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원한으로 질투하지 않고 나라의 우환을 걱정한 이는 진(晋)의 기해가 있고, 당에는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었으니 누가 동이(東夷)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이는 두목(杜牧·803~852년)이 지은 ‘번천문집(樊川文集)’의 ‘장보고·정년전’을 전재한 송기(宋祁)의 역사서 ‘신당서(新唐書)’에 적힌 내용이다.
이 평가는 장보고와 쌍벽을 이룬 정년(鄭年)의 일화에서 비롯된다.
◇나라를 위해선 원수의 손도 잡는다
장보고와 정년은 서로 힘을 자랑했던 라이벌이었다. 정년과 견줘 나이는 10년 많았으나 힘에서는 다소 밀렸던 장보고는 ‘나이’로 누르려 했고, 정년은 ‘기예’로 대들며 앙앙불락했다.
둘은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 소장(武寧軍 小將)이 됐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훗날 장보고가 고국으로 돌아와 청해진을 차리고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나갔다.
반면 당나라에 남아있던 정년은 관직에서 떨어져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정년은 “내가 동으로 돌아가 장보고에게 걸식하고자 한다”고 결심을 굳힌다. 이에 주변에서는 “그대와 (장)보고 사이가 어떤가. 왜 그 손에 죽으려 하는 가”하고 말렸다.
정년은 “추위와 굶주림에 죽느니 차라리 전쟁에서 깨끗이 죽는 게 낫다”면서 “하물며 고향에서 죽는 것에 비하랴”고 눈물을 삼키며 귀국한다.
그러나 불구대천의 원수인 정년을 맞이한 장보고는 뜻밖에 술을 대접하며 환대했고,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왕(희강왕)이 시해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장보고는 군사 5,000명을 주며 정년의 손을 잡고 당부한다.
“그대가 아니면 환난을 평정할 수 없다.” 이에 정년은 왕경에 들어가 반역자(민애왕)를 죽이고 왕(신무왕)을 세웠다(839년).
두목과 송기가 장보고에 견준 진(晋)나라 기해(祁奚)와 당나라 곽분양(郭汾陽)은 어떤 인물인가. 진나라 도공 때 인물인 기해는 도공이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자 사심 없이 원수지간인 해호(解狐)를 추천했다.
한편 당나라 시대 곽분양은 누구인가. 곽분양은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삭방(朔方)절도사로 임명됐다. 평소 사이가 나빠 한 상에서 음식을 먹더라도 흘겨보면서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던 이임회(李臨淮)에게도 황제의 조서가 내려졌다.
곽분양으로부터 병력의 절반을 받아 동쪽을 토벌하라는 조서였다. 곽분양으로서는 이임회에게 병력을 반이나 내준다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는 난감한 상황.
바로 이때에 절도사로서 엄연한 상관이었던 곽분양이 눈을 딱 감고 이임회를 죽이면 그 뿐이었다.
불구대천의 원수 이임회를 이 참에 능욕할 수도 있었다. 이임회는 곽분양을 찾아가 “나는 죽더라도 처자만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곽분양이 무릎을 꿇은 임회의 손을 잡고 마루위에 올라와 마주앉았다.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이 파천했는데 그대가 아니면 동쪽을 칠 수 없소. 어찌 사사로운 분한(忿恨)을 품을 때이겠소.”
당나라 시인 두목의 평가를 보자.
두목은 “장보고와 곽분양의 어짊이 같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두목은 “곽분양은 결국 황제의 명을 따른 것이고, 장보고는 순전히 자신의 뜻대로 결정한 것이므로 장보고의 결단이 더 어려운 것이었다”고 장보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본기(本紀)에서는 장보고를 ‘반란자’라 했지만 열전(列傳)에서는 신당서의 기록을 인용하며 긍정 평가했다.
장보고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동서고금을 넘나든다.
장보고의 도움으로 당에서 불교를 수업한 일본의 구법승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그를 평등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로 표현하고 있다.
1935년 장보고 관련 논문을 최초로 발표한 김상기(전 서울대 교수)는 그를 ‘해상왕국의 건설자’로 평가했다. 장보고를 국제적인 인물로 알린 이는 주일대사를 지낸 세계적 동양사학자 에드윈 라이샤워(하버드대 교수)였다.
그는 1955년 발표한 논문에서 장보고를 ‘해양산업제국의 무역왕’으로 극찬했다.
장보고는 바다로 진출, 해적과 노예상을 소탕하고 동북아 해상권과 무역권을 제패하여 해상왕국을 건설한 선구자였다.
또한 해외동포를 모아 당 및 일본에 신라촌, 신라방 등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여 치외법권적 특권 및 자치권을 확보하여 국제무역의 기반을 조성했다.
당과 페르시아 상인들로부터 유입된 물자의 판로개척을 위해 봇짐 장사법과 5일·7일장을 개발, 재래시장을 형성하는 등 시장경제와 유통원리를 발전시켰다.
무엇보다도 청해진 시절부터 계승 발전된 조선·항해술은 고려 창건의 토대를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오죽했으면 이순신 장군이 “호남이 아니었던들 나라도 없었을 것(若無湖南 是無國家)”이라고 했을까.
장보고 시대에 개척한 노철산 항로(발해 해안선~산동반도 북부), 황해횡단항로(한반도~산동반도 잇는 최단코스), 남중국항로(일본 하카다~청해진~중국 동남부) 등은 지금도 이용되고 있다.
◇속속 드러난 청해진의 실체
하지만 이토록 추앙받고 있는 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91년에서야 비로소 시작됐다.
대상은 장보고 관련 유구가 즐비하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는 전남 완도 장좌리에 있는 장도(將島)였다.
장군 섬으로 알려진 장도는 육지(장좌리)에서 180m 정도 떨어져 있다. 밀물 때는 섬이지만 썰물 때는 모세의 기적처럼 하루에 두 차례 걸어서 건너 갈 수 있다. 밀물 때의 가장 낮은 깊이는 4m내외.
지난 2001년 끝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10년 발굴조사에서 장도의 전모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 우선 거대한 성의 규모. 섬 안에 총연장 890m의 판축토성을 쌓았다.
최고높이가 2.5m인 성벽의 판축층은 최다 18겹일 정도로 견고했다. 이는 육지에서 얼마나 많은 흙을 운반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정교한 축조기술과 엄청난 공력은 장도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방어용 목책(木柵)을 발견, 배가 닿는 접안·하역시설의 존재와 그 구조를 파악하는 자료를 확보했다는 점. 총연장 331m에 달하는 목책렬은 높이 3~4m, 지름 30㎝ 내외의 50~60년생 소나무 기둥을 촘촘히 박은 시설. 썰물 때는 이 목책렬이 보이고, 밀물 때는 보이지 않게 된다. 밀물 때 배가 접근하면 목책렬은 암초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섬의 입구 쪽에는 100여 평의 면적 내에 지름 10㎝ 내외의 나무 말뚝이 ㄷ자형으로 촘촘히 박혀있었다. 이는 접안·하역시설의 기초로 판단된다. 배의 드나듦을 감시·통제하고 짐을 부린 시설이었을 것이다.
◇‘장도는 청해진의 본영’
또 하나 2000년 7차 조사에서 발견된 우물과 배수로, 그리고 지금까지 출토된 3만 여 점의 유물 중 2만 여 점이 기와편이라는 것도 장도의 위상을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다는 증거이기 때문. 특히 직경 150㎝, 깊이 5.8m에 달하는 우물은 인근 장좌리 장군샘과 함께 청해진 사람들의 식수원이었을 것이다.
기반부에 나무곽을 정(井)자 모양으로 깔고 그 위로 판석과 할석을 서로 엇갈려 높이 580㎝로 둥글게 쌓았다.
해무리굽 청자편 등 100여 편의 중국제 청자조각이 발견됐다. 이는 당시의 교역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
이 해무리굽 청자는 7~9세기 중국의 저장성(浙江省) 월주요(越州窯)에서 제작된 당대 최고가의 청자로, 일본의 후쿠오카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결국 장도가 중국·일본을 잇는 삼각무역의 중심지였을 알려주는 흔적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매납유구. 여기서 발견된 청자완은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명문항아리(847년)와 똑같다.
주름무늬 병은 일면편병, 사면편병, 편구병 등과 공반 되었고,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대중년간(大中年間·847~859년)’의 돌대문대호(큰 항아리)도 함께 나왔다.
출토유물 3만 여 점 가운데 95% 이상이 9세기 유물이었다. 이는 이 유적이 장보고 시대의 것임을 시사해주는 결정적인 증거. 물론 3만8천 평에 불과한 장도에서 1만여 명의 군사가 지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청해진이 곧 장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인근 장좌리, 대야리, 죽청리 일대를 모두 청해진의 영역으로 본다면 그 의문도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장도는 국가제사의 중심지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거성(居城)이 아니었을까. 결국 당의 무령군 소장(연대장 혹은 대대장급)으로 활약하던 장보고가 828년(흥덕왕 3년) 귀국하여 1만의 군사를 얻어 설치한 청해진의 본영일 가능성이 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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