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1501~1570)은 조선을 대표하는 도학자입니다. 하늘의 이치를 따르며 인간의 욕망을 없애는(存天理 滅人慾) 학자라는 소리죠. 그래서 퇴계 선생을 두고 공자와 주자의 맥을 잇는 성인이라는 뜻에서 이자(李子)라 높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민간에 전승된 구비설화를 보면 퇴계는 음담패설의 주인공으로 종종 등장하니 말입니다. 뭐 ‘낮퇴계, 밤토끼’니 하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퇴계 선생은 심지어 “부부관계란 너무 점잖게 하면 안되는거야. 비바람 치듯 요란하게 해야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퇴계를 둘러싼 요절복통의 음담패설이 심심찮게 나옵니다. 참으로 반전 캐릭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독 퇴계 선생에게 이런 음담패설이 집중되는 걸까요. 평소 “부부란 손님 대하듯 서로 공경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퇴계 선생은 왜 이렇게 음담패설의 주인공이 됐을까요. 팟캐스트 85회는 ‘낮퇴계 밤토끼’ 퇴계가 음담패설의 주인공이 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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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퇴계, 밤토끼’란 말이 있다. 퇴계 이황 선생 이야기이다. 물론 역사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고 구비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다.
“퇴계가 낮에는 관을 쓰고 점잖게 제자들을 데리고 강학을 하는데 밤에는 부인에게 토끼 같이 굴었다. 그래서 낮퇴계, 밤토끼란 말이 생겼다.”
참 망측스러운 이야기가 아닌가. 낮에는 고고한 학자의 풍모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밤만 되면 토끼처럼 색(色)을 밝힌다는 뜻이니 말이다. 이런 설화도 있다.
“퇴계의 마누라는 못난 사람이었다. 모녀가 객담을 하는데 어머니가 딸에게 ‘퇴계 같은 분이 밤에 너에게 손을 대더냐”고 했더니 딸이 ‘낮토끼이지 밤토끼인가’라 답했다. 딸은 어리석어 퇴계를 토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한국구비문학대계>)
■공자-주자-이자(퇴계)
퇴계 선생 부인의 정신이 좀 혼미한 탓에 ‘퇴계’를 ‘토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느 경우든 흔히 알려져있는 퇴계 선생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세상에 퇴계 이황 선생(1501~1570)이 누구인가. 조선의 대표적인 도학자다. 도학자(道學者)란 무엇인가. 유교의 도덕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이다. 이른바 ‘존천리 멸인욕(存天理 滅人慾)’, 즉 하늘의 이치를 따르면서 인간의 욕망을 없애는 도덕과 윤리의 상징인물이었다. 기록에 나타나는 퇴계는 어릴 때부터 도학자의 풍모를 갖고 있었다.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거나 다리를 꼬고 앉거나 기대거나 눕거나 엎드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이자수어> ‘거가’)
퇴계는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이식·1436~1502)를 여의었다. 그때부터 어머니 박씨가 키웠는데, 꼿꼿한 선비기질을 어렸을 때부터 발휘했다. 그랬으니 성호 이익(1681~1763)은 “퇴계의 언행은 사문(斯文·유교에서 성인의 도)의 맥을 부지했다”고 추앙했다. 이익은 아예 퇴계를 ‘이자(李子)’라 숭모하면서 퇴계의 언행을 가려 뽑은 <이자수어(李子粹語)>라는 책을 펴냈다. 원래의 책이름은 <도동편(道東編)>이었는데 1753년 순암 안정복(1721~1791)이 교정을 보면서 책이름도 <이자수어>로 바꿨다. 이때 이익이 <이자수어>의 책머리에 쓴 서문을 보라.
“주나라 쇠락 이후 공자가 태어났고, 1500년 후에 자주자(子朱子)가 나왔다. (주나라 이후) 2000년 후에는 퇴계 자이자(子李子)가 태어나서 육경(<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을 따르고 주자(朱子)에 기댔는데…. 다행히 이 나라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어찌 퇴계의 말을 말하고, 퇴계의 행실을 행하여 한가닥 사문(성인의 도)을 붙잡지 않겠는가.”
여기서 자주자(子朱子)나 자이자(子李子)의 자(子)는 주자와 이자(퇴계)의 극존칭이다. 이익은 그러면서 “한참 뒤에 태어난 나는 퇴계의 제자가 될 수 없어 다만 그 분의 책만 읽고 기뻐할 뿐”이라고 <이자수어>의 집필동기를 밝혔다. 그러니까 이익은 퇴계를 공자-주자의 맥을 잇는 성인(李子)으로 흠모한 것이다. <이자수어>를 교정해준 안정복은 이익이 퇴계를 ‘이자’란 높인 이유를 설명했다.(<순암선생문집> ‘이자수어서’)
“자(子)라는 호칭은 존경하고 사모하는 말이다. 존경하고 사모하는 사람 중에 퇴계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이자(李子)’라고 하는데 딴죽을 거는 이가 없을 것이다.~공자와 맹자의 말씀은 왕조의 법령 같고, 정자와 주자의 말씀은 엄한 스승의 경계 같으며, 퇴계의 말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훈계와 같다.”
퇴계를 공맹(공자와 맹자)과 정주(정자와 주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안정복은 “이자(퇴계)가 살았던 땅이 같고, 시대가 가까우니 자애로운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치켜세웠다.
■퇴계와 율곡의 남녀관계론
그렇다면 이 무슨 조화인가. 공자-주자의 맥을 잇는 성인 이자(퇴계)에게 왜 ‘낮퇴계 밤토끼’라느니 하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감히 갖다붙였을까.
문제는 퇴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음담패설이 상당수라는 것이다. 연구(김동욱의 ‘퇴계가 등장하는 성소화’, 계간 <문헌과 해석> 2010년 봄호)에 따르면 문헌설화로 2편, 구비설화로 6편에 이른다. 이 가운데 ‘퇴계 vs 율곡 이이’, ‘퇴계 vs 남명 조식’ 등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등장하는 ‘율곡과 퇴계의 부부생활’ 이야기를 살펴보자.
“퇴계와 율곡 선생의 제자들이 모여 두 선생님은 성현인데, 부부생활을 어찌 하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성현이니 부부생활도 점잖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퇴계 선생의 부부생활은 참으로 난잡스러웠다. 그러나 율곡 선생은 평소와 다름없이 밤에도 도덕군자처럼 의관을 차려있고 부인을 대했다. 퇴계 선생의 제자들은 참을 수 없었다. 이튿날 득달같이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퇴계는 ‘남녀 관계란 음양이 합하는 것이다. 원래 점잖게 하면 안되는 거야.’라 했다.”
무슨 말인가. 퇴계는 부부생활이란 하늘과 땅의 기운이 마주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니 당연히 비바람이 불고 벼락과 천둥이 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녀관계 또한 그렇게 요란하게 치뤄야지 너무 조용하게 치르면 안된다고 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율곡은 반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퇴계와 달리 구비설화에서도 도학자의 풍모를 잃지 않는다.
예를들어 신흠(1566~1623)의 시문집인 <상촌선생집>을 보면 율곡과 기생 유지(柳枝)의 일화가 담겨있다. 즉 율곡 이이가 원접사의 자격으로 중국 사신을 맞이하러 황해도 황강을 지났을 때였다. 이때 황강 군수가 재주가 있고 얼굴도 고운 기생 유지를 시켜 율곡 선생을 모시도록 했다. 그러나 율곡은 유지의 재주와 얼굴을 귀엽게 여겨 함께 지냈지만 결코 난잡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시 한 수만 써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요즘 말하는 ‘플라토닉 러브’였다고 할까. 감명을 받은 유지는 율곡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율곡이 남겨준 시를 시첩으로 만들었다.(<상촌선생집> ‘유지 시첩에 제하다’)
최근 경향신문이 기획한 <70인과의 동행>에 참가한 독자들이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 종택에서 퇴계태실(이황이 태어난 곳)을 살펴보고 있다.
■율곡과 남명의 寶之刺之론
또 한사람의 라이벌인 남명 조식과의 ‘음담패설 야사’도 이야기도 인구에 회자된다. 조선의 음담패설집인 <기이재상담(紀伊齋常談)> ‘寶之刺之’에 적나라하게 나온다.
조선 명종 때 선비 한 사람이 두 선생의 덕을 시험하고자 했다. 먼저 남명 조식의 집을 찾아 절도 하지 않은채 두 다리를 뻗치고 앉아 대뜸 물었다.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선생님. 寶之가 무엇입니까.”(선비)
뜬금없이 남명은 인상을 찌푸리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선비가 재차 물었다.
“선생님, 그럼 刺之는 요.”
남명이 화를 덜컥냈다.
“미친놈이다.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하라.”
남명의 집에서 쫓겨난 선비는 퇴계의 집으로 갔다. 똑같이 버릇없이 굴면서 다시 물었다.
“선생님 寶之가 무엇입니까.”
“응? 걸어다닐 때 숨어있지. 보배처럼 귀하지만 사고파는 것은 아니야.(步藏之者 而寶而不市者也)”
선비가 또 물었다.
“刺之는요?”
“응. 앉아 있을 때는 꼭 숨는 놈이지만 사람을 찌르긴 하지만 죽이진 않아.(坐藏之者 而刺而不兵者也)”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일 것이다. 왜냐면 퇴계와 남명은 같은 해(1501년)에 태어났고 비슷한 시기(퇴계는 1570년, 남명은 1572년)에 죽었지만 한번도 만난 적은 없다. 남명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1564년) “평생 마음으로만 사귀었고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표현이 있다.
■습과 조가 변한 말
퇴계를 둘러싼 음담패설은 또 있다.
어떤 사람이 퇴계를 찾아와 대뜸 무례한 질문을 해댔다.
“우리가 씹, 좆이라는 말을 쓰는데 어떻게 생긴 말입니까?”
아니 이런 불상놈이 다 있나 하고 화를 낼 법도 했다. 그런데도 퇴계는 태연하게 말했다.
“씹이라는 것은 음(陰)이라 습기가 많아서 ‘습’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인데 그것이 와전되어 씹이 된 거지. 좆은 양(陽)이라 건조하기 때문에 조(燥)라 한 것인데, 차차 와전되어 좆이 된 것이오.”(<한국구전설화>)
■퇴계의 부부생활
이러한 구비설화를 감상하면 퇴계의 사생활이 도학자의 고고한 이미지와 달리 매우 퇴폐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실제 문헌기록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일단 퇴계의 부부생활은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퇴계는 21살 때 동갑내기 김해 허씨(1501~1527)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허씨 부인은 퇴계가 27살 때 세상을 떠난다. 둘째 아들(이채)을 낳은 뒤 산후조리가 잘못 된 탓이었다. 퇴계는 3년 후인 30살에 두번째 부인을 얻는데, 그 이가 바로 안동 권씨였다. 문제는 두번째 부인 권씨의 정신이 혼미했다는 것이다.
권씨의 아버지(권질·1483~1545)는 갑자사화(1504년)에 연루돼 귀양을 갔는데,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작은 아버지(권전)가 기묘사화(1519년)와 신사무옥(1521년) 등의 정변에 잇달아 연루돼 곤장을 맞고 형장에서 숨을 거뒀다. 숙모는 관비로 전락했고, 아버지 권질은 두번째로 유배형을 떠났다. 어린 권씨는 가문에 들이닥친 연속적인 불운을 바라보며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런데 권씨 소녀가 아버지 권질이 두번째 유배를 간 곳이 바로 퇴계의 고향인 예안(안동)이었다.
그로부터 9년 뒤인 1530년 귀양살이 중이던 권질이 퇴계를 조용히 불렀다. 권질은 퇴계보다 18년 연상이었다.
“자네, 부인(허씨)의 3년상은 잘 치렀나? 재혼은 했는가.”(권질)
“안 했습니다.”(퇴계)
“그럼 잘 됐네. 내 여식이 혼이 나가 온전치 못하네. 내 오늘 자네에게 내 딸을 부탁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 밖에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구먼.”(권질)
권질의 뜻밖 부탁에 퇴계는 한참 생각한 후에 승락했다.
“예. 알겠습니다. 혼인을 치르겠습니다.”(퇴계)
퇴계와 권씨 부인은 이렇게 혼사를 치렀다. 물론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다.
■퇴계 부인의 치맛속에 감춘 배 한알
정신이 다소 혼미한 권씨 부인의 일화 역시 인구에 회자된다. 예컨대 할아버지 제삿날 식구들이 큰형 집에 모였을 때 제사상에서 배 하나가 떨어졌다. 이때 권씨 부인이 재빨리 배를 집어 치맛속에 숨겼다. 이를 본 큰 형수가 동서(권씨)를 나무랐다.
“동서! 과일이 제사상에서 떨어진 것은 정성이 부족했다는 뜻이야. 그걸 치맛속에 감추면 어떻게 해.”
아낙들이 손을 가리고 웃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퇴계가 큰 형수에게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귀엽게 봐줄 것이니 용서해달라”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나중에 부인에게 “왜 배를 숨겼냐”고 물으니 부인은 “먹고 싶었다”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퇴계는 치마 속에 감춘 배를 손수 깎아 잘라주었다.
제사 음식과 관련해서 또 다른 버전이 있다. ‘대추버전’이다.
어느 날 권씨 부인이 제삿상 주변을 서성거리다 대추 하나를 냉큼 집어먹었다. 친척들이 퇴계에게 불편한 시선을 쏟아냈다. 그러자 퇴계는 부인을 감쌌다.
“제사도 지내기 전에 손자며느리가 먼저 음복을 하는 것은 분명 예절을 벗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도 손자며느리를 귀엽게 여길 겁니다. 노여워 하지 않을 겁니다.”
퇴계는 부인의 모자람을 채워주려 무진 애를 썼던 것이다.
■대인의 빨간 헝겊 도포자락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퇴계가 문상을 가려도 도포를 입으로 하다가 도포자락이 너덜너덜 닳아 해진 것을 발견했다.
“부인 이것 좀 꿰매 주시오.”
그러자 권씨는 빨간 헝겊을 가져다 기워주었다. 퇴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도포를 입고 상가로 갔다. 주변사람들이 의아스럽다는 듯 물었다.
“원래 흰 도포는 빨간 헝겊으로 기워야 하는 것입니까.”
퇴계는 빙긋 웃기만 했다. 유교의 법도에 정통한 퇴계가 아닌가. 이후 흰색도포를 빨간 헝겊으로 기우는 것은 당대의 트렌드가 됐다. 이런 ‘상가 도포’ 소동은 ‘조회 도포’ 버전으로 바뀐채 전해지기도 한다. 즉 퇴계가 아내가 꿰매준 흰바탕에 빨간 헝겊 조각 도포를 입고 조회(朝會)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때 문무백관들이 퇴계 주위로 몰려 “해진 도포는 빨간 헝겊으로 꿰매야 하냐”고 물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조정에서는 ‘원래 대인배는 빨간 헝겊으로 기운 흰 도포를 입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또 하루는 벼루에 물이 떨어져 권씨 부인에게 “물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부인은 물을 가득 채운 커다란 물동이를 이고 들어와 벼루에 붓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옆으로 새지 않고 정확하게 들이부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웃음을 참느라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퇴계는 미동도 않고 부인이 물을 다 붓고 나가기만을 기다린 뒤 조용히 글을 짓기 시작했다.
■아내의 모자람을 채워준 속깊은 남편
이런 일화들은 과장이거나 잘못 알려진, 그야말로 구전설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이 혼미한 부인의 모자람을 묵묵히 채워주었던 속깊은 남편의 풍모가 돋보인다. 그랬던 권씨 부인은 1546년 첫 아이를 낳다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퇴계는 “내 죄와 액혼이 쌓여 이런 일을 당한 것”이라고 슬퍼했다. 퇴계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권씨 부인에 대한 애틋함이 절절이 배어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놀랍고 애통하여 어쩔 줄 모르겠다. …영원히 이별하는 아픔은 무어라고 말 할 수 없구나.”
퇴계는 첫번째 부인(허씨)에게서 난 두 아들에게 “마치 생모를 대하듯 하라”고 지시했다.
“너희는 모두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지 않았으니 이 초상은 너희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마음으로…. 어떤 사람은 계모가 친모와 차이가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대개 뜻을 알지 못하여 경솔하게 하는 말이다. 사람을 의(義)가 아닌 것에 빠져서는 안된다.”
퇴계의 두 아들은 장남이 다섯살, 차남이 1개월 되던 때 생모(허씨)를 잃었다. 퇴계는 두 아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생모를 여읜 까닭에 제대로 된 어머니 상을 치르지 못했으니 계모를 생모의 예로 장례를 치르라고 당부한 것이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지시대로 적모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이하고 발인까지 마쳤다.
권씨 부인의 운구는 남한강 수로를 이용해서 서울~충주~단양을 거쳐 예안에 닿았다. 7월2일 상을 당한 뒤로 치면 무려 40여일간의 장례일정이었던 것이다. 두 아들은 산기슭에 여막을 지어 시묘살이를 했다. 퇴계는 고향에 양진암을 짓고 1년 넘게 머무르면서 부인의 영혼을 지켜주었다. 이 양진암의 주변을 흐르는 개천인 토계(兎溪)의 토를 퇴(退)자로 바꾼 뒤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것이 혹시 ‘낮퇴계, 밤토끼’란 말이 나오는 단서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책임은 남편이 져야 하네.
퇴계라고 해서 결혼 생활이 내내 행복했겠는가.
1569년, 즉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제자인 이함형(1550~1577)에게 준 편지에서 그같은 사실을 더듬을 수 있다. 즉 이함형은 당시 금슬이 매우 좋지 않아 부부끼리 얼굴조차 맞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정을 안 69살의 스승이 20살 젊은 제자 이함형에게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고는 겉봉에다 “길에서는 절대 뜯어보지 마라(路次物開看)”는 글을 썼다. 당시 안동에서 고향인 순천까지 가는 동안 이함형은 스승의 당부대로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 편지 내용은 이랬다.
“성질이 나빠 교화하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면…크게 보면 모두 남편에게 달려있다네. 남편이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힘써 잘 처신하여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않는다면 대륜(大倫)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네.… 난 두 번 장가들었는데 내내 심히 불행했네.…그동안 괴롭고 심란하여 번민을 견디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자네도 거듭 생각하고 징계하여 고치도록 하게나.”(<퇴계집> ‘이평숙에게’)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와있다.
“퇴계 선생이 이평숙(이함형)에게 보낸 글에 ‘내가 일찍이 재취했는데,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그 사이 마음이 산란해서 답답함을 견딜 수 없는 때가 있었다.’고 했다.”(<성호사설> ‘퇴계재취’)
어쨌든 제자 이함형은 스승의 마지막 당부를 가슴깊이 새겨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퇴계와 그 문인들의 사적을 담은 <도산급문제현록>은 “이함형은 퇴계의 편지를 읽고 비로소 부부의 도리를 닦았다”고 했고, <성호사설> ‘인사문·퇴계재취’는 “이함형의 부인이 퇴계 선생의 부음을 듣고 3년 간이나 소식했다”고 전했다. ‘웬만하면 남편이 참아야 한다’고 한 퇴계의 가르침이 모든 것이 아내 탓이라 치부했던 이함형의 마음을 바꿔놓았음을 알 수 있다. 퇴계의 한마디가 제자 이함형을 애처가로 만든 것이다.
그러고보면 ‘결혼생활 솔직히 불행했다’는 퇴계의 토로는 어찌보면 제자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는지 모르겠다. 이함형에게 당부하는 말 가운데 마지막 대목은 “끝까지 고치지 않는다면 어찌 학문한다며 실천한다고 하겠느냐”는 힐난이었다.
■손님 대하듯 하라
퇴계는 손자(이안도·1541~1584)가 혼인할 때 자신의 부부관을 담은 편지 한통을 보낸다.
“천번 만번 경계하라. 무릇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다. 아무리 친밀하고 가까워도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삼가야 하는 자리다. 그래서 군자의 도는 부부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사람들은 예의와 존경심을 잊어버리고 버릇없이 모욕하고 거만하고 인격을 멸시해버린다.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님 대하듯 공경해라, 즉 ‘상경여빈(相敬如賓)’의 태도야 말로 퇴계가 말하는 부부의 도리이다.
퇴계의 맏처남인 허사련의 사위인 오운(1540~1617)이 처고모인 허씨부인(퇴계의 첫번째 부인)을 위해 쓴 묘비명에도 이른 내용이 나온다.
“퇴계 선생은 허씨 부인에게 서로 손님같이 경대했다. 평소 거처하실 때와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를 보면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이 보였다. 처음에는 금슬이 좋지 않은 듯 의심을 하지만 오래 지내보면 부부의 두터운 정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퇴계를 두고 ‘낮퇴계 밤토끼’니 하고, 천둥번개 처럼 요란하고 난잡한 부부생활을 즐긴 것으로 희화화하는 구비설화들이 전해지는 이유가 대체 무얼까.
도학자인 퇴계를 보통 사람으로 끌어내림으로써 친근감을 표현하려는 민간의 쑥덕거림이었을 뿐이 아닐까. 지금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을 개그의 소재로 활용하면 재미있지 않은가. 예전 사람들도 공자-주자의 맥을 잇는 이자(李子)로 추앙받는 퇴계를 음담패설의 소재로 삼는 파격을 마음껏 즐겼다. 퇴계 선생은 민간에서 유통되는 육담의 주인공을 사랑받은 것이다. 이자 퇴계선생이 더욱 친근감있는 존재로 후세에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 글은 계간 <문헌과 해석> 2010년 봄호에 실린 김동욱의 글 ‘퇴계가 등장하는 성소화(性笑話)’와 김병일의 <퇴계처럼>, 글항아리, 2012 등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권오봉의 <퇴계선생 일대기>, 교육과학사, 1997도 도움이 됐습니다. <한국구비문화대계>와 <한국구전설화> 등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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