성을 바탕으로 독학을 의술을 공부한 분입니다. 정치색이 없었으며 오로지 임금과 백성의 병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찼습니다. 천생 의사였던 셈입니다. 뭐니뭐니해도 허준 선생의 특등 공적은 <동의보감> 저술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나오는 637개의 향약 이름을 한글로 표기해서 백성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동의보감 편찬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병든 백성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 바로 그것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86회는 ‘두동강 비석으로 현현한 허준 선생’입니다.
1982년 어느 날. 서지학자 이양재씨는 어떤 골동품 거간꾼으로부터 한 통의 간찰(편지)을 입수했다. 눈이 번쩍 띄었다.
『7월17일 허준 배(許浚拜). 비가 와서 길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내용이야 그렇다 치고 글쓴이가 허준이라고? 서지학자는 그만 흥분했다.
『사실 확인에 들어갔죠. 허씨 대종회를 찾아가 종친회 족보에서 준(浚)자를 썼던 분을 몇몇 발견했는데요.』
그러나 준(浚)자 이름을 지닌 분들 가운데 이런 초서의 글을 멋들어지게 쓸 만한 학식과 지위에 있었던 이는 단 한분이었다. 바로『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선생이었다. 더구나 글자체도 16~17세기쯤으로 추정됐다.
그런데「양천허씨족보」를 면밀하게 살피던 이양재씨의 눈길을 잡아끄는 대목이 있었다.
즉, 한국전쟁 이후 실전(失傳)된 허준 선생의 묘가『장단(長湍) 하포(下浦) 광암동(廣岩洞) 동남쪽 방위에 있으며 무덤은 쌍분(雙墳)』이라는 내용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허준 선생의 묘소를 찾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이는 모래 속에서 바늘 찾기 격. 게다가「장단 하포리」는 민통선 이북지역. 그러나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도도, 지번도 없는 상태에서는 일제시대 때의 토지대장을 찾으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
<그림 >민통선 이북인데도 묘는 도굴로 처참하게 파헤쳐진 상태였다. 위 사진은 어머니, 아래 사진이 선생의 묘다. /이양재씨 제공
겠지.」
하지만 그것은 미공개자료였다. 무시로 열람시킬 경우 재산권 분쟁이 생길 수 있기에 군청이 공개를 거부했다.
『허준 묘만 찾으면 된다.』고 지역 지주회장 등을 통해 신신당부했다. 간신히 토지대장을 열람할 수 있었다. 샅샅이 옛 지번을 확인하다가 하포리라는 곳에서 주목할 만 한 이름이 보였다.
『허준의 13대 종손인 허형욱의 아버지 이름이 보이지 않겠어요? 그래! 이제 찾을 수 있겠다 하고 생각했죠.』
사실 허준의 종손인 허형욱(1924년~?)을 비롯한 자손들은 해방 전까지 황해도 해주 대거면에 살았다. 마을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남북분단이 고착화하기 전인 1947년까지 자손들이 38선을 넘어 제사를 지내고 돌아갔다.
향토사학자인 이윤희씨도『이 근방인 독정리와 우근리에는 8ㆍ15 해방 이전에는 100호가 넘는 양천 허씨 집성촌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 후 전쟁과 분단을 겪으면서 양천 허씨들은 파주 교하면 송촌리와 연천 지역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어요.』
또한 양천 허씨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시조로부터 10세손인 허공(許珙)부터 16세손까지, 그리고 허준의 할아버지인 허곤(許琨)과 허준의 어머니, 그리고 허준의 9세손인 허규(許奎) 등이 모두 장단지역에 묻혔다는 것이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었다.
민통선 이북이라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자, 이양재씨는 이곳 지주회장의 운전기사로 신분을 감추었다. 10년 가까이 옛 허씨 땅을 찾던 1991년 7월 어느 날.
그날도 짐작 가던 허씨의 옛 땅을 찾았으나 엉망이었다. 무덤이란 무덤은 모두 처참하게 도굴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 무덤(역시 마구 파헤쳐진)에 눈길을 돌리는 순간 이양재씨는 숨이 멎는 듯했다.
『이상한 일이었어요. 그 무덤을 보는 순간 갑자기 온몸이 전기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요. 바로 이거다! 하는 느낌이 들었죠.』
땅 속에서 비석이 나왔다. 그것도 두 쪽으로 동강난 명문비석이었다.
『「陽平○ ○聖功臣 ○浚」이란 명문이었어요. 바로「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었습니다.』
의성(醫聖) 허준 선생은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후손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의 자취를 찾기란 이렇게 힘들었다.
-대접 받지 못한 의성(醫聖)
출생연도, 출생지도, 유배지도, 사망지도 그야말로 논쟁의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선생이 서자였고, 더구나 그때만 해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의사였던 탓이겠지….
조선이 낳은 불세출의 의성(醫聖) 허준 선생.
그는 용천부사를 지낸 허론(許碖)과 그의 소실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자(庶子)였다는 뜻이다. 어머니 김씨는 당대의 명관인 김안국(金安國ㆍ1478~1543년), 김정국(金正國ㆍ 1485~1541년)의 4촌이자 서녀(庶女)였다. 그러므로 김안국ㆍ김정국은 허준의 5촌 내종간이 된다.
그런데 허준의 5촌 당숙인 김정국의 묘소가 허준묘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재미있게도 봉분이 앉아있는 방향이 서로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허준의 행적은 유희춘(柳希春ㆍ1513~1577년)이 남긴『미암일기(眉巖日記)』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유희춘이 쓴 일기이다. 남아있는 일기는 선조 즉위년(1567년) 10월부터 선조 10년(1577)까지 11년간에 걸친 내용이다. 조정의 공적인 사무로부터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매일 일어난 일과 보고들은 바를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에서 일부 남아있는데, 유희춘은 바로 김안국의 제자였다. 미암일기에는 허준이 아직 관직에 나서지 않았던 1569년 유희춘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완치시켜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777~1782년 사이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의림촬요』에는『본성이 총민하고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박식했다. 의학에 조예가 깊어 신묘함이 깊은 데 이르렀다.』는 등 선생의 천재성을 암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허준은 바로 이런 천재성을 바탕으로 독학으로 의학공부에 매진한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유의태라는 인물이 스승으로 나오지만 실존인물인지는 모른다. 다만 경남 산청지방에서 활약한 신의(神醫)였다는 구비전설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의학사(醫學史)에는 유이태(兪爾泰ㆍ1651?~1715년)라는 실존인물이 있는데, 그 역시 허준보다 100년 뒤의 사람이다.
다시『미암일기』로 돌아가자. 당시 유희춘의 집에는
당대의 명의인 안덕수, 양예수와 손사균, 이공기 등이 드나들었으며, 유희춘 스스로도 의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다.
재야의 의학도 허준이 그런 유희춘의 얼굴종기를 완치시켜준 것이다. 유희춘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허준의 의술이 이미 경지에 올랐음을 알려준 것이다. 유희춘은 허준을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천거했다. 31~33살 사이 허준은 내의원 첨정(僉正ㆍ종4품)으로 일한다.
신동원에 따르면 첨정이라는 직함은 요즘으로 치면 보건복지부의 서기관(과장급) 혹은 이사관(국장급) 정도라 한다. 서자출신인 허준으로서는 굉장한 출세였다.
하지만 어의(御醫)로서의 허준은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간간이 왕의 진료에 참여하는 정도였던 그에게 극적인 기회가 찾아온 것은 1590년(선조 23년). 그의 나이 52살 때였다.
『조선사람 허준』을 쓴 신동원은『선생은 찾아온 기회를 개척하여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고 평가한다.
선생은 1590년(선조 23년) 왕자와 공주, 옹주 등의 두창(마마)을 성공적으로 치료한다. 사실 세자(훗날 광해군)가 두창에 걸리자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두창은 무시무시한 치사율을 자랑한 역병이었다.
태종~광해군 사이에 두창과 관련된 기사는 50여종이 넘을 정도였다. 문제는 두창을 평생에 반드시 한번씩 겪는 질병으로 여겼으며, 약을 쓰기보다는 무속의 힘을 빌렸다는 점이다. 예컨대 태종의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두창을 앓자 어의들은『창진(瘡疹ㆍ두창)이 발병하면 죽고 사는 것이 하늘에 달렸다.』면서 전혀 약을 쓰지 않았다. 성녕대군은 약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왕(선조)은『세자에게 약을 투약하라.』고 과감한 지시를 내렸다. 왕은 이미 아들 둘은 두창으로 잃었던 터.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왕자들을 비명에 보낸 왕이 이번에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한 어의들은 나서지 않았다. 이 때 허준이 나선 것이다.
선생은 과감하고 자신감 넘치는 결단을 내린다.
『왕자가 또 이 병(두창)에 걸렸는데… 모두들 약을 써서 허물을 얻을까 가만히 있어 병이 악화됐는데… 신이 세 번 약을 써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언해두창집요』)
만약 실패했다면 몸을 보전하지 못했을 상황.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처방을 내려 세자의 병을 고쳤다. 세자 뿐 아니라 다른 왕자와 왕녀, 그리고 왕실 이외의 민간인 환자들도 고쳤다.
이때 허준이 쓴 두창약은 저미고(猪尾膏)였다고 한다. 저미고는 작은 돼지 꼬리 끝을 찔러 피를 낸 뒤 용뇌(龍腦) 1돈과 말아서 팥알만큼 잘라 만든 것이다.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 돼지꼬리의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허준은 이 공로로 마침내 당상관의 반열에 오른다.
훗날 죽음을 앞둔 임금(선조)을 치료할 때도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해 잔병치레가 많았던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겪으면서 정신적인 충격까지 더해 웬만한 약으로는 낫지 않는 고질병에 걸렸다.
죽을 때까지 이런 증세가 계속되었는데, 허준은 다른 의관들처럼 후환이 두려워 대충 처방하지 않고, 더욱 센 약을 처방함으로써「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어가는 임금을 살리려 했다. 다른 문관과 의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설사시키는 약을 처방했던 것이다.
본디 가망이 없는 왕에게 처방하는 약은 두루뭉수리 한 약을 처방한다. 잘못 됐을 경우에 당할 처벌을 두려워해서다. 하지만 선조의 병세가 보통의 약으로는 회복할 가능성이 없자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다. 다른 신료들과 의관들이 아우성 쳤다.
『성후의 미령하심이 봄부터 겨울까지 계속되니 약을 쓰는 일은 매우 긴요하고도 중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수의(首醫)로서 자기 소견을 고집하여 경솔히 독한 약을 썼으니 죄를 다스리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양평군 허준은 수어의(首御醫)로서 약을 의논함에 있어 마땅함을 잃어 너무 찬 약제를 함부로 써서 성후가 오래도록 평복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군하(郡下)의 절박한 심정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선조실록』「1607년 11월13일조」)
천생 의사였던 것이다. 임금에 대한 계산 없는 충성심만이 있었을 뿐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허준은 선조를 따라 의주 피란길에 오른다. 그런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신하들이 줄줄이 임금을 팽개치고 뿔뿔이 흩어진다.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요사스런 말이 퍼지자(중략) 명망 진신(縉紳)들이 보신에만 뜻을 품고 (중략) 의주에 이르기까지 문·무관이 17인. 환관 수 십 인과 어의(御醫) 허준, 액정원(扼庭員) 4~5인, 사복원(司僕員) 3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상(임금)이 이르기를「사대부가 너희들만도 못하구나!」하고 한탄하였다.』(『선조실록』「1592년 6월1일조」)
누란의 위기에서 제 살길을 찾으려 임금도 버려버린 사대부와 달리 허준은 끝까지 의리를 지킨 것이다.
-톡톡히 맛본 서얼 출신의 설움-
이 공로를 인정받은 선생은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른다.
호성공신이란 서울에서 의주까지 임금의 가마를 모신 공신을 뜻한다. 이어 숭록대부(종1품)에 오른다. 품계를 보자면 좌찬성, 우찬성과 같은 반열이었다. 선조의 병세가 호전된 1606년 왕은 허준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ㆍ정1품)로 올렸다. 서얼출신의 의원이 절대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던 꿈의 직책. 경천동지할 소식에 대간들이 아우성쳤다.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인사를 빨리 철회하라는 압박이었다.
『허준이 약간의 노고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적격자가 아닌 사람에게 주어 후세의 웃음을 사려하십니까. 의관이 숭록(崇祿)이 된 예도 전례 없는 일이고, 그마저 외람된 일인데, 여기에 보국(輔國)은 또 웬 말입니까. 이것이 어찌 허준이 부당하게 차지할 자리이겠습니까. 물정(物情)이 모두들 놀라워하고 있으니 속히 철회해주소서.』(『선조실록』「1606년 1월3일」)
<그림 >허준묘는 민통선 안에 있지만 말끔히 단장되어 요즘은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왕은 사간원ㆍ사헌부의 빗발치는 상소에도『그럴 수 없다.』고 버텼지만, 집요한 공세에 끝내 손을 들고 말았다. 비록「3일 천하」에 그쳤지만 허준 선생은 소싯적 꿈도 꾸지 못했을 보국숭록대부라는 엄청난 작위를 받은 불세출의 의원이었다.
온갖 질시 속에서도 승승장구하던 허준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다. 1608년 2월1일 버팀목이 되어주던 선조 임금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조짐은 왕의 병세가 걷잡을 수 없게 악화하기 시작한 1607년 10월부터 있었다.
『수어의(首御醫) 허준이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해 임금의 병세가 악화했다.』는 탄핵이 솔솔 피어난 것이다. 급기야 선조가 죽고, 광해군과 대북파가 정권을 잡자 선생은 앞서 인용했듯 『망령되게 약을 써서 임금이 죽었다.』는 탄핵을 받는다.
-정치싸움의 희생양 되다-
사실 허준은 정치싸움의 속죄양이었다. 당시 내의원의 의학 책임자는 허준이었지만, 내의원 약방의 도제조(都提調) 조선시대 6조의 속아문·군영 등 중요 기관에 설치한 자문명예직. 정1품 의정(議政)이나 의정을 지낸 사람을 임명하였으나, 실무에는 종사하지 않았다.
는 소북파(小北派)의 영수 유영경(柳永慶ㆍ1550~1608년)이었다.
그는 선조 말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 하였으나 광해군 즉위 후 대북 일파의 탄핵을 받고 죽었다. 그런데『선조수정실록』「1607년 11월1일조」를 보면 허준을 속죄양으로 한 정치싸움의 실마리가 잡힌다.
『당시 유영경이 약방 도제조였으므로 (대북파가) 먼저 허준에게「약을 잘못 썼다.」고 논죄한 다음 유영경의 지위를 동요시키려 하였다.』
한마디로 대북파는 허준을 이용하여 소북파 영수인 유영경을 공격하려 한 것이다. 유영경은 결국 사약을 받았다.『망령되게 약을 썼다.』는 죄를 덮어쓴 허준 역시 탄핵을 피할 수 없었다. 광해군은 사실 끝까지 허준을 보호하려 했다.
돌이켜보면 세자시절 두창으로부터 목숨을 살려준 평생의 은인이 아니었던가. 빗발치는 상소에도 광해군은『(망령되어 약을 써서 선조가 죽인 게 아니라) 허준의 의술이 부족하여 그랬다.』고 변호했다.
허준을 논죄함에 있어서 의술만 갖고 따진 것을 보면 대북파와 소북파 간 정치적인 소용돌이에서 빠졌지만, 정치적인 계산에 의해 움직이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허준이 귀양 간 곳은 남해 먼 바다가 아니라 선대 임금과의 추억이 깃든 의주였다. 대간들은 광해군에게『허준을「위리안치(圍籬安置)귀양살이 하는 집에 울타리를 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처벌」하라』고 끈질기게 주청을 올렸다.
하지만 광해군은 1년8개월 만인 1609년 허준을 방면한다.
『허준(許浚)은 호성 공신(扈聖功臣)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사람이요. 근래에 내가 마침 병이 많은데 내국(內局)에는 노성한 숙의(宿醫)가 적다. 더구나 귀양살이 한 지 해가 지났으니,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는 충분하다. 이제 석방하는 것이 가하다.』(『광해군일기』「1609년 11월22일조」)
내의원에 복귀한 허준은 임금의 병을 돌봤고, 복권도 했다.
-가장 빛나는 업적은 백성에 대한 따뜻한 시선
뭐니 뭐니 해도 허준의 업적은『동의보감』을 비롯한 많은 의학서를 저술했다는 것이다. 허준이 쓴 책은 7종 정도.『동의보감(東醫寶鑑)』외에『천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벽역신방(辟疫神方)』등이다.
『천도방론맥결집성』(1581년 편찬)은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에 간행된 같은 제목의 침구(鍼灸) 관련 서적을 발췌하여 교정한 책이다.『언해태산집요』는 산부인과 계통의 의서인데, 1608년 노중예(盧重禮)의『태산요록(胎産要綠)』을 개편하여 언해한 것이다.
『언해구급방』은 세조 때 편찬된 구급방을 1601년 허준이 개찬한 의서로 응급상황 대처법 등이 실려 있다.『언해두창집요』(1601년)는 앞서 언급했듯 두창에도 약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쓴 두창치료집이다.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은 1613년 무렵 북쪽에서 유행한 전염병에 대한 대비책을 쓴 책들이다.『신찬벽온방』은 열성질환인 온역(瘟疫), 즉 요즘으로 치면 급성티푸스 질환으로 추정되는 전염병에 관한 책이다.『벽역신방』은 같은 해 북쪽에서 유행한 성홍렬에 대한 책들이다.
특히『벽역신방』은 동아시아 3국을 통틀어 성홍열과 유사질환을 구분해낸 최초의 성과였으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빠르고 정확한 홍역연구서로 꼽힌다.
하지만 허준의「불후의 명작」은 역시『동의보감』이다. 선조 29년(1596년) 왕이 허준에게『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오랜 전란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고, 병자들이 속출했지만 쉽게 치료받을 수 없었던 데다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알맞은, 믿을만한 의서(醫書)마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허준은 1610년까지 무려 14년 역작으로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허준은 86종의 수많은 의서들을 참고, 정리함으로써 고급지식을 임상의들에게 제공했다.
허준은 내경(內景), 외경(外景),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 등 5대 강목(綱目)으로 나누었다. 그는 각 항목마다 그 항에 해당되는 병론(病論)과 방론(方論)을 빠짐없이 채록한 뒤 그 출전을 밝혀 각 병증에 대한 고금의 치방(治方)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했다.
모두 25책으로 된 동의보감은 1212종의 약에 대한 자료와 4497종의 처방을 수록했다.
동의보감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의학의 비현실적인 부분을 타파하고 실용성을 강조했으며, 과학의 입장에서 당대 의학의 모든 지식을 정리했다. 또한 86종에 이르는 국내외 의서들을 총정리했기에 임상의(臨床醫)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필독서가 되었고, 조선의학의 수준을 중국과 일본에 알리는 역할을 해냈다.
그는 특히 중국의학을 남의(南醫)와 북의(北醫)로 나누고, 조선의학을 동의(東醫)로 나누면서 이 책의 이름을『동의보감』이라 했다. 조선의학을 하나의 독립된 의학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병든 백성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그는 우리 국토에서 나오는 637개 향약(鄕藥)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야말로 동의보감 편찬의 진정한 목적이라 할 수 있겠다.
두창과 성홍열, 티푸스 같은 전염병에 걸려 속절없이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헌신한 이가 바로 허준이다.
『옛 풍속에 어린아이의 마마는 약 쓰는 것을 금하고 죽기를 기다렸는데, 어의 허준이 비로소 이 약을 써서 살아난 사람이 자못 많았다. 이로써 민간인들 가운데 어려서 죽는 것을 면하는 자가 많았다.』
허준과 동시대인인 이수광(1563~1628년)의『지봉유설』이 전한 허준 선생의 진면목이다.
민통선, 허준 선생의 고즈넉한 무덤. 문득 불후의 역사가 사마천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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