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5패’ 중 한 사람인 초 장왕(재위 기원전 614~591)에게 아끼는 말(馬)이 있었다.
장왕은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수 놓은 옷을 입히고, 화려한 집에서 기르면서, 침대에 눕게 하고, 대추와 마른 고기를 먹였다. 그런데 그렇게 끔찍하게 사랑했던 말이 죽고 말았다. 얼마나 먹였던지 살이 쪄서 죽은 것이다. 슬픔에 빠진 장왕이 신하들에게 명한다.
“대신들은 모두 상복을 입어라. 말의 시신은 대부(大夫·재상 바로 밑의 고관대작)의 예절로, 즉 속널과 바깥 널을 구비한 관곽에 안장하고 장례를 지내라.”
대신들은 “말이 죽었을 뿐인데, 무슨 대부의 예로 장사를 지내냐”며 극력 반발했다. 왕은 “누구든 반대하는 신하는 죽여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때 우맹이라는 사람이 나섰다. 본래 초나라 음악가였던 우맹은 말주변이 좋아 언제나 웃으며 세상을 풍자하고 간언했던 사람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풍자개그맨’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람의 창자 속에 장사지내십시요”
궁궐에 들어선 우맹이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다. 장왕이 놀라 “왜 그리 우느냐”고 물었다.
“임금님이 그렇게 끔찍하게 좋아한 말이 돌아가셨다는데 대부의 예로 장사를 지내다니오. 박정하고 부족합니다. 마땅히 임금의 예로 장사지내야 합니다.”
그 말에 장왕이 귀를 쫑긋했다.
“어떻게 장사 지내란 말인가?”
“옥으로 관을 짜고 무늬있는 가래나무로 바깥널을, 느릅나무·단풍나무·녹나무로 횡대(관을 묻은 뒤에 구덩이 위에 덮는 널조각)를 만들어야 합니다. 병사들을 동원해서 무덤을 파고, 노약자에게 흙을 나르게 하며, 제나라와 조나라·한나라·위나라 사신은 열지어 호위하게 하며 사당을 세워 태뢰(太牢·나라의 큰 제사)를 드리게 하소서. 1만호의 집이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
그러면서 우맹이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진다.
“그렇게 하신다면 제후들이 ‘대왕(장왕)은 말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천하게 여긴다’고 할 것입니다.”
우맹은 한낱 말(馬)의 장례를 ‘대부의 예로 지내라’는 국왕의 명령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를 비판한 것이다. 장왕은 우맹의 뜻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잘못을 인정했다.
“과인이 잘못했소.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그제서야 우맹이 말했다.
“육축(개·소·말·양·돼지·닭)의 예로 장사지내십시오. 부뚜막으로 바깥널을 삼고, 구리솥으로 속널을 삼으며, 생강과 대추를 섞고, 목란(木蘭)나무로 불을 때십시오. 그런 다음 볏짚으로 제사지내고 타오르는 불빛으로 옷을 입혀, 사람의 창자 속에 장사지내십시오.(葬之於人腹腸)”
사람들의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라는 말이니 얼마나 통쾌한 풍자인가. 초장왕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목숨을 건 우맹의 풍자를 알아듣고는 곧바로 말(馬)의 시신을 대관(太官)에게 넘겼다. 태관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그러자 국왕을 비판하는 잡소리가 뚝 끊어졌다.(<사기> ‘골계열전’)
■경우가 다른 이성계의 애완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에게는 유명한 팔준마(八駿馬)가 있었다. 이성계의 애마 8필, 즉 횡운골(橫雲골)·유린청(遊麟靑)·추풍오(追風烏)·발전자(發電자)·용등자(龍騰紫)·응상백(凝霜白)·사자황(獅子黃)·현표(玄豹) 등을 일컫는다. 왜구 아기발도를 죽일 때 탔던 사자황과, 위화도 회군 때 탔던 응상백 등이 유명하다. 그 가운데 이성계가 가장 사랑한 말은 아마도 유린청이었을 것이다.
유린청은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 홍건적을 토벌할 때 탔던 말이다. 전투 도중에 화살을 3발이나 맞았음에도 31살까지 살았다. 태조는 유린청이 죽자 석조(石槽·돌로 만든 그릇. 여기서는 돌로 만든 관을 의미)에 넣은 뒤 장사를 지낼 정도로 애닲아 했다.(<연려실기술> ‘태조조 고사본말·잠룡 때의 일’)
사람의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지 않을지언정 석조에서 장사를 지내다니…. 초장왕이 ‘대부의 예’로 장사지내려 한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하지만 순전히 애완동물로서의 말(초장왕)과, 전투마로서의 말(이성계)은 엄연히 다르다. 이성계의 팔준마는 단순한 애완동물이 아니라 왜구와 홍건적을 토벌할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창업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애완은 창업의 공든 탑을 무너뜨립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 각종 문헌을 살펴보면 질리도록 인용한 문구가 있다.
주나라를 창업한 무왕(재위 기원전 1046~1043)과, 창업공신 소공 석의 일화이다. 무왕이 은(상)을 멸하고 천하를 차지했다.(기원전 1046년) 그러자 사방의 오랑캐들이 무릎을 꿇고 갖가지 진상품을 올렸다.
서방의 오랑캐(만이·蠻夷) 나라인 서려도 공물로 오(獒·키가 4척이나 되는 사냥개)를 바쳤다. 당시 80살이 넘은 무왕에게 이 개는 말년을 즐겁게 지낼 애완동물로 사랑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공(召公)은 “절대 받아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글을 지어 바쳤다.
“기이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고, 소용되는 물건을 천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이 넉넉합니다. 개와 말은 토종이 아니면 기르지 말고, 진귀한 새와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마소서. 작은 행위를 삼가지 않으면 큰 덕에 누를 끼칩니다.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공(功)이 이지러집니다.”(<서경> ‘여오(旅獒)’)
애완동물, 특히 토종이 아닌 외국산에 빠져 백성을 돌보는 데 소홀히 하면 창업의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간언에 따라 무왕도 일절 진상동물을 받지 않았다.
■낙타 굶어죽인 만부교 사건의 실체는?
후대의 신하들은 이 주 무왕과 소공 석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임금들의 애완취향을 번번이 좌절시켰다. 요는 ‘동물보다 사람, 즉 백성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조선조 성종의 동물 사랑은 유별났다. 1486년(성종 17년), 성종은 중국에서 “낙타를 구입해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낙타 구입 비용으로 ‘흑마포 60필’이 책정됐다.
대사헌 이경동이 늑달같이 나서, 예의 그 주 무왕과 소공 석의 일화를 장황하게 소개하면서 불가론을 조목조목 개진한다.
“낙타는 먼 지방의 기이한 동물입니다. 비싼 값으로 중국에서 낙타를 구입하는 것은 ‘귀한 것을 귀히 여겨야 하고, 토종이 아니면 기르지 않아야 한다’는 소공의 간언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조그만 행위를 삼가지 않는다면 전하의 성덕(聖德)에 큰 누가 될 것입니다.”
이어 고려 태조 왕건이 거란족이 보낸 낙타를 굶어죽인 이른바 ‘만부교 사건’까지 거론했다. 942년 거란이 낙타 50필을 선물로 보내자, 왕건이 만부교(개성) 아래에서 굶겨 죽이고, 거란 사신 30명을 유배보낸 유명한 사건이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국교가 단절됐고, 앙심을 품은 거란은 991년부터 3차례나 고려를 침공한다. 이경동은 이 ‘만부교 사건’을 언급한 고려학자 이제현을 인용하면서 성종에게 충언을 올린다.
“고려 태조가 거란의 낙타를 굶어죽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제현이 언급하기를 ‘오랑캐(거란)의 간사한 계책을 꺾고, 후세의 사치하는 마음을 막으려던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낙타 한마리 때문에 전하의 성스런 인품에 오점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이경동은 이어 “백성을 생각하라”고 했다. 가뭄이 들어 인심이 흉흉한데 낙타 한 마리 값으로 흑마포 60필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흑마포(黑麻布)는 명나라 때부터 진귀한 보배로 사랑받은 검은 빛깔의 삼베를 뜻한다.
“흑마포 1필값은 정포(보통 삼베) 10필이며, 정포 1필은 콩 10두로 칩니다. 그렇다면 낙타 한마리 값(흑마포 60필)은 정포로 계산하면 600필이며, 콩을 치면 6000두이고, 석으로 하면 400석입니다. 쓸데없는 짐승 한마리를 사려고 전세 400석의 콩을 쓰는 격입니다. 전하께서는 검소한 덕을 숭상하고 낭비를 절약하셔야 합니다.”
성종이 듣기에도 ‘옳으신 말씀’이었다. 성종은 “내가 원래 이 짐승을 귀하게 여긴 것이 아니었다”며 “경(이경동)의 간언을 따르겠다”고 낙타 구입 결정을 전격 철회했다.
■지나친 애완은 반란의 조짐을 낳는다
성종 임금이 또 좋아했던 것은 송골매였다. 그러자 매를 관리하는 응사(鷹師)들도 임금의 비호 속에 활개를 쳤다. 1486년 정언 이거가 성종 임금에게 직언하는 장면을 보자.
“요즘 성상께서 송골매를 좋아하시는데, 응사가 송골매를 놓치면 밤에도 궁문을 열고 금군(禁軍·국왕 경호실)을 풀어 찾습니다. 창고의 곡식으로 그 군사를 먹이는데, 올해 흉년이 들어 창고의 곡식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
그러면서 “한 마리의 송골매를 잃은 것이 나라의 품위에 손상이 가는 것이냐”고 반문하고 “애완동물에 한눈을 팔면 본심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평 반우형도 ‘방탕하게 놀지 말고 지나치게 즐기지 말라’는 순 임금의 말을 이용하면서 송골매에 탐익하는 임금을 비판했다. 헌납 이승건은 “송골매를 다루는 응사들이 매 훈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도성 안에서 말을 마구 달리고 대간이 지나가는 데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도성 안을 폭주하는 응사들이 임금의 잘잘못을 가리고 간언하는 대간이 지나가는 데도 무시하고 말을 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종도 만만치 않았다.
“응사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은 것은 매를 놀라게 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송골매는 일반 매처럼 쉽게 얻을 수도, 조련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을 잃어버려 찾는다는데 무엇이 잘못됐다는 말이냐.”
성종은 대신들의 격렬한 반발에 응방을 철폐했다가 되살리고, 매를 놓아주었다가 끌어모으는 일을 반복했다. 신종호가 다소 과격한 예를 들어 성종을 비판했다.
“전하께서 초년에는 응방(鷹坊)을 폐하셨는데, 요즈음은 다시 설치하여 송골매를 기르십니다. 당 덕종은 초년에 길든 코끼리를 놓아 보내고 닭싸움을 폐하고 정치에 뜻을 기울였습니다. 그러자 산동(山東)의 교만하고 거센 병졸이 순종을 다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5방(坊)을 설립하여 사냥을 일삼았으므로, 마침내 ‘건중의 난’(783년 장안에서 발생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전하께서도 그 조짐을 경계해야 합니다.”
애완동물 좀 키웠다고 그것을 반란의 조짐으로 연결시켰으니…. 그러나 성종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만 했을 뿐 쉽게 굽히지 않았다.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다구요?
또 있다. 1477년(성종 8년) 사복시(司僕寺·왕이 사용하는 수레와 말의 사육을 맡은 관청)가 동물을 좋아하는 성종을 혹하게 만드는 제안을 했다.
원숭이를 사육할 토우(土宇·흙집)을 짓고,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좌부승지 손비장이 달려와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원숭이에게 무슨 집을 지어주고, 옷을 입힌다는 말입니까. 원숭이는 상서롭지 못한 짐승입니다. 사람의 옷을 가지고 상서롭지 못한 짐승에게 입힐 수는 없습니다.”(<성종실록>)
손비장은 이어 백성은 물론, 역사책까지 들먹거린다.
“한 벌의 옷이라면 한 사람의 백성이 추위에 얼지 않습니다. 사가(史家)가 역사책에 ‘전하(성종)께서 애완물을 좋아했다’고 쓴다면 어쩌겠습니까.”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 했던 임금에게는 협박이나 다름없는 간언이었다. 백성에, 역사까지 들먹이자 성종은 꼬리를 내리며 변명을 해댔다.
“내가 애완물을 좋아하는게 아니다. 다만 외국에서 바친 동물을 얼어죽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않느냐. 사복시는 옷을 입히자는 것이 아니라 녹비(鹿皮)를 입히자고 청한 것이다.”
■애완동물은 재앙의 상징?
연산군도 아버지 성종의 피를 물려받아 애완동물을 지극해 사랑했던 것 같다.
궁궐 안에 매와 개(犬)를 모아 태창(太倉·관리의 녹봉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의 쌀을 풀어 사육토록 했다. 이 때문에 매가 대궐 안 동산에서 떼지어 날고, 사냥개가 궁궐 뜰에 무리를 지어 짖는 일이 발생했다.
보다못한 대사헌 성현은 ‘주 무왕과 소공 석’의 일화를 줄기차게 인용하면서 ‘제발 학문과 정사에 심혈을 기울여 달라’고 간청한다.
“(궁궐 안에 매와 개가 날뛰는 것은) 남이 보기에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또 이것들을 길러 어디에 쓰겠습니까. 뜻이 거칠어지는 조짐이 애완동물에게 있으니 제발 금수를 기르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하십시요.”
또 있다. 1547년(명종 2년), 사복시정 김천우가 “임금이 탈 수 있는 말이 없으니 요동의 중국말을 수입해오면 어떠냐”고 청을 올린다. <명종실록>을 쓴 기자는 그런 김천우를 “무식하다”며 맹비난한다.
“어린 나이(만 11살)에 등극한 임금을 제대로 계도하지는 못할 망정 중국산 말 교역 운운하면서 완물의 영역으로 계도했구나. 그의 무식함을 알 수 있다.”
참찬관 주세붕도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는 애완물에 탐익하는 것이 군덕(君德)을 해치는 일”이라면서 어린 임금 명종을 타일렀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559년, 임금의 어마(御馬)가 놀라 날뛰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동지경연사 윤춘년은 다시 한 번 중국 말을 수입하자고 건의한다. 애완동물로서의 말이 아니라 임금이 탈 ‘잘 훈련된’ 말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신하들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명종실록>을 쓴 사가는 임금과 대신들을 싸잡아 비판한다.
“모두 임금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고 (애완동물로 인한) 재앙을 두려워한 언급이 없었다. (임금과 신하가 정사를 논하는) 경연이 어찌 이토록 그 직분을 잃었는가.”
■백성을 먼저 생각하라는 뜻
그러고보면 임금 노릇도 할 짓이 아닌 것 같다. 지존의 자리가 좋은게 뭔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게 지존, 즉 임금의 자리가 아닌가.
그런데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폭정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애완동물 한마리 키워보겠다는게 여기저기서 ‘아니되옵니다’를 연발하니 말이다. 심지어는 임금의 애완취향을 반란의 조짐으로까지 몰아버리니…. 그러나 가만 살펴보면 애완취향을 경계하는 대신들의 주장에는 일관성이 있다. 지나치지 말라는 것. 사람, 즉 백성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 그리고 역사를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선조 27년), 임금이 거처하는 곳에서 말을 키우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과연 사실이었다. 임금이 암말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간(司諫) 최관이 나섰다.
“소공은 ‘물건을 애완하면 뜻이 상한다(玩物喪志)’고 했습니다. 맹자는 양혜왕에게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한다(率獸食人)’고 했고, ‘마굿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은 굶주린 기색이 있다(廐有肥馬 民有飢色)’고 했습니다.”
분수에 넘치는 ‘애완’이 가혹한 정치의 상징인 ‘솔수식인’의 고사와 절묘하게 연결되고 있다. 경향신문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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