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발굴단은 장도의 성 내부 무너진 석축 안쪽에서 둥그런 구덩이 유구를 발견했다.
당시 발굴단 학예사 김성배의 회고.
“석축이 무너져 내린 부분이 있었어요. 무슨 건물지가 있는 줄 알고 조사했는데 건물임을 입증하는 초석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무너진 석축내부를 정리하다보니 둥그런 윤곽이 보였어요. 잘 들어내니까 철로 만든 유물의 끝이 보였어요.”
김성배의 말이 이어진다.
“그 유구에서 세발 달린 정(鼎·철솥)과 함께 사각형 철제 소반, 편병, 청동병, 저장용 토기 등 범상치 않은 유물들이 나왔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세발솥은 알려진 대로 고대 제사용으로 쓰인 대표유물.
‘세발 솥’의 기원은 중국 하나라 우(禹)왕 때 구주(九州)의 동(銅)을 모아 아홉 개의 정(세발솥·이른바 九鼎)을 만들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천자의 상징이자 보물로 전해져왔다. 일화를 하나 들어보면.
어느 날 ‘춘추 5패’의 한사람인 초나라 장왕(재위 BC 614~591년)이 ‘구정의 대소경중’을 물었다.
구정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는 것은 구정을 자신(초장왕)이 옮겨가겠다는 것. 이는 당시 천자국이었던 주(周)나라를 대신하여 천하를 움켜쥐겠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주나라 천자의 신하인 왕손만의 대꾸가 추상같다.
“구정은 덕행을 쌓아야 만들거나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왕손만은 비록 주나라 왕실의 덕정(德政)이 비록 미약해졌지만 하늘의 뜻이 바뀌지 않았으므로 당신(초장왕) 같은 이가 구정의 대소경중을 물을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고대로부터 이 ‘세발달린 솥’은 경외의 대상이었으며 제사용기로 받들어졌다.
그런데 이 청해진 장도에서 철제 솥이 발견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세발솥과 함께 발견된 정사각형의 철제 소반은 정확하게 반이 쪼개진 채(이는 인위적으로 쪼갠 게 분명하다) 놓여 있었다.
‘왜 석축기단 한가운데 땅을 파고 제사유물을, 그것도 깨뜨려 넣었을까.’
이 매납 유구의 연대는 9세기 말이었다. 고민하던 발굴단의 뇌리를 스친 게 삼국사기 기록들이었다.
삼국사기 ‘제사지’에는 음미할만한 대목이 있다. 신라가 청해진 조음도(助音島)에서 중사(中祀), 즉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
또 하나 발굴단의 상상력을 자극한 기록이 삼국사기 문성왕조였다. “13년(851년) 춘삼월, 청해진을 혁파하고 주민들을 벽골제(김제)로 (강제)이주시켰다”는 것.
그렇다면 이 매납 유구는 ‘장보고의 최후’를 말해주는 제사유구가 아닐까.
당시 윤근일·김성배·신희권 등 발굴단원들의 상상력은 그럴듯했다.
동아시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한 장고보의 힘이 나날이 커진다.
장보고는 왕권쟁탈전에서 패배한 뒤 청해진으로 피신한 김우징을 도와 결국 왕(신무왕)으로 등극시킨다(839년). 신무왕은 당초 왕이 되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겠다고 약조한 바 있다.
그러나 신무왕이 즉위 6개월도 못되어 죽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신라 중앙귀족들은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장보고를 제거하려고 장보고의 옛 부하였던 염장을 보내 살해한다.
청해진은 그 뒤에도 휘하장수들에 의해 유지되다가 토벌된다. 청해진 세력들은 끝내 강제이주 당한다(851년).
발굴단은 특히 ‘반으로 쪼개진 소반’에 주목한다. 이는 더 이상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제사포기 선언’이 아닌가.
조금 더 나아가자면 장보고 청해진 대사를 잃은 주민들이 벽골제로 쫓겨 가기 직전 피눈물을 흘리면서 제사를 지내고는 깨뜨린 소반 등 제기들을 바로 이 유구에 묻은 게 아닐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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